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 복싱 금메달리스트였고, 예쁜 연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모든 것이 망가졌다. 13년이 지난 뒤, 있는지조차 몰랐던 딸의 존재를 알게 된 말썽쟁이 아빠의 심정은 어떨까. <회초리>의 주인공 두열(안내상)은 13년 만에 만난 딸 송이(진지희)와 쉽게 합치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감정을 품에 안고 살아간다. 안내상이 맘먹고 도전한 신파 연기, 그는 정성을 다해 이 절절한 부성을 연기했다.
-많이 마른 것 같다.
=1주일 넘게 앓았다.
-드라마 <로열 패밀리> 촬영 끝내고 나서 힘들었던가 보다.
=옛날부터 작품이 하나 끝날 때마다 많이 아팠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 놓아서 그런가. 근래 들어선 괜찮은 편이었는데, 3년 만에 된통 아팠다. 장염에 몸살까지 겹쳐서 일주일 내내 죽만 먹었다.
-아무래도 <로열 패밀리>처럼 촘촘하고 독한 드라마는 배우들한테도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음, 주연배우들은 되게 힘들어했는데 내가 맡은 조동진 역은 분량이 적어서 아주 편하게 찍었다. (웃음) 솔직히 처음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땐 부담스러웠다. 내 출신 자체가 로열과는 거리가 머니까. 시놉시스를 읽고 어떤 그림이 떠올라야 집중도 하고 준비도 할 수 있는데, 조동진은 영 그림이 안 떠올랐다. 그런데 작가님이 나를 꼭 출연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다더라.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여서 결정을 내렸고, 리딩 첫날 작가님을 뵈었다. 알고 보니 대학 후배였고, 드라마 중반부터 조동진에게 힘도 많이 싣겠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드라마 촬영현장이 워낙 촉박하다 보니…. 쫑파티 때 작가님이 “조동진을 꼭 제대로 만들고 싶었는데 막판에 경황이 너무 없었다”며 미안하다고 하더라. 다음 작품으로 보답하겠다고. 그런 말을 해주니 너무 고맙고 기분이 좋았다.
-영화 <회초리>는 어떻게 출연을 결정했나.
=MBC 단막극을 경주에서 찍고 있을 때 처음 제안을 받았다. 내가 맡은 배역이 주인공이래. 퍼뜩 놀라서 “내가 주인공이라니, 말이 돼?” 하고 되물었다. 섣불리 나에게 들어올 제안이 아니니까, 주인공 제안은 처음이니까 시나리오를 섬세하게 안 읽을 수가 없었다. 정성이 가득 담겨 있고 오랫동안 숙성시킨 시나리오라는 인상을 받았다. 중반 이후로는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눈물이 주르륵 나오고. 애틋한 부성을 전형적인 신파로 끌어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엔 신파를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난 신파를 정말 잘해낼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필모그래피를 보면 신파를 떠올리기가 힘든데, 어떤 뜻인가.
=내 인생 자체가 신파 같기도 하고…. (웃음) 그런 연기를 늘 해보고 싶었다. 진정성을 보여주면 신파도 매력적인 장르라고 관객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딸이 아빠를 찾는다, 십 몇년 만에 만나 둘이 부둥켜안고 운다, 딸에 대한 애정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른다. 너무 뻔하고 당연한 장면이라도 배우의 연기를 통해 새삼 감동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드라마에선 가끔 신파장면을 찍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회초리>의 부녀 두열과 송이는 13년 만에 만나서인가 부녀 관계라기보단 거의 연인 같은 느낌도 든다. 둘 사이의 거리감과 안타까움이 강조되어서 그런 것 같다.
