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누군가의 딸 혹은 엄마일 세상 모든 여성들 <마더 앤 차일드>
2011-04-27
글 : 김용언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능력있는 변호사로 승승장구하는 엘리자베스(나오미 왓츠)에게 세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상처가 있다는 걸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여자들은 절 적으로 간주해요. 전 자매애 같은 것은 믿지 않거든요.” 그녀는 태어나자마 입양되었고 양부모에게서도 버림받다시피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14살 때 스스로 지었고, 17살 때 불법으로 불임수술을 받았으며 그 이후 계속 혼자 살았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임신하면서 그녀는 혼란에 빠진다. 14살 때 딸을 낳자마자 입양보냈던 엄마 캐런(아네트 베닝)은 37년 동안 매일 딸에 대한 미안함으로 하루하루를 덧없이 흘려보냈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노모가 죽은 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비로소 딸을 찾을 용기를 낸다. 그리고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진단을 받은 뒤 입양을 결심한 루시(캐리 워싱턴)는 아이에 대한 애착이 커져갈수록 남편의 마음이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감독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나인 라이브즈>를 통해 여러 여성들의 삶이 알지 못하는 사이 운명의 비밀스런 작용으로 서로 연결되며 위안과 사랑과 (일시적이나마) 평안을 얻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마더 앤 차일드>에서는 아예 모성이라는 테마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며, 누군가의 딸 혹은 엄마일 수밖에 없는 세상 모든 여성의 미묘한 입장을 하나하나 음미한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더 앤 차일드>의 주인공들은 여성이라는 성별의 카테고리로만 한정지어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과 견딜 수 없는 고독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인물들이라 하는 쪽이 더 맞다. 그 정서를 극대화하기 위해 모성과 출산이라는 생물학적이고 절대적인 근거를 빌려왔다고 봐야 한다.

<마더 앤 차일드>의 첫 장면은 중년의 딸 캐런이 악몽을 꾸고 벌떡 일어나 노년의 어머니 옆을 파고들며 잠을 청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해도 그러기 싫다. 어차피 실망만 하는 인생이다”라는 어머니처럼, 캐런 역시 사람들에게 실망하기 싫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틈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입매는 종종 매우 완고하게 주름잡힌다. 엘리자베스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인 폴(새뮤얼 L. 잭슨)은 “아이들보다 더 친밀했던” 아내와 사별한 뒤 큰 상실감에 젖어 있다. 엘리자베스가 아파트 옥상에서 마주치는 시각장애인 소녀 바이올렛은 “날 무서워하는 엄마”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대상에게 거부당하거나 아예 그 대상을 갖지 못한 이들은 종종 어떤 공간에서든 혼자 팽개쳐졌다는 열패감을 뼈저리게 느낀다.

“사람 안에 있는 사람”, 비단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만을 뜻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단 한명이라도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공감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한명을 드디어 만난다는 것은 거대한 축복일 것이다. “다시는 당신에게 느낀 것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거예요”라는 캐런의 고백이나 “만일 우리가 만나게 되면 과거가 아닌 미래를 보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어요”라는 엘리자베스의 주문은, 그녀들만이 짊어진 고통이 아니다. 아이가 “유리처럼 부서져버릴까 하는 걱정”을 평생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의 숙명처럼, 우리는 그 한 사람을 만나고 그 관계를 소중하게 지키기 위해 있는 힘껏 발을 내디뎌야만 한다.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언뜻 진부하기 짝이 없는 소재로 출발하여, 몸서리쳐질 만큼 황폐한 내면을 담담하게 응시한다. 감정의 폭발이나 절규가 없는 대신, 보는 내내 눈물이 계속 고여 있게 된다. 모성을 신화화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딸이나 엄마와 맺는 관계에 있어 여성들이 비정상적일 만큼 강인해질 수 있는 어느 순간순간들이 또렷하게 각인된다. 엘렌 페이지의 <주노>와 비교해서 감상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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