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에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아 잘 보고 잘 먹고 잘 놀았다, 라고 쓰려 했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서울에서 데스크를 맡기로 했던 L모 기자가 갑자기 심각한 부상을 입으면서 일이 꼬였다. 황급히 짐을 꾸려 서울로 올라와야 했으니 이런저런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5시간30분짜리 역작 <카를로스>를 보겠다는 원대한 포부에서부터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선물 가게를 지나는 출구>, 두기봉과 위가휘의 로맨틱코미디 <단신남녀>, 실뱅 쇼메의 소문난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스릴러 <이센셜 킬링> 등을 접하겠다는 소망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삼천동 막걸리 골목에서 안주의 향연을 즐기는 것도 불가능했고, 왱이집의 담백한 콩나물국밥, 다문의 정갈한 한정식, 베테랑 분식의 칼국수, 남문시장의 피순대도 먹을 수 없게 됐다. 5월 초 ‘시즌 아웃’돼버린 프로야구 선수나 월드컵을 앞두고 부상당한 국가대표 선수가 돼버린 듯한 심정. 이렇게 3박4일 만에 전주 일정이 끝날 줄 알았다면 초반부터 ‘힘조절’ 없이 열심히 보고 먹고 마셨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건 겨우 볼 수 있었던 두편의 영화가 모두 만족스러웠다는 점이다. 하나는 올해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찰스 퍼거슨의 <인사이드 잡>. 이 영화는 2008년 세계 경제를 끝장낸 월 스트리트의 금융 위기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금융업에 대한 규제 완화 및 철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다양한 인물의 진술을 통해 논리정연하게 설명한다. 인상적인 대목은 규제 철폐를 주장해온 경제학자들과의 인터뷰다. 그들은 몇몇 대형 금융사로부터 거액을 받고 연구활동을 해왔는데, 이에 관해 질문을 던지자 답을 회피하고 거부하고 뻔뻔한 태도를 취한다. 이 와중에도 금융규제 철폐 운운하는 이 나라의 국회의원과 관료와 학자들의 얼굴이 떠오른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머지 하나는 켈리 레이카르트 감독의 <믹의 지름길>이다. <웬디와 루시> <올드 조이> 같은 전작에서처럼 레이카르트는 내러티브를 배제한 채 특정한 순간을 미니멀하고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삶의 근원적 문제를 건드린다. 19세기 중반 오리건으로 이주하던 세 가족이 맞닥뜨린 문제의 본질은 믿음이다. 길잡이 믹과 여정에서 생포한 인디언은 믿을 수 없지만, 그들을 믿지 않는다 해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다. 불신의 믿음과 미친 이성으로 가득한 여정, 그것이 삶 아니던가라는 깨달음(은 관객의 야유에 가까운 괴성 속에서 찾아왔다).
아쉽지만 그럭저럭 보람은 있었다. 영화제에서 진정으로 얻게 되는 소득이 거기서 본 영화의 감흥이 아니라 보지 못한 영화에 대한 열망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맛의 고장에서 삼백집의 콩나물국밥, 효자문의 갈비탕, 오원집의 돼지구이, 전일슈퍼의 통북어, 가족회관의 비빔밥밖에 먹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롭긴 하지만. 스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