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에이트>가 <클로버필드>와 스필버그의 영화들(<E.T.> <구니스> <미지와의 조우>), 그리고 봉준호의 <괴물>이 뒤섞인 영화라는 데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는 것 같다. 다만 그 조합이 충분히 매력적으로 폭발하지 못했다는 실망감을 종종 접한다. 혹은 J. J. 에이브럼스의 영화적 야심보다는 스필버그의 가족주의와 성장, 모험담을 보고 자란 세대의 향수에 철저히 기대는 영화라는 견해도 다수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고, 스필버그의 한 시절에 대한 향수도 없다고 믿어온 나로서는 동의가 잘 되지 않는데, 어쨌든 <슈퍼 에이트>에는 위의 감상을 넘어서 영화 내에서 좀더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J. J. 에이브럼스가 이 영화를 “드라마, 코미디, 성장영화, 모험영화, 괴물영화 등 내가 좋아하는 모든 장르의 희한한 칵테일”이라고 설명할 때, 그가 딱히 심각한 의도를 품고 말한 것 같지는 않으나, 그 말은 흥미롭다.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말이 뭔가 조화롭지 않은 것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조합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성장영화와 괴물영화가 결합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그런데 이때 괴물이 그냥 판타지 월드의 악당이나 우호적인 외계인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알레고리, 징후, 그러니까 현실의 모순을 체현하는 대상일 때, 아이들은 동심 가득한 스필버그의 아이들일 수 있는가? <클로버필드>와 <괴물>의 암담한 세계(장르 안에 있지만 지극히 현실을 환기하는 세계)에서 죽지 않고 뛰어노는 <E.T.>의 아이들은 어딘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언뜻 보기에는 스필버그의 낙관적 세계의 부활 같지만 영화가 어딘지 삐거덕거리며 뭔가 다른 궁리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 순간, 나는 이 영화가 흥미로워졌다.
아둔한 어른들 vs 영민한 아이들
상투적인 도식에서부터 시작을 해야겠다. 성장영화의 기본 구도가 아이의 세계 대 어른의 세계, 즉 두 세계가 어떻게 충돌하고 만나는가, 에 있다고 한다면 <E.T.>나 <구니스> 같은 영화들에서 그 두 세계를 구분하는 기준은 동심의 유무였다. 그 동심이 영화에서 판타지와 현실을 접합해주는 다리가 되고, 가족주의의 순수성을 회복시켜주는 기제가 된다. 그런데 <슈퍼 에이트>에서 비밀이 감춰진 어른세계와 비밀을 감추는 아이세계가 병렬되고, 두 세계가 각자 활동하며 서로 만나지 못할 때, 둘을 나누는 건 동심의 유무가 아니다. 그러니까 판타지를 순진하게 기꺼이 믿는 세계와 냉소하는 세계의 대립이 아니다. <슈퍼 에이트>가 방금 스필버그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아이들의 영화적 생동감을 그대로 취하면서 그 아이들의 세계를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구분하는 기준을 전혀 다른 데서 찾고 있다는 것. 이 영화의 이상한 선택. 그게 <슈퍼 에이트>가 스필버그로부터 갈라지는 지점이다. 혹은 21세기의 아이들이 20세기의 아이들과 달라지는 지점이다.
