<웨이 백>은 하나의 도전으로 보인다. 사선을 넘나드는 강제노동수용소 수형자들의 생사를 건 탈출이라는 다분히 관습적인 장르 서사를 기저에 깔고 있는 <웨이 백>은 탈주 장르 특유의 드라마틱한 여정을 앞머리에 내세우지 않는다. 피터 위어는 거대한 허전함을 느끼게 하는 절제를 통해 폭력의 역사 뒤로 밀려난 존재의 비의를 매우 예외적인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려 7년의 시간을 보낸 노장의 컴백작이 동유럽의 불우한 과거사를 배경에 깐 스펙터클 서사시라는 것도 의외지만 그의 기개가 시간의 풍파에 마모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웨이 백>을 통해 위어는 단지 데이비드 린풍의 서사극적인 유장함을 재연하고 싶었던 것일까.
<웨이 백>에서 피터 위어의 야심은 아득한 고비사막의 광활함만큼이나 장대하다. 호주 출신으로 할리우드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맛보았던 감독의 신작이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완성되었다는 사실 외에도 이 영화의 모험주의를 입증하는 증거는 많다. <웨이 백>은 이런 종류의 서사적 모험어드벤처 장르의 이점을 거의 취하지 않는다.실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일종의 신뢰성에의 호소도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것이 실화이든 아니든 눈보라와 모래사막, 험준고령의 야생지를 가로질러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결의에 찬 인간에 대한 묘사는 관객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이야기임에 분명하지 않은가. 장르의 관습에 따라 탈옥수들이 생존하리라는 걸 관객은 알고 있으므로 이야기의 초점은 자연히 누가 생존하고,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모아진다. 영화의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피터 위어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진실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을 연출함으로써 유럽의 역사를 횡단하는 끔찍하고 웅대한 여정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사색적인 탈주영화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탈출한 일군의 무리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둔 이야기. 뼈대만 추려놓고 보면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는 제재이지만 <웨이 백>은 형벌의 땅을 탈출해 자유를 찾아 행군하는 마초 군상에게 있을 법한 드라마에 무심하다. <빠삐용>이나 <쇼생크 탈출>류의 교도소 탈출 영화들이 관습화한 드라마틱한 휴머니즘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를 갈망하는 유랑자들의 불굴의 인간 승리 드라마라는 건 마케팅을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수용소 장면까지만 하더라도 관객은 이 탈주의 서사가 필시 저들이 가진 저마다의 재주나 기예에 의해 볼만한 생존게임으로 진행될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왜 아니겠는가? 날랜 칼 솜씨를 지닌 러시아의 갱스터, 담배와 거래될 수 있는 사실적인 춘화를 그리는 그림쟁이, 그리고 단호한 생존의지를 지닌 카리스마 넘치는 사내들의 결탁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조합인가.
영화는 처음부터 배신과 고통, 폭력, 압살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장구한 행로에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는 절실하게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는 정신적 교감을 직접 입밖에 내지 않는 이 과묵한 행군을 보는 것은 어딘지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든다. 몇몇 장면은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는 군상의 내면을 꿈과 같은 상태로 묘사한다. 시베리아의 설원을 지나 앞길을 막는 바이칼 호, 메말라 갈라진 고비사막의 나른함, 오아시스의 신기루, 히말라야를 통과하는 야누스(짐 스터지스) 일행의 롱숏은 하찮은 곤충이나 거대한 좌표상의 점처럼 인간을 묘사한다. 수용소의 비참한 생활을 보여주는 장면에는 여정을 함께할 인물들을 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만 할애될 뿐이다. 삼엄한 경비를 뚫기 위한 치밀한 탈출모의나 탈출과정에서의 역동적인 추격, 탈출 뒤에 오래 지속되는 도피의 긴장도 없다. 극적인 사건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리고 6500km에 달하는 장대한 여정을 실제로 감각하게 만드는 힘겨운 행군이 이어질 뿐이다.
캐릭터의 배경이나 성격도 극미하게 처리된다. 콜린 파렐이 연기하는 포악한 성격의 발카를 제외한 인물들에게는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데, 이런 인상은 저들의 역사가 대개는 생략되어 있거나 지극히 간단하게만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캐릭터의 알맹이가 없어 보이며 순간순간의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해낼 의지가 부재하다는 이유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지루한 예술적 서사영화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이런 비판은 틀리지 않다. 거대한 스코어와 거창한 말들을 쏟아내는 여느 탈주영화에 비해 <웨이 백>은 사색적인 자연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과연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군침을 흘릴 만한 꼴을 하고 있다.
