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 다가왔다. 31번째 5·18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부르지 못했던, 30주년 행사의 참담한 풍경이 맨 먼저 떠오른다. 폭도가 투사가 되면서 도청을 뺏겼고, 투사가 국가유공자가 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도 뺏겼다. 5월12일 개봉한 김태일 감독의 <오월愛>는 껍데기만 남은 5·18이 또 다른 고통을 야기하고 방치했음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31번째 5·18을 앞두고 김태일 감독, 그리고 주로미 조감독과 함께 광주를 찾았다. 그들은 다시 찾은 광주에서 오월애(愛)를 느꼈을까, 오월애(哀)를 느꼈을까.
“어디부터 갈까요?” “그러게요. 어디부터 갈까요?” 서로 물었다. 조금 이상한 취재였다. 조금 특별한 여행이기도 했다. 행선지가 광주라는 것 말고 아무것도 몰랐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 어림잡았지만, 누구부터 만나게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애당초 김태일 감독과 주로미 조감독 뒤를 졸졸 따라다닐 참이었다. 부부이자 동료인 두 사람 뒤에 숨어 <오월愛>에 관한 광주 사람들의 반응을 훔쳐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가면서 중간에 전화해봐야죠.” 몇 시간 뒤의 동선을 모르는 건 김태일 감독과 주로미 조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찾아뵐 이들에게 두 사람은 사전 연락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더 귀찮게 하면 민폐인데….”(주로미) 카메라 없이 광주에 내려가는 두 사람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나, 일정이 어긋나 번번이 허탕을 치면 어떻게 하나 싶기도 했다. 1박2일이라는 짧은 일정도 슬슬 부담이 됐다. 말을 돌려가며 두 사람을 채근했다. 주 조감독은 고속도로를 타자마자 양동남씨에게 전화를 건다. “선생님 보고 싶어 광주가는 길이에요.” 주로미 조감독의 뻔한 애교에, 양씨는 “뻥치지 말라”고 응수한다. <오월愛>의 첫머리. 5·18 당시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싸운 기동타격대 1조 대원이었던 양씨의 나직한 고백이 떠오른다. “5월이 오면 몸이 먼저 긴장하고 떨린다”고 했던가. “예? 완도에 가셨다고요?” 주로미 조감독은 저녁이 돼야 광주에 없는 양 선생님을 뵐 수 있을지 알 수 있다면서 덧붙인다. “선생님들이 오월이 되면 다들 좀 ‘부웅’ 뜨세요.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거죠.” 봄날, 그날이 오면, 기꺼이 고통스런 ‘기억의 수인’이 되는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야기한 척함서 꼭 (카메라를) 돌려부러”
“평화반점이라고 하면 벌떡 일어나요.” <오월愛> 촬영을 돕기도 했던 김태일 감독의 아들 상구, 김태일 감독은 광주 가자고 하면 미적거렸던 아들을 꼬드길 때마다 평화반점 짬뽕 카드를 꺼내들었다. 짬뽕은 그저 짬뽕 아닌가. 도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양인화, 박복자씨가 운영하는 평화반점은 광주역 인근 신안동에 있었다. 뜨거운 국물을 기대하며 식당 문을 열었지만 허기를 달래준 건 박복자씨의 입담이 먼저였다. 시사회 때마다 ‘뻥뻥’ 터진다는 <오월愛>의 한 대목, 지금 떠올려보시라. “짱깨라고 전화하는 사람 있어∼잉. 내가 대번에 그래. 아저씨. 세종대왕이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눈물을 흘리겄소.” 싸가지 없는 주문은 “바로 썰어버린다”는 평화반점 안주인 박복자씨의 ‘천금 재담’은 곁에서 들어야 제맛이다. “어딜 가도 내가 업을 시켜부러. 