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는 나로서 자유롭다
2011-06-07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백종헌
<종로의 기적> 주인공들의 유쾌 발랄 수다 한판

왼쪽부터 정욜, 이혁상, 소문준, 장병권


<종로의 기적>은 종로 낙원동의 숨겨진 얼굴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누군가는 낡고 황량한 장소로 기억할 이곳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퀴어영화 감독으로서 이성애자 스탭들과의 소통을 고민하고(소준문), 동성애자의 인권을 외치며(장병권), 발랄한 게이 라이프를 즐기고(최영수), 에이즈에 감염된 동성애자들의 미래를 고민한다(정욜). 어느 일요일 오후 7시, 낙원동에 저녁 노을이 내려앉을 무렵, 이혁상 감독과 세명의 주연배우가 한 게이바에 모였다. 이들은 다큐 <종로의 기적>과 커밍아웃,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최영수의 죽음과 종로의 의미에 대해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극장 개봉을 앞두고 어떤 생각이 드나.

이혁상_(좌중 침묵하자) 순서대로 해, 1번부터. (웃음) 우리는 보통 영화에 출연한 순서대로 대답해요.
소준문_처음엔 개봉까지 생각지도 못했는데 극장에서 상영된다니 굉장히 떨려요. 감독으로서 영화를 연출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에요.
장병권_<종로의 기적> 예고편 심의 반려 기사 때문인지 영화 검색 순위가 장난 아니게 높더라고. 난 좀 겁이 나요. 보통 사람이라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게 영광이고 여기저기 자랑할 상황이겠지만, 나는 아직 집에서 (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황이거든. 그러다보니 부모님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라는 걸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그런 고민이 숙제로 다가오네요.
정욜_나도 가족들이 절대 인터넷 검색을 안 했으면 좋겠어요. (웃음) 그래도 관객과 소통하는 건 흥미롭더라고요.


-개봉을 앞두고 커밍아웃이 큰 고민거리로 다가오는 것 같다. <종로의 기적>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올해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됐는데 그때 혹시 지인들에게 커밍아웃한 분은 없나.

정욜_난 회사를 올해 2월에 그만두며 친한 회사 동료 몇몇에게 커밍아웃을 했어요. 그중 두명이 올해 인권영화제에서 <종로의 기적>을 보고 이런 말을 하더군요. 게이라서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회사 다닐 때와 너무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고, 감추는 거 정말 힘들었겠다고 했죠. 그렇게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분들이 있어서 ‘6년간 회사 생활 잘했구나’ 하고 뿌듯했어요.
이혁상_난 이른바 ‘불알친구’ 중 고등학교 친구들에게는 얘기를 안 했거든요. <종로의 기적>이 개봉하면 친구들에게 영화 보여주며 커밍아웃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서울독립영화제에 한 친구가 미리 와버린 거예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친구에게 “예상치 못한 장면이 나올 수도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가라”고 말했죠. 상영이 끝나고 친구 얼굴을 보니 어둡더라고요. 안절부절못하며 질의, 응답을 하다가 사회자에게 이 자리에 친구가 와 있다고 말하는데 눈물이 났어요. 내가 우니까 친구가 “혁상아, 괜찮아!” 하고 박수 쳐주고. 예상외로 영화를 통해 몇몇 친구들에게 성공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것 같아요. 이게 영화의 힘인가 싶기도 해요.


-<종로의 기적>은 한국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가 2003년 시작한 커밍아웃 프로젝트로부터 출발했다.

이혁상_성적소수 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에서 <3×FTM> 등의 작업을 돕고 있었는데 ‘친구사이’에서 제안이 왔어요. ‘커밍아웃 프로젝트’라고 ‘친구사이’ 홈페이지에서 회원들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코너가 있는데 이걸 영상으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마침 나도 연분홍치마에서 성소수자 관련 영화 작업을 하며 게이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던 터라 흔쾌히 참여했어요. 캐스팅에서 가장 중요했던 점은 너무 당연하지만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느냐는 거였죠. 그리고 나와 동세대인 30대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어요. 이성애자들에겐 그때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가는 시점이고, 성소수자들도 좀더 먼 미래를 고민하는 시기잖아요. 고민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 그 두 조건을 염두에 뒀어요.



영화 출연이란 이름의 커밍아웃

-출연한 분들은 수월하게 섭외됐나.

