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혁은 말을 길게 하는 편이 아니다. 툭툭 던지듯,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솔직한 답변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곤 했다. “입으로만 얘기하는 거 싫어한다. 공식 인터뷰라고 해서 입에 발린 홍보만 하면, 요즘 관객은 다 똑똑해서 어차피 곧 알게 되니까.” 그는 “진심을 담아서 안 하면 불편하다”고도 했다. 그런 면에서 <적과의 동침>을 함께 만든 배우들과 박건용 감독 등 제작진에 대해서 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010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힘들게, 공들여 찍은 <적과의 동침>을 아직 보지 못한 그 역시 빨리 영화가 보고 싶다고 했다.
충청남도 석정리에서 벌어진 실화. 한국전쟁 당시 석정리의 한 마을에 입성한 인민군을 마을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인민군들 역시 마을 사람을 형, 누나처럼 따르며 정을 쌓았다고 한다. 연합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급변해 결국 북으로 후퇴해야만 했을 때, 어린 인민군들은 “이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배세영 작가가 자신의 할머니에게 들었던 석정리 실화에 살을 붙여 써내려간 작품이 <적과의 동침>이다. 한국전쟁 당시, 온 나라가 난리통이지만 라디오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석정리는 평화롭기만 하다. 구장(변희봉) 댁의 당찬 손녀딸 설희(정려원)의 혼사 준비로 분주한 동네 사람들 앞에 느닷없이 장교 정웅(김주혁)이 이끄는 인민군 부대가 등장한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지켜내기 위해 인민군에게 전폭적으로 협조하는 시늉을 한다. 입으로만 인민군에게 절대적 충성을 맹세하는 재춘(유해진), 어눌하지만 촌철살인 한마디를 툭툭 던지는 봉기(신정근), 권력이 바뀔 때마다 놀라운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적응하는 백씨(김상호) 등은 인민군을 감정적으로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런 상황이 실재했다는 게 재밌었다. 따뜻해서 마음에 들었고.” 김주혁이 영화 <적과의 동침>에 이끌린 첫 번째 이유였다. 부연하자면 김주혁에게 있어 <적과의 동침>의 매력은 6·25를 다룬 여타 영화들과의 차이점에 있었다. 냉전 시대의 장막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 한국에서, 6·25영화들은 대개 거대한 액션 전투신에 집중하거나 선명한 정치적 대립구도 속에서 미묘한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과의 동침>은 전쟁영화라기보다 석정리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인 백석과 겹쳐 보이는
김주혁이 연기하는 유학파 엘리트 장교 정웅은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었을 것이다. 클라이맥스 전투신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상황을 제외하고, 그가 자신의 속내를 직접적으로 털어놓거나 주변 사람들과 적극적인 액션-리액션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정웅의 마음 한켠에는 6·25 이전의 소년이 여전히 살아 숨쉰다. 노래 <매기의 추억>을 가르쳐주던 첫사랑과의 추억을 간직하고, 이론서 안쪽에 백석의 시집을 감춰놓고 읽을 정도로 감성적이다. 하지만 또 한켠으로는 인민군 장교로서 핍박받는 인민이 골고루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낙원을 만들겠다는 이상으로 불타고 있다. 소년과 리더는 양립할 수 없다. 당연하게도 정웅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며 다소 소극적으로 리액션을 해야만 한다. 연기하기에 조금은 답답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이에 대해 김주혁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라며 직관적으로 납득하는 입장이었다.