내가 유머 해불믄 다른 사람들이 다 박수치는 돌부처가 돼분다니까.” 분위기 다운되면 다시 돌아온다는 개그맨은 저리 가라다. “내가 활력소지라. 계속 그런 스토리만 나오면 (다큐가) 재미가 없어. 인생사 뻔한 거이거든. 사람들 배꼽을 한번씩 잡아줘야제. 그래야 진지하게 들어. ‘아, 담엔 진짜 또 뭐가 나올까’ 하고. 안 글믄 엉덩이 들썩들썩해불제.” 박씨의 재담은 단순한 말장난은 아니다. 김태일 감독이 “썰어버린다”는 표현을 영문 번역할 때 애먹었다고 하자 명쾌한 답이 돌아온다. “그것이 뭐냐믄 두번 다시 안 본다, 뭐 그런 뜻이여. 인간적으로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니까 한마디로 아웃(Out)이제, 아웃! 근디 썰어분다는 것이 어딜 썰어분다는 것일까. (웃음)”
밀려드는 배달 주문에 쉴새없이 오토바이 시동을 걸던 양씨가 잠시 한숨 돌리고 앉았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날은 양씨의 생일이었다. 짬뽕과 함께 식탁에 오른 나주 노안 막걸리와 홍어 안주는 실은 양씨를 위한 잔치 음식이었다. 고문후유증으로 인한 심근경색으로 새벽에 응급실에 실려가도 그날 아침 양씨는 쉬지 않고 식당 문을 연다. “우리 아들이 한번은 그러더라고. 우리 아부지는 관 뚜껑 닫을라고 하면 장 보러간다고 일어날 사람이라고.” 그래도 <오월愛> 상영 때는 만사 제쳤다. 부산국제영화제, 광주인권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벌써 3번이나 봤다. “옛날에 <화려한 휴가>도 별로 실감이 안 나더라고. 잠만 와불고. 마지막 현장에 있었던 사람한테는 싱겁제. 실은 <오월愛>도 싱거워. 하하. 내 부산 친구들은 <오월愛> 보고 다 울었다고 하더만은. 그래도 다큐가 더 낫제. 당시 동지들도 보고, 그때 기억들도 새록새록 나니까.” ‘자식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다’는 인터뷰 내용이 빠진 것이 아쉬웠다는 양씨의 말에 주방에서 짬뽕을 만들던 박씨가 이런다. “그것도 몰라? 배우가 맘에 안 들믄 감독이 다 잘라버리는 거야!” 지난해 5·18 30주년 행사장에서 홀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젖히다 제지당했던 양씨는 얼마 전부터 5·18 민중항쟁 동지회 상조회를 이끌고 있다. 김태일 감독이 영화 개봉하면 다시 내려와 꼭 대접하고 싶다고 하자 양씨 대신 박씨가 받는다. “대접은 쬐깐한디 이왕 할꺼면 대접이 아니라 다라이를 해야제!”
“아마도 어머님이 보시면 그럴 거예요. 5월이 되니 파리떼처럼 달라드는구나. (웃음)” 아니나 다를까 정말 그랬다. 양동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김태일 감독 부부를 알아본 상인들이 다들 한마디씩 한다. “벌써 오월이 왔소?” 가장 크게 반기는 이는 튀김집 오옥순씨다. 김 감독이 <오월愛>에 잠깐 등장한다고 전해주자 오씨는 “차말로(참말로) 환장하겄네. 차말로 황홀하네” 하면서 공짜 튀김을 손에 쥐어준다. 뭘 믿고 촬영 허락을 해줬냐고 묻자 “이야기한 척함서 꼭 (카메라를) 돌려부러. 만날 내가 속았다니까. (사진기자를 가리키며) 여그 상습범이 또 있구만. 미워도 튀김은 줘야제”라고 웃는다. 김태일 감독 부부가 오씨와 친해진 건 “전혀 친절하지 않은” 이영애씨 때문이다. 주로미 조감독은 이씨를 처음 만났을 때 “집에서 살림이나 하지 뭐하러 나왔냐”는 핀잔을 시작으로 “30분 동안” 욕을 먹었다. “찬밥 신세였다. 우리가 좀 시답잖아 보이잖나. 카메라도 조그만 것 들고 갔으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김태일 감독은 밀어붙이면 성사되겠구나, 서울에 있던 태준식 감독에게 촬영까지 부탁했지만 후배 앞에서 체면만 구겼다. “이영애 어머님 뵙고 나서 준식이가 그때 그랬죠. ‘형, 쉽지 않겠는데.’ (웃음)” 음료수 사들고 이영애씨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주변 상인들 포섭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정황이다.