=막 나가고 불량스런 아빠와 지나치게 바르게 자란 딸이라는 설정 자체가 잘 어울릴 수 없는 관계여서 그렇게 보인 것 같다. 존재감이 뒤바뀐 셈이지. 세상을 놓아버린 남자는 철없는 어린애처럼 까탈스럽게 굴고, 딸은 너무 반듯하게 잘 자라서 어른의 경지를 섭렵해버린 차원에 이르렀고. 후반부에 송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고 난 다음에도 덥석 껴안아주지 못하는 건 그동안 두열이 너무 못되게 굴어서라기보다 딸의 존재감이 사뭇 다르게 느껴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딸에게 “이눔 새끼” 하고 편하게 대할 수 없이,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을 가슴에 품어야 하는 애절함이 있는 거다. 부녀라기보단 친구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다.
-송이 역의 진지희와는 연기호흡이 어땠나.
=<지붕 뚫고 하이킥!>을 거의 안 봐서 처음엔 잘 몰랐다. ‘빵꾸똥꾸’로 유명하다는 것 정도, 되게 센 이미지로 나왔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까 안경 끼고 똘똘하고 공부 잘하게 생긴 어린이가 서 있더라. (웃음) “네가 지희니?”라고 물어보니 “네, 아빠”라고 답했다. 정감 가는 붙임성이 장난 아니었다. 그리고 연기를 같이 시작하니까, 내가 복받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본인이 일단 연기를 잘하고, 사소한 디테일 정도를 감독님이나 내가 몇번 지적하면 바로 알아듣고 고친다. 자기 감정이 어느 정도에 와 있어야 하는지,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똑똑한 아이다. 이 어린아이가 진정성을 표현하려고 하는데 내가 오히려 감동을 많이 받았다. 편집된 장면 중에 지희의 긴 독백신이 있다. 24시간 내내 탈진할 때까지 찍었는데, 어른들도 소화하기 힘든 걸 단독으로 연기하는 걸 보면서 정말 연기에는 남녀노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연기 아닌가, 왜 우리는 저런 걸 갖지 못했을까 싶어 긴장되더라. 지희한테 밀리지 말아야지 싶었고, 지희의 에너지가 워낙 세니까 나도 많이 받아먹었고. (웃음) 둘 사이의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역할상 진지희를 때리기도 하고 심한 욕을 퍼붓기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연기라도 그런 부분은 양쪽 모두에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쉽진 않았다. 그래도 욕심을 내서 “송이가 아빠를 건드려줘야 해, 확 건드려서 아빠가 같이 화낼 수 있게”라고 지희한테 부탁했다. 아빠를 사랑하지만 그 표현이 쏘아붙이고 나무라는 것으로 거칠게 나올 때 성질 나쁜 어른이 자연스럽게 욱하는, 그런 주고받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희는 그걸 잘 받아줬다. 자신이 극중에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어떻게 당해야 하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감독님은 두열이 골프채 휘두르는 장면에서 송이가 멍하게 쳐다보기만 하라는 디렉션을 줬는데, 난 동의할 수 없었다. 감독님한테 우리 둘이 알아서 해보겠다고 미리 부탁드린 다음, 지희에게 “미리 정해놓지 말자. 내가 먼저 휘두를 테니 그 장면에서 네가 직접 느껴봐라”라고 당부했다. 어떻게 하자가 아니라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기다려보자고 약속한 거지. 슛 들어가자마자 지희는 너무 놀라서 겁을 집어먹고 눈물을 글썽거리더라. 준비된 연기가 아니라, 그런 폭력을 처음 당한 아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연기자 진지희가 아니라 어린 딸 송이를 보여주더라. 감독님도 그 모습을 보더니 그게 맞다고 인정하셨다.
-사실 <회초리> 보면서 생각보다 수위가 센 장면들이 많아 놀랐다. 설정이 조금 과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결말 때문에 감독님도 고민 많이 하셨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극적 선택으로선 결말을 포기할 순 없었다. 구체적인 장면만 여과시키면 되지 않을까 싶었고. 나 역시 아주 심각하게 생각 안 했던 점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막상 그 장면을 보는 어린 관객한텐 충격이 컸나보더라. 지희도 기술시사회 때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울음을 주체 못하고 통곡했고, 우리 딸도 13살인데 20분짜리 편집본을 보여주니까 그 장면에서 “나 안 볼래!” 하고 소리지르며 거부하더라. 어린 관객에겐 조금 무리가 있었구나 싶긴 했다.