이혁상_어우…. (웃음)
소준문_고민을 많이 했죠.
이혁상_사실 넌 다른 것 때문에 고민했잖아. 우리가 히스토리가 좀 있지. (웃음)
소준문_오래전에 우리가 사적인 관계로 엮였다가 안 좋게 끝난 사이라 5∼6년간 거의 원수지간이었거든. (웃음) 이 다큐를 통해 과연 그동안의 사적인 감정을 풀 수 있을까 망설였는데 우연히 어떤 술자리에서 이혁상 감독을 만났어요. 정중하게 다큐멘터리에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시간도 많이 흘렀고 악감정도 남아 있지 않아 오케이를 했어요. 안 그래도 내가 군대에서 커밍아웃으로 차별받은 경험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종로의 기적>을 통해 더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혁상_욜의 경우는 처음엔 애인인 석주가 출연하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잖아. 욜은 석주를 말리고. 왜 그랬던 거야?
정욜_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HIV/AIDS가 너무 무거운 주제인데다, 석주가 감염인으로서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나 외적으로 밝히고 싶지 않은 부분을 이 영화를 통해 주변인에게 알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거든. 게이 감염인들이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커뮤니티라고들 하거든. 종로에서조차 배척당한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고민하며 자신의 감염 사실을 숨긴단 말이에요. 애인도 종로에서 나를 보면 모른 척하고 지나갈 정도였어요.
이혁상_욜이 HIV 감염인을 위한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이다보니 욜과 친하게 지내면 혹시 감염인으로 생각할까봐 그런 거겠지. 우리도 다 비슷한 처지인 것 같은데, 내가 커밍아웃한 게이이다 보니 게이든 이성애자 남자든 나랑 친한 척을 하면 동성애자임이 드러나거나 오해할까봐 걱정하는 부분이 생기더라고. 그래서 내가 연애가 힘들어요. (웃음)
장병권_나는 ‘친구사이’ 커밍아웃 인터뷰에 참여하면서 혁상이 형과도 인터뷰를 했는데,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개인적인 생활보다는 내가 활동하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에서의 모습이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단체활동을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삶을 바꾸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또 한명의 주인공이었던 영수씨가 뇌수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기도 했지만 가족과 게이 친구들이 함께 애도하며, 울며 웃으며 영수씨를 보내는 장례식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정욜_나는 그 추모의 분위기가 너무 부러웠어요. 얼마 전 인권영화제에서 <모르몬 발의안 8>이라는 작품을 보는데 한 백발의 할머니가 울먹이며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자기는 참 많은 동성애자 친구들을 보냈는데, 그들의 죽음이 ‘그냥 잘 살았던’ 친구의 죽음으로 비쳐지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고. 솔직히 그냥 잘 산 게 아니잖아요. 평생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고 드러내지 못한 부분들이 있는데. 게다가 동료들은 장례식에서조차 침묵해야 하죠. 나도 장례식에 가면 가족들이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을 때 동아리, 교회 친구 등 다른 핑계를 대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친구의 죽음조차 함께 하지 못할까봐 거짓말을 하는 거죠.
장병권_나와 함께 일하는 활동가의 파트너가 뇌종양으로 죽었는데, 그 활동가는 파트너가 어디에 화장되었는지도 모른다더라고요. 몇년간의 투병생활 동안 가족보다 극진하게 애인을 보살피고 온갖 치료 방법을 다 알아봤던 사람인데도. 주변에서 많은 성소수자들의 죽음을 보지만,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 우리가 어떤 경험을 공유했고 어떤 감성을 고민했다는 걸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마음 아파요. 그런 의미에서 영수 형의 장례식을 보며 위로받은 부분이 있어요.
이혁상_난 동생에게 미리 얘기해놨어요. 내가 죽으면 장례식할 때 레인보우 깃발을 쫙 걸어놓고 ‘우리 형은 자랑스러운 게이였습니다!’이렇게 써놓으라고. (웃음)
정욜_여기 소주 한병 주세요! (좌중 웃음)



나를 알아가는 시간

-분위기를 좀 바꿔보자. 종로엔 언제 ‘데뷔’했나.

소준문_나는 열아홉살 때. 집이 시골이라 어떤 루트로도 동성애자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죠. 대학 입학해서 인터넷으로 수강신청을 하는데 우연히 검색어로 게이, 퀴어, 이렇게 쳤더니 동성애자 모임들이 쫙 나오더라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커뮤니티에 모여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어요. 당시 나우누리의 ‘레인보우’라는 모임에 가입해 종로 타워레코드 앞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파고다극장도 가보고 했어요.
정욜_나는 대학 2학년 때 데뷔했어요. 1학년 때 학교에 굉장히 좋아하는 과 선배가 있었는데 그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다가 학교에 붙은 동인련 대자보를 본 거죠. 그 단체를 찾게 되며 종로도 나오고, 이태원도 가게 됐습니다.
이혁상_나는 본격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남자들과 연애를 시작한 건 2003년이에요. 그전에는 내가 정말로 이쪽인지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97년에 ‘친구사이’에 세미나 자료 얻으러 왔다고 핑계대고 들렀는데, 그때 거기 있었던 분들은 다 알았겠지. 또 한년 왔구나 하고. (웃음) 괜히 겉멋이 들어서 난 자유로운 존재야, 여자도 만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며 방황의 시기가 꽤 길었던 것 같아요.
장병권_나도 대학 2학년 때 나우누리에 가입해서 열심히 채팅을 하다가 종로에 나왔어요.