“쓰잘데기없는 짓 하지 말라”며 <오월愛> 제작진에 갖은 수모(?)를 안겼던 이영애씨가 멀리 보인다. “오메. 뭔 일이란가. 얼굴 잊어불겄어야. 온단 말도 없이 왔네. 5·18 왔다고 이렇게 댕긴가?” ‘오지게’ 냉대해서 빈정상해 갈 줄 알았는데, 거머리처럼 끈덕지게 달라붙어 결국 인터뷰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씨. “공판장에 가믄 사람들이 그래. 출연료를 얼마 받았냐고. 그래서 그랬제. 박카스 달랑 한병 사갖고 왔더만. (웃음)” “도청에 좀 가보쇼.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아요? 나도 지금 송장 옮기고 오는 중이요.” 광주에서 유학하던 조카의 말에 깜짝 놀라 이씨는 그날로 시장 상인들과 함께 밥솥단지 리어카에 걸고 금남로로 향했다. “나도 몰라라. <오월愛>는 부산에서 봤는디 참말로 어색하더만. 내가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는 것도 어색하고. 앞치마 차고 참외 파는 것도 어색하고.” 오월보다 먹고사는 게 중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이씨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 사우(사위)가 경상도 사람인디. 초하룻날 내가 사우랑 손지(손주) 데리고 어디 갔는지 아요? 망월동 갔소. 5·18 사진 보고, 5·18 영화 보고 손주가 그럽디다. 이게 다 진실이다요, 어째 사람들을 뚜든다요(때리나요). ‘와, 너무했다. 너무했다’ 그러드랑께.”
현재진행형 갈등의 진원지, 옛 전남도청
멀리서 바라본 오월은 힘이었다. 하지만 직접 겪은 오월은 고통이었다. 김태일 감독이 1년 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애를 먹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민중의 세계사’ 첫 번째 작업으로 광주항쟁을 택한 그는 처음부터 관련 단체들의 도움을 거부했다. 보상, 도청철거 등의 문제에 있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해관계 안에서 도저히 작업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5·18 민중항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밑바닥 사람들을 직접 수소문해서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손 짚고 헤엄치기는 아니었다. 항쟁 기간 동안 가장 앞장서 싸웠다는 부랑아, 넝마주이는 만나지도 못했다. 게다가 이영애씨를 비롯한 이들과의 인터뷰도 번번이 물거품이 됐다. 대인시장 가운데 빈집 하나를 개조해 머물던 김태일 감독은 작업이 진척되지 않아 “몇번이고 그만두고 싶었다”고 말한다. 동력 잃고 표류하던 <오월愛>를 깨운 건, 대인시장에서 행상 일 하는 하문순씨의 씩씩하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삶의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예요. 처음엔 과일만 샀는데 두 번째 여쭤보니 5·18 때 주먹밥을 만드셨다고 하기에 그 다음부터 다른 분들 소개받고 그랬죠.”