풍경과 얼굴의 영화
이런 <웨이 백>의 외형은 연출자의 창작의 원리 혹은 세계 이해의 기반과 관련이 있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판타지를 제거한 <반지의 제왕>처럼 보인다. 그저 호사가들이 하기 좋아하는 비교가 아니라 <반지의 제왕>의 테마, 육체의 한계를 이기려는 존재의 가치는 그들의 내면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사지를 탈출한 도망자들의 여정만 보여주는 <웨이 백>과 <반지의 제왕>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차이가 있다면 저들에게는 나즈굴과 같은 대적하기 힘든 추격자가 없을뿐더러 절대반지에 필적하는 원대한 목적의식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군말없이 하나둘 동료의 삶을 앗아가는 자연의 시련이 있을 뿐이다.
야만적 폭력과 압제적 노동이 만성화된 유형지에서 탈출한 이들에게 자연은 또 하나의 ‘감옥’이다. 거대한 요새처럼 이들을 가두는 숲과 숨을 곳이 없는 초원, 황량한 불모의 사막은 심신의 자유를 만끽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곳이다. 고통에 거창한 사연은 없지만 고통에 대한 묘사는 피부로 절감될 만큼 리얼하다. 온몸을 휘감은 발카의 문신이든 이레나(시얼샤 로넌)의 짓물러 터지고 부어오른 발이든 미스터 스미스의 벗겨진 피부든 육체의 훼손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의지는 카메라에 담긴 풍경들이 단조로운 구경거리로 전락할 위험에서 이 영화를 구제한다. 피터 위어는 일행이 통과하는 풍경들을 탐사하는 와이드한 숏만큼이나 배우들의 얼굴에 난 상처나 붉게 덴 자국을 상세하게 그려 보여준다. 심지어 한마디의 말도 없이 여위고 마른 얼굴들이 둥둥 떠다니는 장면들도 있다. 예컨대 숨을 곳이 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이레나가 삶의 끈을 놓을 때 저들의 얼굴이 파노라마로 지나간다. 관록이 절로 묻어나는 에드 해리스의 미스터 스미스는 수용소에서 언뜻 비치는 냉정과 행군 과정에서 보여주는 인정으로 흥미를 자아내는 인물이다. 여물지 않는 정신세계를 지닌 소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어른 역할을 하는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처럼 스미스의 수척한 얼굴은 그것을 이루는 세목들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로 주목을 끈다.
물론 이런 형상화 방식은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웨이 백>의 촬영은 카메라 렌즈와 포커스의 사용에 있어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와이드한 풍경 숏과 타이트한 클로즈업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면서 카메라가 시각화할 수 있는 고유한 비전을 펼쳐 보이는 데 몰두한다. 왜 이렇게 거대한 풍경과 얼굴이 하나의 쌍으로 중요성을 지니는가. 촬영감독 러셀 보이드의 탁월한 감각은 시종일관 인간의 왜소함을 두드러지게 하는 주변 지형의 거대함을 강조한다. 개인의 왜소함은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열망(생존이든 자유든 거듭남이든)의 거대함에 의해 상쇄되는데, 여기에 클로즈업의 미학적 정당성이 있다. 피터 위어 스스로 “시네마의 가장 위대한 창안”이라고 했던 클로즈업은 이 영화에서 자연의 장관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영화적 광경을 구성한다. 찢긴 피부와 수염, 부르튼 입술, 나뭇등걸처럼 거친 피부, 날카로운 송곳니, 말라붙은 핏물, 붉게 덴 자국과 기포는 대사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다.
흡사 최면을 거는 것 같은 풍경 이미지의 주술은 인간의 미미함에 자연의 위력과 웅대함을 대비시키려는 의도의 산물이라고만 할 수 없다. <웨이 백>에서 자연은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나 절대 미의 구현이라기보다 이들을 속박하는 또 하나의 감옥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자비와 은혜를 모르는 자연(세계)은 항복을 요구하지만 저들은 사력을 다해 저항한다. 이를테면 원기를 회복해 봄에 떠나라는 티베트 부족민의 충고를 물리치고 행군을 강행하는 야누스의 독자 행동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가 싸우는 것은 신적인 지위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포위한 강압적인 환경의 지배이다. 이 지점에서 <웨이 백>은 야만적 유럽의 역사에 대한 지형학적 알레고리로 방향을 튼다. 많은 사람들에게 위어의 이전 영화들, <갈리폴리>나 <죽은 시인의 사회> <트루먼 쇼> <마스터 앤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처럼 인간의 의지의 숭고함에 대한 찬미로 해석되겠지만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피터 위어식의 주제는 더 넓은 맥락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러할 때 강제노동수용소의 폭정으로부터 탈출한 죄수들의 장구하고 끈질긴 여정을 다룬 이 미니멀한 이야기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비로소 물을 수 있다.
