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년간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눈에 띄게 부상하고 있는 기류 중 하나는 스타일의 획일화를 거부하고 영화적 양식의 스펙트럼이 다변화하고 있는 현상이다. 흡사 이러한 방사형으로 확장되는 양식의 진화는 최근 몇해에 걸쳐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다큐멘터리들이 선을 보이게 된 변화의 방증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다큐멘터리 미학의 암중모색이 지역과 경계를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5·18 광주항쟁을 다룬 <오월愛>는 이런 기류와 관련하여 몇 가지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가 제기하는 질문의 미묘함은 다큐멘터리의 전통적 기능 중 하나로 간주되어온 ‘기록’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기록의 메커니즘이란 무엇인가? 무릇 기록의 내용과 가치는 무엇을 기록하는가라는 문제, 환언하면 기록의 대상(역사적 사건이나 사람)에 있지 않다. 그것은 누가 기록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며,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대상과 그에 대한 태도가 결정되므로 언제나 선택과 배제의 논리를 따른다. 이와 같은 이유로 어떠한 ‘사실의 채록’이라 할지라도 중립적이지 않으며, 완강하게 특정한 시각을 내면화하는 법이다. 아주 오랫동안 무엄한 폭도였다가 민주화 투사나 열사로 격상된 뒤,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가는 역사의 희생자쯤으로 위치를 바꾸는 5·18 광주항쟁 참여자들의 위상은 모두 누가 그것을 기록하는가라는 ‘기록의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다.
기록에서 배제된 이들의 소환
<오월愛>는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에 몸을 담갔던 이들을 통해 공공의 기억을 살려내면서 항쟁의 현재적 의의에 대해 문답하는 영화이다. 김동원 감독과 함께 한국 다큐멘터리 감독들의 산파 구실을 해온 ‘푸른영상’에서 잔뼈가 굵은 김태일 감독의 작품이며, 특유의 정직하고 육중한 시대인식과 대상에 대한 신실함의 태도, 전통 다큐멘터리의 정공법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이 영화의 좀더 풍부한 의미와 결을 모두 드러내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통의 다큐멘터리 화법을 견지하되, ‘기록의 미학’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오월愛>의 가치를 말하고 싶다. <오월愛>는 한국사의 가장 처참했던 비극적 사건인 광주항쟁에 대한 증언의 기획이 아니다. 이를테면 광주항쟁을 담아내려 했던 기존의 영상물들이 취한 총체적인 사태의 재구성,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가려진 진실에 대한 현장 르포의 성격을 가지지 않으며 명시적으로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입장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광주항쟁을 작품의 제재로 끌어들이고 있지만 이 영화가 접근하고 있는 것은 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사건을 유발한 정황이나 맥락,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의미이기보다 그것을 통해 훼손된 이들의 내면의 정경이기 때문이다.
감독 김태일의 문제의식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5·18이 우리 안의 타자로 배제되었거나 항쟁의 진원지인 광주에서조차 기억하지 않는 역사로 물러나기 시작했다는 통절한 깨달음에 있다. 이 깨달음은 <오월愛>에서 작가의 시대 인식의 기반 또는 영화 창작 원리의 근간이 되고 있다. 한 시대의 가치체계를 총체적으로 까발려 보여주었던 불행한 시대의 아픔에 대한 아둔한 망각, 그 사이에서 또다시 싹트는 반목과 무관심은 “아무 쓸데가 없어”라고 세상을 냉소하는 과일 파는 아주머니(항쟁 당시 취사조로 참여한 여성)의 고백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든다. 반성적 성찰의 제스처는 ‘기록’ 혹은 ‘기념’을 구실로 한 고통스러운 역사의 불완전한 청산에 의문을 제기하고, 종내에는 항쟁에 대한 진짜 기록의 행위로 이어진다. 여기서 기록이라 함은 공인받은 역사로서의 기록이 아니라 공식적 담론의 장으로부터 배제된, 기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다시 쓰기’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구두닦이나 전파사, 중국 식당, 꽃집, 과일장수, 관광버스 운전을 하며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항쟁 참가자들의 현재를 비추면서 <오월愛>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항쟁의 뒤안을 차분하게 더듬는다. 공표된 사실을 다루거나 역사의 진위를 묻는 논쟁으로부터 비켜선 까닭에 <오월愛>는 ‘사적 기록’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형식을 부분적으로 채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직유적 표제와 달리 이 영화는 존재론적이고 원죄적인 입장에서 5·18을 다루면서 이러한 양식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현재상을 비추는 유력한 지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항쟁의 역사성과 흔적이 말살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어떻게 망각의 속도를 둔화시키고, 소실되어가는 기억을 영화의 기록술을 통해 복원할 것인가와 연결된다. 이와 관련해 <오월愛>가 선택한 것은 집단의 기억으로서의 광주가 아니라 여전히 기억의 감옥에 갇힌 흩어진 개인들의 삶이다. 항쟁에 동참한 시민군과 가해자로서의 계엄군, 시민군에 주먹밥과 먹을 것을 나른 취사조 여인들, 증언자로서의 저널리스트 등을 인터뷰한 자료들을 편집하여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기억들을 끌어낸다. 김태일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을 상기하면서 저들의 일상적 현실을 잠식하고 있는 소실되지 않은 기억의 망령을 탐색한다. <오월愛>가 그들의 내면과 역사적 대사건의 후과를 발견하는 것은 의외의 장소에서이다. 설 아문 생채기를 들춰내는 이 과정에서 항쟁의 상징적 장소인 광주도청 철거를 둘러싼 논쟁이 끼어들고,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이 실행된 5월26일 새벽에서 5월27일 아침까지의 시간, 분노와 설움, 공포와 생존의지가 범벅이 된 도청 안과 바깥의 공기를 살려내기 위한 기억의 복원이 화두가 된다.