하문순씨의 칼칼한 목소리보다 더 매력적인 건 막무가내 인심이었다. 대인시장 내 주차장 앞에서 마주친 하씨는 리어카에 실려 있던, 아직 반도 채 팔지 못한 과일꾸러미들을 마구 뜯어내더니 평상 위에 잔치상 차리듯 전시한다. “이리 앉어, 이리 앉어. 요거 하나 까잡사.” 감기 걸려 목소리가 쉬었다는 하씨 앞에서 배부르다는 말은 하나마나다. 바나나를 물리치면 딸기를 내놓고, 딸기를 밀어두면 포도를 내민다. 며칠 전엔 지역 방송 프로그램인 <얼씨구 악당>에 출연했는데 사투리 가장 잘하는 지역민으로 뽑혀 25만원을 챙겼다고. 그 돈으로 손녀 다솜이의 교복을 사줬다는 말에 옆에 앉아 있던 할매가 끼어든다. “넌 장사 그만하고. 이빨이나 좀 해라.” 하씨에게 만날 하는 지청구인가 보다. 하씨가 곧바로 “우리 손주 대학 보내야 한디”고 응수하는 것을 보면. 하씨와 헤어진 뒤 들른 곳은 대인시장 길다방. 김태일 감독 부부가 아침에 모여 회의하고, 저녁에 모여 다음날을 계획했던 말 그대로 길거리 다방이다. 김태일 감독의 주요 정보원이었다는 길거리 다방 주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배선 공사를 하던 한 아저씨가 이렇게 말한다. “그런 거 취재 말고 나중에 (시장 상인들) 쌈할 때 취재하란께. 여기서 쌈나면 경찰도, 판사도 암씨롱도 못해. (웃음)”
김결씨의 전파사에 들르기로 했을 때 김태일 감독보다 주로미 조감독이 더 기뻐했다. “저를 항상 주 여사라고 부르세요. 선생님 집에 가면 손 하나 까딱 못하게 하시고, 혼자 상 차리셔서 내오세요. 남자한테 그런 대접받는 적이 얼마나 있나요.” 김태일 감독에게도 김결씨는 오랜 인연이다. 전남도당 부위원장 겸 인민유격대 사령관이었던 김선우씨가 김씨의 큰형이다. 김 감독은 <분단을 넘어선 사람들>(1995) 촬영 때 김선우 사령관의 아들을 만나러 가면서, 또 김선우 사령관의 유골을 찾으러 백운산에 가면서 김씨의 도움을 받았다. 평화반점에서 마신 막걸리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데 김씨는 셔터 문 내리기 전에 찾아든 서울 손님들에게 막걸리를 권한다. “김 감독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이라는 덕담을 안주로 내놓은 뒤 한국 진보운동의 미래에 대한 강의를 펼치기 직전 김 감독이 막아선다. “선생님, 먼저 영화평 좀 해주세요. 부산에서 뵀을 때 제대로 여쭤보지도 못했는데.” 김씨의 말은 간단 명료하다. “여태까지 김성용 신부가 인터뷰를 한 적이 없어. 근데 <오월愛>에는 그분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잖아. 광주를, 오월을 제대로 담았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
비판하기 전에 앞서나가라, 비판은 하되 매도하지 말라, 변화와 변절을 혼동하지 말라, 진보를 위한 김씨의 십계명보다 실은 그의 짧은 토로가 더 인상적이었다. “각시를 내가 둘이나 잃었잖어. 서른일곱에 본 각시 잃고, 예순여섯에 후처를 잃고. 각시를 잃어분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믄 다 나 때문이여.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고. 각시가 뭐라 하면 남편이 민주화운동하는데 여편네가 참아야지 그랬을 거 아니냐고. 풀 것 못 푸니까 암이 생기는 거야. 지금 같으면 니까짓 것하고 못살겄다고 도망갔을 텐디. 그러니까 김 감독도 마누라한테 잘해. 대화해서 풀면 병이 안 생겨. 지 각시하고 싸우고 잠자리 따로 하고 그런 놈들은 진보운동할 자격이 없어.” 김씨가 자신의 막내딸 나이인 주로미 조감독에게 꼬박꼬박 ‘주 여사’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저 사람은 잠은 꼭 같이 자요”라는 주로미 조감독의 말에 김태일 감독은 “그게 제 삶의 원칙 중 하나입니다”라고 한다.
언변 좋고, 강단 있는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많지 않을까. 혹시 여기저기 특강을 다니면서 말솜씨가 더 좋아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라고. 운동권들이 다 대학 나온 사람들이잖아. 그 친구들이 나를 부르겠어. 전파상 김결이 왔다고 하는데 청중들이 모이겠냐고.(웃음)”
이튿날 옛 전남도청에 들렀다. 안쪽으로 들어갈 순 없어 대신 근처 전일빌딩 옥상에 올랐다. 1980년 5월 해방 광주의 심장이었던 도청이 한눈에 들어왔다. 30년 전의 도청이 시민들의 구심점이었다면, 현재 이곳은 대립과 갈등의 진원지다. 도청이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탈바꿈하면서 역사적 공간을 훼손해선 안된다는 주장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과거에 집착해선 안된다는 논리가 몇년째 정면 충돌한 상황에서 뾰족한 해법은 도출되지 않았다. <오월愛>가 일러주듯, 이 때문에 5·18 관련 단체 또한 서로 반목하고 있는 현실이다. 김태일 감독은 “다른 건 둘째치고 저 컨테이너 박스 하나에 40억원”이라며 “쿤스트할레를 왜 하필 도청 앞에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찬다. “다국적 문화교류를 위한 자유 공간” 쿤스트할레가 김태일 감독 생각엔 “역사 의식을 결여한 무국적 파티 공간”에 불과하다.
