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조광수] 내년엔 ‘동성결혼 합법화’ 이슈화 해볼까
2011-05-20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백종헌
청년필름 대표, LGBT영화제 집행위원장, 퀴어영화 감독 김조광수를 만나다

청년필름의 김조광수 대표는 사주를 믿지 않는다. <해피엔드> <와니와 준하> <질투는 나의 힘> <분홍신> 등 10여년 넘게 영화를 제작해오며 큰 고비도 여러 번 넘겼을 텐데, 한번도 타인이 들려주는 ‘운명’에 의지해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 대표가 만약 올해 초 사주를 봤다면 운명은 그에게 달콤한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었을 것이다. 김 대표가 제작한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1월27일 개봉, 이하 <조선명탐정>)은 479만 관객을 돌파하며 20억 빚에 허덕이던 청년필름의 구원투수가 됐다. 3월에는 오래된 연인과의 내년 결혼 소식이 세간에 알려졌다. 4월에는 대법원이 김 대표가 연출한 퀴어영화 <친구사이?>에 대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판정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런 희소식을 거치며 김조광수 대표는 제작을 맡은 영화 <의뢰인>의 촬영을 무사히 마쳤고, 6월 열릴 LGBT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됐으며, 연출을 맡을 신작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의 캐스팅 작업을 진행 중이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그러니까 올해는, 김조광수 대표의 ‘화양연화’다.

-맡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크게 보면 청년필름에서 제작자 일을 하면서 사이사이 연출작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캐스팅을 진행하고 있다. LGBT영화제(6월2일부터 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가 다가오니 매주는 아니지만 스탭들과 회의도 하고, 목요일마다 학교에 강의를 나간다. 그외에는 ‘친구사이’라는 단체에서 게이 인권운동을 하고, 한달에 한번 제작가협회 회의를 나간다.

-몸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
=몸보다는 머리가 멀티였으면 좋겠다. 이쪽 뇌에는 청년필름, 이쪽 뇌에는 친구사이. 이렇게 따로 저장해놨다가 필요할 때 꺼내썼으면 좋겠는데 그게 안되니까. (웃음) 그래도 아직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게 행복하다. 조금 더 지나면 불러주는 데가 없겠지.

-그럴 리가. LGBT(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의 준말)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어떻게 맡게 됐나. 이전까지 LGBT영화제엔 집행부가 없었는데.
=영화제가 2~3년 전에 영진위의 단체사업 지원에서 배제됐다. 그래서 지지난해와 지난해 운영이 굉장히 힘들었고, 올해는 아예 열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사무국에서 영화제가 아주 좋게 변하는 것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유지만 해도 좋다, 그러니 집행위원장을 맡아서 힘을 실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5월 9일 열린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공개된 프로그램을 보니 신작은 부족하지만 구성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집행위원장 맡아서 첫 번째로 한 일이 집행위원회를 꾸린 것이고, 두 번째가 프로그램 개편이다. 영화제의 기본은 영화다. 좋은 영화를 틀어야 관객이 온다. 올해 초부터 프로그래머들과 각종 영화제를 돌아다니며 영화, 정말 많이 봤다. 그런데 좋은 영화일수록 상영료가 비싸다. 올해는 다른 데 돈을 줄이더라도 상영료에 들어갈 돈은 줄이지 말자고 했다. 집행위원회를 만든 까닭은 집행위원도 없는 집행위원장이 말이 되느냐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김태용 감독, 박진형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씨네21> 문석 편집장 등 일곱분을 집행위원으로 모셨다.

-장기적으로는 어떻게 운영할 생각인가.
=우선 향후 2~3년은 영화제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 집중할 생각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순회상영회를 열거나 다른 도시에서도 LGBT영화제를 열 수 있도록 노력할 거다. 내가 <소년, 소년을 만나다> 등을 연출하며 해외 LGBT영화제에 출품해보니 환경, 가족, SF 이런 테마를 통틀어 단일영화제로는 LGBT영화제가 가장 많더라. 세계적으로 200개의 LGBT영화제가 있다. 일본만 해도 도쿄에 두개, 오사카 하나, 나고야 하나, 이렇게 영화제가 열릴 정도다. 대한민국만 LGBT영화제가 한 군데에서 열린다. 이것마저 없어질 위기에 처했다는 건 정말 대한민국에 사는 LGBT로서 수치가 아닐까. 이 하나의 영화제라도 잘 살려보려고 한다.