-대부분 90년대 후반에 데뷔한 셈인데, 지금의 종로는 분위기가 어떻게 다른가.

정욜_과거보다 좀더 화려해진 것 같아요. 잘 놀기 좋은, 쉬기 좋은, 눈치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더 나아졌다고 해야 하나.
장병권_종로의 포장마차만 해도 꼭 동성애자들만 오는 건 아니잖아요. 이성애자들이나 관광객 등이 게이들과 자연스럽게 섞이는 모습이 눈에 띄는데, 그런 모습이 변화의 지점 아닌가 싶어요.
소준문_나는 3, 4년 동안 종로를 안 나왔다가 다시 와보니 새롭게 바뀐 모습이 좀 낯설었어요. 이곳이 30, 40대 분들이 많이 활동했던 공간인데 어느새 젊은 친구들이 들어와 있다는 점에 처음엔 배타적인 생각도 들었죠. 젊은 친구들은 이태원, 나이든 분은 종로, 이런 인식이 있었거든.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니 20대 초반 친구들이 종로가 상징하는 의미를 넓혀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지금의 20대는 자기 표현에 있어서 예전 세대보다 훨씬 적극적이라고 봐요. 그들이 종로의 게이 문화를 좀더 양지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혁상_다들 순진해가지고, 자기 홍보를 못해. (웃음) 우리가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얘기를 해야지!
소준문_그런 부분이 크지.
이혁상_사실 <종로의 기적>을 불편하게 보는 성소수자들도 존재해요. 우리끼리 조용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종로를 공개적으로 거들먹거리나, 이런 시선이죠.
소준문_이 영화 때문에 종로에 어떻게 나가냐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더라고. 나는 깜짝 놀랐어요.
이혁상_난 이런 생각을 해요. 만약 그들이 어떤 차별의 상황- 아우팅이나 성적 혐오 범죄 등- 에 놓였을 때 기댈 곳은 우리처럼 인권운동하거나 커밍아웃해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 그렇다면 <종로의 기적>을 만들고 인권운동하는 사람의 역할을 그렇게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쉽게 평가절하할 순 없다고 생각하거든.


종로의 축제를 함께 즐기자

소준문_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왜 커밍아웃을 하나? 가끔 ‘정체성을 숨기고도 잘 살 수 있는데 너는 왜 커밍아웃했냐’는 소리를 듣곤 해요.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하네.
정욜_6년간 회사를 다닐 때 병권이나 동인련 친구들에게 그랬어요. “내가 24시간 동안 게이로 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회사에 다니면 주말에 가끔 종로에 나오기도 벅찰 만큼 바쁘거든요. 그렇게 시간적으로 계산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한 거예요. <종로의 기적>이 그래서 나에게는 딜레마에요. 한편으론 정체성이 밝혀질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일상에서의 커밍아웃으로부터 오는 쾌감이 있거든요.
이혁상_나는 가장 근본적이고 큰 차별은 우리가 우리답지 못하게 사는 그 자체라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은 게이가 당하는 차별이 이성애자로부터의 일방적인 차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미 차별이 작용하는 지점은 ‘내가 남과 다른 것 같아, 조심해야지’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종로의 기적>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커밍아웃이 필요한 거죠. 커밍아웃은 스스로가 가슴속에서 느끼는 차별을 벗어던지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이 <종로의 기적>을 봐줬으면 하나.

정욜_솔직히 말하면 가족이 봐줬으면 좋겠어요. 영화 속 내 모습을 그대로 알고 있는 가족이 아무도 없거든. 애인이 있는 줄도 모르고 심지어 회사를 그만둔 줄도 몰라요. 이혁상_진짜? 이놈의 자식! (웃음)
정욜_어머니, 아버지를 너무 좋아하는데, 친구처럼 평생 잘 지내고 싶은 사람들인데, 그들이 힘들까봐 무서운 마음과 내 솔직한 모습을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늘 충돌해요. 갑자기 슬프네….
장병권_욜 얘기 들으니까 갑자기 격앙되네. 나는 성소수자, 이성애자 할 것 없이, 성별이나 성적 지향 관계없이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생각이 복잡해졌으면 좋겠어요. 이 다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그 힘으로 앞으로 어떤 삶을 만들지 다양한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혁상_운동권들이라 말을 잘해. (웃음) 나는 늘 얘기하는 타깃 관객이 있어요. 종로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 많은 게이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결혼해서, 두려워서, 이성애자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 <종로의 기적>은 우리 여기 있어요, 고민하는 사람들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외치는 다큐잖아요. 이 영화든, 동인련이든, 친구사이든, 연분홍치마든, 내 개인 트위터(@leedenis)든, 와서 게이로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당신과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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