현재성 복원의 전략과 미학
<오월愛>의 핵심은 이미 기록과 평가가 종료된 과거사로 물러서지 않는 광주항쟁의 현재성을 재획득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지점은 물리적으로 지나간 과거 또는 기억의 소멸을 중단시키고 항쟁의 현재적 의미를 복원하기 위해 세운 이 영화의 전략이다. <오월愛>에서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의 서술 방식도 물론 동원되고 있지만 주관적인 내면적 기술(조연출자인 주로미와 시민군 기동타격대로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킨 관광버스 운전기사 양영동의 내레이션)을 통해 주제의 효과를 살려내기도 하고, ‘시간의 재연’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현재적 울림을 극대화하고 있다. 모든 건 개인의 사사로운 상처를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지워지지 않는 학살의 기억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의 내면적 정황을 드러내려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월愛>가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표준적 가치를 수용하면서도 부분적으로 기록의 방식에 대해 들인 각고의 고민이 드러나는 지점이 여기라고 생각된다.
기록의 방식에 있어 <오월愛>는 특이한 설정을 하고 있다. 실제로 서술의 대부분을 인터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긴장이나 공포가 아주 통감되지는 않는다. 인터뷰 다큐멘터리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관련자들의 증언이 전면을 채우는 단조로운 형식은 아니다. 특별히 계엄군의 가혹한 진압이 이루어졌던 5월26일에서 27일로 넘어가는 ‘시간’은 중반부 이후 참여자들의 상세한 진술과 함께 ‘창조적으로 재연’된다. 여기서 ‘창조적 재연’이라고 하는 말에는 부연이 필요할 듯한데, 김태일은 다큐멘터리에 관행화된 문서나 사진, 동영상 등의 인용 자료에 의존하는 르포적 재현을 거절하고 시민군들의 인터뷰와 주로미, 양동남의 내레이션을 교차편집한다. 남다른 것은 내레이션이 흐를 때에 광주도청 인근의 풍경들이 어김없이 끼어들어 긴요한 맥락화를 낸다는 점이다. 도입부 30년의 시간 동안 쌓인 고통의 심연에 대한 탐문으로 들어가기 전, ‘오월愛’라는 타이틀이 뜰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무등산에서 내려다본 광주 시내의 전경이다. 도시는 착 가라앉아 있고 활기를 느낄 수 없는 잿빛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스스로 ‘풍경’(landscape)에 대한 영화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풍경의 시각화와 관련해서 주목할 대목은 <오월愛>가 택한 핵심 사건인 5월26일 밤의 정황들에 대한 기술이다. 이 부분의 서술은 아주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데,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벌어지는 시간과 상황, 그 시간에 도청을 감싼 공기를 증언을 통해 실시간 중계하듯 서술하면서 30년 전 길었던 하룻밤과 지금 여기의 시간을 나란히 세우는 것이다. 나는 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이동, 말과 풍경의 교차편집이 <오월愛>를 통해 김태일이 질기게 붙들고 있던 화두의 양식화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비가 많이 내리던 그날 밤”에 대한 시민군 윤청자의 진술은 기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불길한 먹구름과 천둥소리가 뒤엉킨 현재의 시간과 교차되며, 기동타격대가 구성되는 등 죽음을 앞둔 오후의 침묵은 도청 공사를 위해 동원된 중장비의 괴기스러움과 교차편집되고, “잔당들에게 알린다, 자수하라”라며 투항을 회유하는 방송메시지는 어스름 새벽의 텅 빈 거리 위에 부려진다. 임박한 계엄군의 침탈에 만감이 교차하는 80년 새벽 1시30분 도청 안의 긴장에 대한 증언은 현재 시점에서 새벽 1시30분을 표시하는 도청의 시계로, “민간인 피해는 하나도 없었다”는 완악한 날조 방송은 새벽 4시43분을 표시하는 적요로 형상화된다. 긴박하고 뜨거웠던 그날과 차갑게 식어버린 무망한 현재 시간의 대비. 이 아이러니한 대조의 정점은 항쟁 당시 시민군의 함성과 공사로 휑뎅그렁해진, 터덜거리며 돌아가는 환풍기마저 멈추려 하는 도청 내부를 병치한 사운드-이미지의 병치이다.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시민군의 함성은 환청처럼 항쟁의 장소를 떠돈다. 아시아문화전당 공사로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는 도청 주변의 스케치는 소실되어가는 5·18의 현재적 모습을 풍경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오월愛>에서 과거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과 교직되면서 영향을 미친다. 