-연출을 준비하는 신작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도 퀴어영화다.
=그렇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위장결혼을 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다룬 영화다. 레즈비언은 위장결혼해서 아이를 입양하는 게 목적이고, 게이는 부모님이 결혼을 하면 아파트를 사준다니 한몫 챙겼다가 연인과 외국으로 떠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게이가 결혼식날 자신이 꿈꿨던 이상형을 만나게 되며 계획이 어그러진다. 밝고 명랑한 해피엔딩으로 만들고 싶은데, 퀴어영화이다보니 캐스팅이 좀 어렵다. 퀴어영화는 섹시해야 한다는 생각이라 섹시한 장면들을 몇몇 넣었는데 배우 입장에서는 그 장면에 대한 부담감이 좀 있는 것 같다. 정말 많은 배우들에게 제안했고 정말 많이 거절당하고 있는 중이다.

-신인배우 캐스팅도 그렇게 어렵나.
=거절당하면서도 인지도있는 배우들을 중심으로 캐스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더 힘든 것 같다. 영화를 준비하며 주변 LGBT들에게 캐스팅에 대한 생각을 물어봤는데, 가능하면 인지도있는 배우들을 출연시켜 관객의 폭을 넓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해서 이른바 스타급 배우들과 접촉 중인데 쉽지가 않다. 내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유하 감독님처럼 감독이 스타면 스타배우들이 동성애 연기(<쌍화점>)도 하지 않나. 내가 영화를 잘 만들어 내 영화를 보는 관객이 늘어나면 캐스팅 과정도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다.

-캐스팅 과정이 그렇게 힘들다면 여성영화제의 피칭 프로그램인 ‘피치 앤드 캐치’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지원금을 받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어떻게 심사위원들을 설득했나.
=내 매력과 영화의 매력을 같은 선상에 놓고 심사위원들을 설득했다.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굉장히 발랄하고 명랑한 톤의 영화다. 평소 불만이었던 것이 퀴어영화라면 뭔가 음울하고 어둡고,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LGBT들이 이성애자에 비해 현실에서 조금 더 어려움을 겪는 건 사실이지만 극장에서까지 힘든 현실을 목도하게 해야 하나. 매력적인 상대를 만나 행복하게 사랑의 결실을 맺고 싶어 하는 건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마찬가지다. 그런 환상을 보여주는 퀴어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영화의 밝고 명랑함이 내가 사는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래서 감히 ‘김조광수표 영화’라고 피칭할 때 얘기해봤다. 이 영화가 여성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아트레온상)뿐만 아니라 관객인기상도 받았는데, 내가 추구하는 긍정적인 ‘가치’에 좋은 점수를 주신 것 같다.

-제작자로서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지만 이제까지 연출한 <소년, 소년을 만나다> <친구사이?>는 모두 퀴어영화였다. ‘퀴어영화만 만드는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두렵지 않나.
=아니. 퀴어영화라도 잘 만들고 싶다. 연출력이 궤도에 오른다면 이성애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스스로 연출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연출해보고 싶다. 우선 퀴어영화는 김조광수만큼 잘 만드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집중적으로 만들어볼 생각이다.

-아까 스스로를 스타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스타다. 올해 초 발표한 동성결혼 소식이 큰 화제가 됐는데.
=의도한 건 아니었다. 나도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1위에 오를 만큼 결혼 소식이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이번 일로 많이 배웠다. 내 결혼이 굉장한 이슈가 될 수 있구나. 그렇다면 내년 여름에 크게 터뜨려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이슈를 만드는 역할을 해보려 한다.

