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시민들에게 5월은 잔인한 달이다. 매년 5월이 돌아오면 광주의 꽃집 아저씨도, 참외장수 아주머니도, 중국집 배달부 아저씨도, 너나 할 것 없이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훔친다. 1980년 5월18일 시작돼 가늠할 수 없는 희생자를 내며 열흘간 지속된 광주민주화항쟁은, 그렇게 시민들에게 평생의 낙인을 남겼다. 김태일 감독의 <오월愛>는 책에 기록된 광주항쟁의 역사가 아니라, 항쟁을 겪은 개개인이 일기장에다 썼을 법한 사적인 역사의 조각들을 모아 만든 다큐멘터리다. 80년 5월 광주에서 총을 들고 계엄군에 맞서 싸운 시민군, 그들에게 주먹밥을 만들어주던 여고생, 상부의 명령에 따라야만 했던 계엄군, 항쟁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안하고 아프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월愛>에서 자신의 31년 전 기억을 조심스럽게 꺼내놓는다.
영화에 출연하는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겪었을 고통의 깊이는 짐작할 수 없지만 겪지 않은 이도 공감은 할 수 있다. 5월11일 수요일 오후 7시 대학로CGV에서 열린 ‘시네마톡’의 공기는, 그래서 진지하고 무거웠다. 시네마톡은 매달 CGV 무비꼴라쥬에서 개봉하는 영화 한편을 선정해 <씨네21> 기자와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관객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대화를 나누는 행사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는 “1년 반 동안 시네마톡을 진행해왔지만 오늘이 가장 분위기가 무거운 날”이라는 말로 작은 웃음을 이끌어냈지만 대학에 들어가서야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된 80년대 학번으로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는 소감을 전했다. <씨네21> 정한석 기자와 김태일 감독, 주로미 조감독이 자리를 함께했다.
광주를 시작으로 10개국 민중사 기록할 예정
<오월愛>는 김태일 감독과 주로미 조감독이 계획 중인 ‘민중의 세계사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다. 두 제작진은 광주를 시작으로 캄보디아, 팔레스타인, 알제리와 콩고 등 10개 국가의 민중을 만나 <오월愛>와 유사한 방식으로 각 나라의 역사를 되짚어볼 예정이다. 이미 두 번째 촬영지가 될 캄보디아의 사전답사를 마친 상태라고. 정한석 기자가 프로젝트의 시작 배경과 광주를 출발점으로 삼은 이유를 묻자 김태일 감독은 “기록에 담기지 않은 분들 이야기 속에 보석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가족들과 함께 여행삼아 출발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의도를 밝혔다. <오월愛>는 김태일 감독의 ‘가족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는 작품이다. 주로미 조감독이 아내이고 아들 김상구씨가 연출부를 맡았기 때문이다. 주로미 조감독은 광주를 첫 장소로 정하는 데 김태일 감독과 의견 차이가 컸음을 밝혔다. “남편은 처음에 (광주로) 시작하자고 했고 나는 프로젝트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가장 마지막에 광주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감독이라 내 의견이 좀 밀린 것도 있지만 막상 광주 작업을 시작해보니 첫 작품으로 삼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광주 시민들이 항쟁 당시 고통을 당해서 대체로 몸이 안 좋으신데, 광주를 마지막에 촬영했더라면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서다.”
한편 이 영화에서는 인터뷰에 응하는 남성과 여성 시민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남성 시민들은 이름을 밝히고 구체적인 기억을 증언하는 한편, 여성 시민들은 가명을 쓰거나 얼굴 공개하기를 꺼리고, 몇 차례나 인터뷰를 거절한다. 김영진 평론가는 어떤 분이 촬영할 때 가장 다가가기 힘들었냐고 물었다. 주로미 조감독은 “여성분들은 인터뷰하기가 모두 힘들었다. 김성용 신부님(항쟁 당시 계엄군의 경비망을 뚫고 서울 명동성당의 김수환 추기경에게 찾아가 폭도의 도시로 매도된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편집자)의 소개로 여성분들을 소개받았는데, 고통이 너무 크셔서 질문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표정과 울먹임을 화면에 담으려고 많이 애썼다”고 말했다. 광주의 여성 시민 중 몇몇은 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상무대 영창 등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협박을 받았는데,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한다. 물론 영화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힘차게 살아가는 여성들 또한 등장한다. 항쟁 당시 주먹밥을 만들었던 아가씨들은 이제 ‘아줌마’가 되어 힘찬 생명력을 자랑한다. 주로미 조감독은 “그분들의 더 재밌고 힘있는 모습이 많았지만 전체 이야기를 고려해 편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분이 아쉽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오월愛>의 제작진이 60여명의 광주 시민들을 만나며 80년 5월의 기억만 물어본 것은 아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해 평균 네다섯 시간, 인생에 대해 구술에 가까운 인터뷰를 했다”는 김태일 감독의 입장에서는 화면에 담기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미처 찾지 못한 이들의 사연이 안타깝다. 김 감독은 “광주에 대한 소설이나 자료를 읽어보면 넝마주이나 갱생원에서 지내던 분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결국 찾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했다. 김태일 감독과 주로미 조감독도 완전하게 모든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오월愛>가 다루지 못한 부분을 이 작품을 본 누군가가 꼭 담아줬으면 좋겠다”며 제작진이 이번 작업을 하며 남긴 영상과 자료를 이후 광주항쟁에 대한 작업을 하는 분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대학 출신은 만나지 않는다는 게 작업의 원칙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도 진지한 질문이 이어졌다. “영화에 가진 사람, 배운 사람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는 관객의 질문에 주로미 조감독은 “작업을 시작할 때 아주 촌스럽게 정한 기준이 하나 있었다. 대학 출신은 만나지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광주항쟁 관련 다큐멘터리들은 충분히 제작되어왔다는 생각에서다. “당시의 광주는 어느 한 계층이 항쟁을 이룬 게 아니다. 광주 시민 전체가 참여해서 스펙트럼이 넓었는데 여전히 주목받지 못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담는 게 우리의 목적이었다.” 앞으로도 다른 연출자가 다른 시각으로 다룬 광주항쟁에 대한 작품이 “한 도서관을 가득 채울 만큼” 만들어져야 하며, <오월愛>를 그 도서관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하다는 주로미 조감독의 말에 객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시네마톡을 닫으며, 정한석 기자는 ‘비광주 출신’으로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말했다. 이에 대해 김영진 평론가는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여전히 싸늘하게 광주 시민들을 바라보는 부모님들의 시선에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잊지 않고 끊임없이 얘기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불현듯 <오월愛>의 내레이션이 떠올랐다. 폭도에서 유공자로 부르는 이름은 바뀌었지만 80년 5월 이후의 광주 시민들은 여전히 스스로 항쟁의 주체가 되지도 못하고 객체도 되지 못한 섬 같은 존재들이라는. 그 외로운 섬에 어떻게 다리를 놓을 것인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고민거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