-맘먹고 출연한 신파영화인데, 신파일수록 관객의 감정선을 자극하려는 정확한 계산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회초리> 전체를 끌고 가는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 감정의 상승을 그렸나.
=상황이 도와줘야 감정도 끓어올라간다. 그 부분이 좀 부족한 측면이 분명 있었다. 나름대로 시나리오상에서 계산을 다 해놓고 연기를 했는데, 편집하면서 꽤 많은 시퀀스들이 잘려나갔다. 장면 순서도 좀 바뀌었고. 두열이 송이한테 못되게 굴다가 갑자기 다정하게 대하는 게 이상해 보일 수 있다. 두 감정을 접목시키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것도 잘렸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결과물에선 감정선이 툭툭 끊겨서 좀 답답했다. 배우가 가져가는 영역과 후반작업의 영역이 다르구나 다시 한번 느꼈고. 아직도 좀 헛갈린다… 후반부에 두열이 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이 있다. 처음 시나리오 보면서 감동 받은 게 바로 그 부분이었다. 너무 슬프고 애절하고 신파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선 그 부분이 통째로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첫 주연작이라 애착도 많이 가고 관심을 집중시키는 부분이 있었는데….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영화와 다르게 나온 부분이 있어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시>에서 무정한 학부모로 출연했을 때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창동 감독님과는 <오아시스> 이후로 두 번째 협업이었는데.
=감독님과 5년 만에 다시 만났다. <오아시스> 찍을 땐 연극하다가 건너온 거라 영화쪽으론 너무 초짜였다. 촬영할 때 두렵고 떨리기만 했다. 이제 세월이 지났고 다른 경험도 쌓이고 하니 감독님께 나름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깨졌다. (웃음) “지금 안내상씨는 본인의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안내상씨가 윤정희 선생을 바라보면서 어떤 식으로 말할 것 같냐. 본인이 직접 느껴야 한다”고 하시더라. 난 ‘어떤 사람이 할머니한테 말을 걸 때 이런 식으로 하겠지’ 하고 설정해서 간 건데, 바로 지적받은 거다. 대체 감독님은 어떤 분일까, 너무 큰 가르침을 받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설정은 이창동 감독님 영화에서만 가능한 건 아닌가 싶은 의구심도 들고, 몇번 지적을 받고 나서 나도 뭔가를 놓았다. 그냥 안내상의 목소리로 하면 된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연기했다. 그 다음부턴 별 말씀 안 하셨다. “내 영화는 당신들이 얘기하면 다 되는 영화다”라고 하시더라. 세월이 흐르면 이창동 감독님 영화에 다시 도전하고 싶다. 감독님 말씀을 꼭 기억해두었다가 잘해야지. (웃음)
-굉장히 바쁘게 다작을 하는 편이다. 이젠 좀 쉴 수 있는 건가.
=<회초리>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과 촬영 기간이 딱 겹쳤다. 거의 잠을 못 잤다. <성균관 스캔들>은 사극이니까 한 장면 찍으려고 제천, 경주 각지를 돌아다녀야 한다. <회초리>는 강원도 철원에서 찍었는데 철원에서부터 여섯 시간 이동해서 한신 찍고, 밤새우고 올라와서 바로 <회초리> 찍고. 옛날엔 견딜 만했는데 이젠 죽을 것 같더라. 양쪽 모두에 많이 미안하고, 나도 힘들고. 나 역시 한 작품에만 집중하고 싶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모두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기되고 변경되는 부분이 너무 많으니까…. 올해도 영화 두편 정도 더 찍게 될 것 같은데, 스케줄 정말 조심해서 짜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