김태일 감독은 정형화된 다큐멘터리 서사 안에 복합적인 텍스트의 의미와 층을 매설하는 모험적인 시도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그러므로 생생한 실체험이 담긴 시민군 참여자의 인터뷰만큼이나 이 영화의 심상을 결정하는 것은 마디마디 끼어드는 ‘풍경’의 장면화이다. 침묵에 빠진 거리, 냉랭한 콘크리트 빌딩이 포위한 민주화의 성지, 시커먼 먹구름이 덮은 음울한 도시, 도청을 부수려 대기하고 있는 중장비들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영화는 어둠과 적막함에 압도된 도청 주변의 죽은 풍경과 시민군에 참여한 아낙들이 끈질기게 자신의 생활을 꾸려가는 시장의 활력를 대비시킨다.
기록을 통한 2차적 상처의 치유
다른 한편으로 <오월愛>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역사의식의 궁극적인 부재 또는 상실이라는 참담한 전망이다. 모두가 숨죽이며 바깥의 동태를 살피던 공포의 밤은 깊고 무거운 망각의 시대와 나란히 서고, 항쟁 참여자들의 슬픔과 설움을 대변하는 듯 내리던 비는 공사 중인 도청의 아스팔트에 웅덩이로 고인다. 3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에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항쟁의 희생자 한명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 구태여 이전까지 영화에 등장한 적이 없었던 죽음이 끼어드는 것은 물론 당시의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시간은 다시 이곳에서 되풀이된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다. 5·18이라는 역사의 비극성을 사건이 발생한 과거로부터 현재로 끌고 와 그 비극의 질환을 당대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종용하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누가 기록하는가라는 문제가 나선다. 국가가 학살하고, 국가가 기념하는 아이러니한 기록과 기념 메커니즘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론적 완성 또는 온전한 평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와는 달리 <오월愛>는 5·18 광주항쟁을 화석화된 역사로 간주해 박물관에 안장되어서는 안되는 진행형의 역사로 인식하기를 권유한다.
<오월愛>를 통해 김태일 감독은 무망하게 유예된 희망을 끌어올리려는 몸짓을 포기하고 있지 않지만 영화가 활짝 열린 출구를 찾지는 못한 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무거움을 감당하기에는 가벼워진 시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희생자들의 부서진 정서를 드러냄에 있어 이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억압이 아니라 정서적 풍요로움으로 전환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다큐멘터리이든 극화된 드라마이든 시간을 반추하는 회상체 이야기에 끼게 마련인 주관화를 억제하고 객관적 현실의 고통을 껴안아 기록으로서의 다큐멘터리 본유의 기능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오월愛>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역사적 비극을 상기하거나 현재형으로 지속시키지 않으려는 이들의 무관심, 자신의 행위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청산되어버릴 수 있음을 느끼는 항쟁 참여자들의 무력감, 당시를 함께 겪었던 이들의 분열, 살아남은 자들에게 고통과 질곡을 안겨주고 있는 망령이 뭉뚱그려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라는 거대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오월愛>는 현상에 대한 미시적인 탐구에 가깝다.
영화 <오월愛>의 본류는 5·18로 인해 육체와 정신에 새겨진 생채기(1차적 상처)의 본꼴을 더듬어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이 시원적 상처로 인해 생긴 2차적 생채기의 추적에 있다. 그것은 기억 내지는 기억의 축적으로서의 ‘기록’을 통해 이루어진다. 공적 기억으로서 소실되고 있는 광주와 사적 기억으로서 뚜렷이 현존하는 광주 사이의 간극을 예술적 형상화를 통해 메우기. 30년이 지난 광주를 현재화하는 이 작업의 핵심은 ‘기록’의 매체로서 다큐멘터리의 힘을 보여주면서 미시적 추적을 통해 드러난 2차적 생채기의 치유에 다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