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피도 눈물도 없이>의 전도연
2002-01-09
글 : 황혜림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독하다는 말 남자친구보다 짜릿해요

오래 봐온 얼굴이라 해도, 이제 익숙해진 웃음이라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더구나 어디로 튈지 모를 전도연 앞에서는. 긴 생머리에 앞머리를 눈썹 위로 가지런히 잘라 모으고, 배꼽 위로 살짝 올라간 티셔츠와 검은 진의 캐주얼 복장으로 나타난 전도연은 또 달라 보였다. 전에 없이 짙어진 아이라이너로 그늘을 드리운 눈매까지, 어딘지 당돌해 보인다. “난 꼭 오색빛이야. 뽀사시한 조명으로 해주면 안 돼요?”라고 특유의 애교스런 목소리로 코에 주름을 지우며 웃기 전까지는. 그 화사한 웃음 사이사이에도, 고개를 비스듬히 누이고 웃음을 멈출 때마다 소녀 같고 누이 같던 친근한 청순함 대신 미묘한 도발의 생기가 튀어나온다. <해피엔드>에서 불륜의 사랑을 나누던 유부녀보다 한수 높은, 팜므파탈의 위험한 에너지 같은. 이 여자, 아무래도 사고 한건 치려나보다. 투견장의 돈가방을 두고 마초들과 한판 대결을 벌일 <피도 눈물도 없이>의 수진이다.

배우가 영화에 따라 달라지는 건 일견 당연한 일이지만, 수진은 전도연에게도 꽤 낯선 얼굴이다. ‘펄프 누아르’를 표방하는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수진은 라운드걸 출신으로 야비한 투견꾼 독불이의 여자. 지독한 사랑에 묶인 채 가수지망생의 꿈도 묻고 살아가다가, 전직 은행털이인 택시기사 경선과 우연히 의기투합하면서 비루한 현실에서 벗어날 한탕을 벌이는 인물이다. “실제 저와 비슷해요. 깡다구 있고, 말투도 비슷하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도. 자기는 너무 작은데 아주 크게 보이고 싶어하죠. 목도리털을 세워서 앞에서 보면 커 보이지만 사실 몸뚱이는 조그만 도마뱀처럼. 마음이 여리기도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는 놓치지 않죠.” 자기 안의 상처를 감추고, 지지부진한 밑바닥 인생을 탈출하고픈 수진의 욕망을 드러내는 외장은 과감하고 도발적인 분위기. “이 영화 하면서 회춘하는 것 같아요.(웃음) 왜 의상에 따라 말투나 행동이 조금씩 달라지고 그러잖아요. 수진이 되면서 나도 더 들뜨고 발랄해지고 그런 게 느껴져요.”

거친 삼류인생도, 남자들과 돈가방을 두고 싸워야 하는 액션도 처음인 전도연이 <피도 눈물도 없이>에 가담하게 된 건, 8할은 그 낯설음 때문이다. 크고 작은 변주는 있었지만, 데뷔작 <접속>부터 지난해 1월에 개봉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까지 모두 5편의 영화에서 전도연은 사랑이야기를 맴돌았다. <나도 아내가…>를 끝내고 쌓여 있는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도, 대부분은 역시 멜로드라마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뭔가 막연하게 다른 걸 하고 싶다”는 갈증을 느낄 때, <피도 눈물도 없이>가 눈에 들어왔다. “뭐가 먹고 싶은지 모르다가 자장면을 본 순간, 그래 자장면이 너무 먹고 싶었어, 그런 것처럼 딱 이거다 싶은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류승완 감독을 만났을 때, “여배우로서 예쁜 모습이 아니라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말도 귀가 솔깃했다. “욕심이 많아서 어느 하나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모험정신도 좀 있고.” 처음 해보는 연기라 류승완 감독이 아니었다면 좀더 망설였을지 모른다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워낙 좋게 봤던 것도 믿음을 줬다고 말한다.

지난해 7월부터 11월 초까지, 꼬박 4개월의 강행군을 하는 동안 전도연은 독해졌다. 시나리오를 읽은 열이면 열 다 다르게 해석하는 수진을 이해하고자, 처음으로 노트에 표까지 만들어 자신과 비교해가며 캐릭터 연구도 해봤다. “직접적인 액션이 많진 않지만 얻어맞더라도 잘 맞기 위해” 보라매 공원에서 정두홍 감독에게 3개월쯤 근력 훈련을 받았고, 예고편을 찍다가 투견장 철조망에 손가락이 찢어져 난생처음 일곱 바늘을 꿰매기도 했다. 여름옷으로 겨울인 양 매서운 인천의 바닷바람에 떨면서도 엄살떨지 않는 그녀에게, “독하다”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이 따라붙었다. “감정 연기를 하면 쭉 이어가는데, 상황만 주어지고 혼자 리액션을 해야 되니까 연기를 맞게 한 건지” 촬영 내내 불안했다지만, “온몸을 던져서 많이 아픈 게 차라리 편했어요, 결리지만 이만하면 됐어, 그러고” 하는 말이, 은근히 자랑스러운 눈치다.

어느덧 서른 즈음, 혹은 생일이 안 지났다니 아직은 스물아홉살. 스크린 데뷔부터 지금까지 기복없는 상승곡선을 그려왔지만, 가끔은 그래서 오히려 불안해진다고. 한편 한편의 영화를 고를 때 더욱 신중해지고, 여배우들의 수명이 짧다는 것도 때로 서글퍼지기도 한다. 그래서 전도연은, 서슴없이 망가지고 싶다고 말한다. “여배우는 스크린의 꽃이라는데, 그런 걸 깨버리고 싶어요. 결국 여배우들이 단명하는 이유 중 하난 것 같거든요.” 예전에는 열심히 하는 모습을 예쁘게 봐줬으면 했지만 지금은 “여배우가 아니라 배우”로 살아남고 싶다고 거듭 얘기하는 그를 보자니, 악다구니 쓰고 맞아가며 망가졌을 <피도 눈물도 없이>가 더 궁금해진다. 끝까지 “<피도 눈물도 없이>가 잘되고, 좋은 남자보다 좋은 작품을 먼저 만났으면” 하고 새해 각오를 다지는 이 ‘배우’를,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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