“올바른 녀석이었다. 자기 입장에선 공산주의 사상이 올바르다고 생각했고, 공산주의와 현실이 접목되었을 때의 결과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이론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6·25전쟁을 실제로 겪는 과정에서 혼선이 온 거다.” 마을 주민 재춘, 봉기, 백씨 등이 영화 전반적으로 탁탁 튀어오르는 활력소 역할이라면, 정웅과 설희는 “차분하게 쑥 빠져 있어야” 했다. 정웅이 설희 앞에서 백석 시를 읊고 초콜릿을 주는 장면의 유머 역시 아주 은근하게 처리된다. “만일 처음 봤던 시나리오대로 찍었다면, 정웅의 부대가 석정리에 들어올 때부터 이미 전투를 한번 치러야 했다. 그랬다면 마을 사람들이 정웅을 되게 위압적인 존재로 인식하면서 거기서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모습과 무서운 이미지의 정웅이 뒤에서 슬쩍슬쩍 석정리 주민들을 도우려고 하는 모습이 조금 더 타당성을 담보할 순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시나리오의 방향은 바뀌게 마련이고, 지금은 코미디쪽이 좀더 강해진 버전이다. 영화상으로 정웅이 너무 안 무서워서 그게 좀 걸리긴 한다. (웃음)”
정웅의 캐릭터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김주혁 연기 인생 최초의 사투리 도전!’이라는 호들갑을 떨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평안도 사투리다. 그간 한국영화 혹은 드라마에서 북한을 묘사할 때 대부분 억센 함경도 사투리를 사용했던 건 지방색을 손쉽게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애당초 <적과의 동침>의 정웅 캐릭터에는 그저 ‘북한군 설정’만 있었을 뿐 어디 출신이라는 설명은 따로 붙어 있지 않았다. 김주혁은 사투리 지도를 위해 만난 북한 엘리트 장교 출신 새터민(“군대에 10년 정도 계셨다고 하던데, 아주 대찬 분이었다”)에게서 정웅 캐릭터의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함경도 사투리는 익숙한 대신 자칫 우스꽝스러워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그 새터민 분이 쓰는 평안도 사투리는 낯선 억양이 살짝 얹혀져 있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뉘앙스가 정웅의 성격과 잘 맞을 것 같았다.” 재미있는 우연은, 영화 속 정웅과 설희를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인 시인 백석과의 일치점이다. 평안도 출신, 일본 유학파 엘리트였던 백석의 고운 심상이 정웅의 그것과 겹쳐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체력에서 나오는 열정이 중요하다
2010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김주혁의 스케줄은 살인적이었다.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적과의 동침> 올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했던 것부터 생고생은 시작이었다.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지난해 여름 비가 정말 많이 왔다. 한달 내내. 그것 때문에 촬영 스케줄이 계속 밀렸고, 결과적으로 막판 추워질 때 한달 동안 미친 듯이 찍었다. 해가 뜨면 찍기 시작해서 해가 져도 계속 찍었다. (웃음) 하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게 조금 지치긴 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니까 위험한 장면도 많고, 공포탄을 쏘는데도 바로 귀 옆에서 찍으니까 괴롭더라.”정웅이 석정리 마을 주민들의 꾐에 빠져 소를 끌고 밭가는 장면에서는, 소가 걷는 내내 소변과 대변을 싸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던 기억도 생생하다.
<적과의 동침> 촬영이 끝난 다음 1월20일 바로 크랭크인한 <투혼>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프로야구선수 도훈을 연기하는 그는, “어설프면 바보되니까” 촬영 직전까지 투수가 되기 위한 특훈을 받았다. 김주혁은 이야기하던 도중 불쑥 휴대폰 속에 저장된 야구장면 동영상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화면 속 김주혁의 얼굴을 가리고 본다면 현재 개막한 프로야구 한 장면을 보는 거라 착각할 만했다. “하도 연습했더니 오른쪽 어깨가 다 나갔다. 지금 이거, (앞에 있던 담뱃갑을 집어들며) 이거 하나 드는 데도 어깨가 아프다. 촬영 마치면 바로 재활치료 들어가려고.” 엄살을 부리는 것 같지만 엄살은 아니었다. 김주혁의 얼굴엔 슬며시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자전>을 필모그래피의 터닝 포인트로 꼽은 적이 있었다.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배우에게 다소 쑥스러운 질문일 수 있으나, 지금까지 현대극과 사극, 착한 남자와 나쁜 남자, 혹은 섹시한 남자까지 두루 거쳐왔다. 그의 앞으로의 야심이 궁금했다. 아직 못해봤고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캐릭터가 있을까? “악역 못해봤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짧고 시원스럽게 답했다.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아직 마음에 딱 드는 악역을 찾질 못했다. 악역이라 악역인 건 재미없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하고 싶은 거야 많지. 그런데 자기 옷이 다 있는 것 같다. 어떤 역을 하다보면 별거 아닌 장면에서도 입이 안 떨어질 때가 있다. 지금까지 안 해본 역이지만 무슨 장면에서든 입이 확확 떨어질 때가 있는데… 고민을 여전히 하고 있다. 난 나이가 들수록 연기가 재밌다. 정신력에서 나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체력에서 나오는 열정이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나 스스로를 건강하게 만들어둔다. 안주하지 않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