<웨이 백>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적 풍경이 우연적이거나 주변적인 장치가 아니라 텍스트의 핵을 이루는 요소라는 사실이다. 눈과 모래폭풍, 호수, 초원, 설산은 인간의 숨겨진 진상을 들추고, 공공연한 사실로 취급되었던 전후 유럽의 역사적 비밀을 드러낸다. 여느 탈주영화들과 달리 패악을 부리는 간수나 사디스틱한 교도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격전이 여기에는 없다. 있다면 왱왱거리는 모기떼의 공격, 야생의 금수와 한몸이 되어 섞이는 인간, 짧게 맛보는 신기루의 환영이 있을 뿐이다. <웨이 백>의 진정한 주인공이 있다면 그것은 ‘걷기’라는 행위 자체다. 걷기를 묘사하는 데 들이는 영화의 각별한 각고 때문에 우리는 많은 시간 동안 눈보라를 헤치고, 모래바람을 견디며 말없이 걷는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심지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순수한 걷기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맺음된다. 저마다의 추상을 가지고 믿을 수 없이 먼 거리를 함께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현함으로써 피터 위어는 그들을 계속 걷도록 추인하는 동력이 무엇인가를 문답하게 한다.
야만의 역사를 횡단하는 걷기
걷기와 그들이 통과하는 지형은 <웨이 백>의 진정한 테마와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 스탈린 시대의 박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에서 시베리아에서 인도에 다다르는 지리적 공간의 관계와 지형은 어떤 이야기보다 풍요로운 주제이다. 야누스 일행이 통과하는 풍경은 더러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고통스럽고 험준했던 동유럽 역사의 궤적에 대한 메타포이다. 걷는 행위의 제의적 성격은 동행하는 인물들의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모진 문초를 견디지 못한 아내의 밀고로 스탈린에 대한 반역 혐의를 쓴 야누스와 야수와 구별되지 않는 난폭한 범죄자, 스탈린주의의 광란에 밀려 천애고아가 된 소녀, 신성에 버금가는 고행을 치르는 것처럼 보이는 신부, 그리고 내력을 알 수 없는 미국인에 이르기까지 체제의 논리에 순치되어 살기를 거부해 핍박당한 인물들이다.
<웨이 백>은 나치즘과 스탈린의 철권통치, 독일의 동서분단과 냉전, 동유럽의 강압적 공산화 과정,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맞기까지 유럽의 역사를 저들의 고난의 여정에 이입하고 있다. 결말부의 한 시퀀스에서 이것은 직접적으로 암시된다. 인도에 도착해 터덜터덜 걷는 야누스의 해진 부츠 위로 종전과 함께 찾아온 소련의 사회주의 시행과 철의 장막, 헝가리의 봉기, 베를린 장벽의 설치, 프라하에 대한 소련의 군사 개입, 폴란드의 연대운동, 그리고 사회주의 붕괴와 자유화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담은 뉴스릴 필름이 몽타주된다. 이 다소 도식적인 몽타주는 ‘긴 여정’(The Long Walk)이라는 원래의 제목이 돌아오는 여정이라는 의미의 ‘회정’(回程, The Way Back)으로 둔갑한 경위를 설명해준다. 회정이란 단순히 멀고 험난한 여정의 의미라기보다 잃어버린 시간으로의 복귀 또는 상실된 영토로의 회귀에 그 진의가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웨이 백>은 백인 보수주의자의 영화이다. 그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주의처럼 피터 위어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지극히 단순한 요소들만을 추린 드라마로 육중한 감정의 여진을 남긴다. 멸실된 자유의지의 회복을 완고하게 주장하는 <웨이 백>의 참된 주제는 그러므로 유럽 역사의 지형학이다. 야누스 일행의 여로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적인 극사실주의의 외양을 띠고 있다고 해도 울림이 강한 이 영화의 성과는 지형에 대한 자연주의적 탐사 과정을 통해 현대 유럽의 정신사적 여정을 아우르려는 시도에 있다. 인물과 사건의 구체가 희미한 자연과 걷기에 대한 <웨이 백>의 묘사는 추위와 기아, 아픔의 시대를 휩쓴 정황에 대한 서사시적 형상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