도청 별관 철거 논의가 얼마나 진행됐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김태일 감독이 어딘가로 연락하자 얼마 뒤 이종섭(가명) 씨가 나타났다. 1980년 5월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투옥됐던 이씨는 지난해에는 도청 철거 반대 농성에 참여했다. 이씨는“얼마나 허물지는 지금 설계 중이라 잘 모르겠구만. 올해 같은 경우 1천억원 신청 예산 중에 700억원밖에 나오지 않아서 기본 공사 자체가 지체되고 있는데 현 정부로서는 4대강에 정신이 팔려 있다 보니. 이러다가 흐지부지 사업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고문을 당했음에도 다른 이들보다 건강해 뵈는 이씨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콩을 많이 먹어서란다”. “교도소에 있는 동안 사람들이 콩밥이 나오면 콩을 다 안 먹더라고. 콩 먹으면 설사한다면서. 그래서 밥풀 붙은 콩을 내가 다 묵었제. 아침, 점심, 저녁으로다가. 그 기간 동안 내가 먹은 콩이 한 가마니는 될 거야. 김일성한테 무슨 지령 받았냐, 김대중한테 얼마 받고 폭동 일으켰냐, 그렇게 고문받고 나와서 보약 한재 못 먹었는디도 이 정도 버티는 것 보면 그때 먹은 콩 때문이 아닌가 싶어.”
비가 오던 망월동 묘역에서의 마지막 인사
짧은 오월 여행의 마지막은 망월동이다. 망월동 3묘역 앞에서 오월화원을 운영하는 이세영씨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답이 없다. 역시 도착해서 보니 문이 아직 닫혀 있다. 주로미 조감독이 “비가 와서 이 선생님이 쉬시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안개 자욱한 3묘역을 둘러보던 김태일 감독 부부가 머리 숙인 곳은 고 김현채씨의 묘 앞이었다. “마지막까지 싸웠던 기동타격대 분이셨어요. 고문 후유증으로 곡절 많은 삶을 버티셨는데 결국 목숨을 스스로 끊으셨어요. 제가 광주에 처음 내려온 지 이틀 뒤에.” 고 김현채씨는 “5·18 이후 공짜 인생을 29년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한다. 김태일 감독에 따르면, 가까스로 버텨낸 삶의 끈을 결국 스스로 놓아버린 이들이 50명이 넘는다. 어느 날부터인가 폭도는 오월의 투사라 불렸지만, 더이상 오월의 투사를 기억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의 삶은 죽음보다 끔찍한 비천이었다. 주로미 조감독은 “5월의 끔찍한 기억들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앞의 현실 그 자체로 재연된다고 해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트라우마가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관계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도 들여다보고 싶었으나 거기까지 허락해주신 선생님들은 없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아쉬움은 하지만 민중의 세계사 두 번째 프로젝트의 분명한 목표다. “1980년 5월 광주는 민중의 가장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 표출된 경우예요. 반면 인도차이나반도의 소수민족, 민중은 수동적이고 잘 표현하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더 친밀한 관계가 필요하고, 일상으로 더 깊게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평생 동반자이자 이제는 동료이기도 한 김태일, 주로미 두 사람은 조만간 캄보디아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일단 상구 저금통 깨서 캄보디아 사전답사를 다녀왔으니까 세계여행이 시작된 셈이네요.” 인도차이나 작업이 끝나면 상구네는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남태평양,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의 수순으로 민중의 세계사 시리즈를 완성할 예정이다. 크루즈 타는 대신 카메라 메고 세계 민중 탐사에 나선 상구네 가족의 여행은 계속될 수 있을까. 아직 이르지만, 기회가 된다면 세계 각지를 돌며 민중의 숨결을 샅샅이 느낄 상구네 가족의 끈끈한 일기를 받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