-어떤 결혼식을 상상하나.
=윌리엄 왕자 같은 세기의 결혼식은 아니더라도 넓은 광장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큰 공연을 해보고 싶다. 아주 유명한 배우가 사회를 보고, 아주 유명한 가수(이를테면 샤이니)가 노래를 하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 축사를 해주는 결혼식. 동성 결혼에 편견이 있는 사람들이 내 결혼식을 보면 대한민국에서도 벌건 대낮에 이런 결혼이 가능하구나, 대한민국이 이 정도까지 가능하구나 생각하도록 만들고 싶은 거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은 있다. 우리 집에서는 결혼을 받아주셨지만 파트너가 커밍아웃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의 걱정을 어느 정도 덜어드리고 결혼 허락을 받아야 한다.

-평소에 연애에서 많은 에너지를 받는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나는 잘 의식하지 못했는데 주변에서 종종 그런 얘기를 하더라. 특히 지금의 연인을 만나면서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는 것 같다. 나이 차이(19살 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 친구가 나와 성격이 비슷하다. 밝고 긍정적이다. 지금의 애인을 만난 이후로 일도 잘 풀리고 새로운 도전도 많이 한 것 같다. 상업영화를 기획해본다거나. 애인이 격려를 많이 해준다. ‘이거 한번 해볼까’ 생각하면 ‘그래, 한번 해봐, 잘할 것 같아’ 이렇게 말해주거든.

-<조선명탐정> <의뢰인> 등 올해 청년필름이 제작하는 상업영화가 두편인데, 상업영화를 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은 열망은 처음부터 있었는데, 투자가 잘 안됐다. <해피엔드> 이후 흥행된 영화가 없어서 투자자들이 우리를 좀 안 믿었다고 할까. 또 2006년 <후회하지 않아>부터 <은하해방전선>을 연달아 만들었더니 아예 ‘마이너 잘하는 회사’로 투자사들이 규정해버리더라. 한쪽으로 이미지가 치우치는 건 다양한 영화를 제작하는 데 방해가 되겠다 싶어 상업영화 관객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기획해보자는 목적의식으로 <올드미스 다이어리_극장판>을 제작했다. 그 작품이 생각보다 잘 안돼서 멈칫했는데, 영화를 연출한 김석윤 감독님과 다시 의기투합해 <조선명탐정>을 만든 게 성공적이었지. 올해 9월 말쯤 <의뢰인>을 개봉할 건데, 이 영화마저 성공하면 사람들이 상업영화·독립영화 가리지 않고 다 잘하는 영화사로 청년필름을 기억할 것 같아 행복하다.

-지난해 가을이 정말 힘들었다고 들었다.
=지지난해부터 지난해 가을까지, 2년 동안 정말 힘들었다. 빚이 점점 쌓이고 갚으라는 독촉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다. 청년필름 사무실도 없애고, 직원들도 다른 회사에 소개시켜서 다 내보냈다. 그래도 <조선명탐정>과 <의뢰인>을 준비하며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직원들은 “형은 10년 동안 그 말 했다”며 믿지 않았지만. (웃음) 만약 <조선명탐정>이 잘되지 않았다면 회사를 아예 정리하고 각자의 길을 걸었겠지. <조선명탐정>이 잘돼 20억 빚을 탕감하고 우리를 믿고 투자해준 사람들과 직원들에게 받은 만큼 돌려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조선명탐정>의 수익으로 빚만 갚았나. 주변에선 결혼도 할 건데 집 사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집을 살 정도의 돈은 안되는 것 같다. 요즘 회계 정리를 하며 갚아야 할 돈을 살펴보고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빚이 끊임없이 나오더라. (웃음) 지금은 집 걱정보다 결혼식을 성대하게 해서 축의금을 많이 모아 ‘무지개 빌딩’을 세우고 싶다. (무지개 색 팔찌를 보여주며) 이런 색깔의 빌딩을 만들 거다. 성소수자, 인권 관련 단체들이 사무실 임대 기간이 끝날 때마다 돈이 없어 많이 괴로워하는데, 그런 단체들을 한데 모은 작은 빌딩을 세우는 게 꿈이다. 십만명에 만원씩 받아서 10억원 모으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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