그걸 말하기 전에 우선 영화 속 어른들의 세계가, 혹은 어른들이, 영화적으로 주어진 무게나 서사적으로 맡은 역할에 비해 지나치게 아둔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아이들이 주인공인 오락영화라고 해도, 이 어른들의 모습은 영화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너무 멍청하다. 기차 전복사고가 있던 날,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공군은 사건의 목격자들(아이들)이 차를 타고 떠나는 걸 간발의 차로 놓치는데, 더이상 추격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아이들이 현장 근처나 자신들의 숙소 바로 앞에서 영화를 찍고 있을 때에도 아이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괴물을 포획하기 위해 마을에 일부러 불을 내고 마을 보안관을 구금하지만 정작 괴물과 대면하는 순간에는 포획은커녕 대결도 못한다. 조이의 아버지이자 마을 보안관인 잭슨은 아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마을 주민 1200명의 목숨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영웅심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사건 현장에는 언제나 뒤늦게 도달하거나 사건의 잔상만을 만질 뿐이다. 구금되었던 그가 탈출해서 짐짓 결의에 찬 얼굴로 마을 대피소로 이동할 때, 반대 경로로 아들이 탄 차가 사건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학교를 향해 지나가는 장면을 보라. 이 무력하고 무지한 남자의 영웅심리는 좀 우스꽝스럽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술만 마시는 앨리스의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아이들에게 유일한 형이라고 할 만한 남자는 마약에 취해 있다. 괴물과 관련된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박사는 양심적이기는 하나, 비밀을 끝내 폭로하지 못하고 거의 자폭해버린다. 그가 죽기 전, 괴물을 지칭하며 마지막으로 공군에게 남긴 말, “그는 내 안에 있다. 그는 나다”라는 말에는 어딘지 이상주의자의 정신분열적인 기운이 있다. 사건을 일으키고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확장시킨 이 어른들은 사건과 관련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들은 이 초현실적인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을 이성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알지 못한다. 이들에게 열쇠를 쥐어주는 건 언제나 아이들이다. 이 어른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도 감을 잡지 못할까? 그저 동심이 아니라면 어른들에게는 없으나 아이들에게만 있는 그 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기차역에서 아이들이 영화 리허설을 하는 중에 저 멀리서 진짜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차가 지나가기 전에 장면을 찍어야 한다면서 감독 지망생인 찰스가 다급하게 소리친다. “production value!” 감독으로서 그는 돈 들이지 않고도 운 좋게 얻은 스펙터클의 타이밍을 포착할 때마다 그렇게 표현한다. 기차 사고가 난 다음날에도 부서진 현장을 배경으로 이들은 영화를 찍고, 앞서 말했듯 공군 아지트 앞에서 실제 공군들을 배경 삼아서 연기한다. 말하자면 허구의 이야기에 실제 상황이 끼어들어서 마치 허구의 이야기가 조악하지 않은 사실적인 그림을 획득하게 되는 순간을 그는 열망한다. 그건 단순한 열망이 아니라 이 영화키드들이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이다. 그걸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사고가 난 직후, 뉴스에서는 아수라장이 된 현장이 나오며 여전히 오리무중인 사건의 실체에 대해 설명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들린다. 두 아이는 자신들이 바로 전날 생사를 오가며 겪었던 엄청난 사건을 마치 남의 일처럼 숨죽이며 다시 구경하면서 감탄한다. “꼭 재난영화 같아.” 그러고 나서 대강 이런 식의 말을 한다. “그래, 이걸 영화화하는 거야.”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경험이지만 그래서 좀 오싹하다. 실재를 가상처럼 다루고, 가상을 실재처럼 대하는 것. 9·11 테러 이후 그 징후로 등장한 수많은 재난영화들, 특히 감독의 전작인 <클로버필드>의 개봉 당시 현실적 맥락이 묘하게 겹쳐진다. 무엇보다 재난영화가 현실에 침범해 들어온 것 같은 9·11 테러를 목격하며 느꼈던 우리 모두의 두려운 쾌감이 아이들의 반짝거리는 눈에서도 어른거린다. 어른들에게 마을의 재난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더없이 불길한 사건이지만 아이들은 그걸 가상세계로 초대해서 유희하며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유희는 이들의 동심에 의해 가능해지는 게 아니다. 이들이 영화를 만들 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 속 세계에서 꿈을 꾸고 성장한다는 낭만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들이 영화매체를 다룰 줄 아는 기술적 명민함과 그에 따르는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들은 이미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기계의 힘에 익숙하다. 기차가 전복되고 아이들이 사방으로 도망간 뒤에도 그 자리에서 계속 돌아간 카메라는 나중에 아이들이 사건 당시에는 보지 못한 기괴한 생명체의 형상을 현상된 필름으로 보게 해준다. 그때 그 괴물은 아이들에게 현실의 존재로 다가왔을까, 영화 속의 대상으로 여겨졌을까. 아니, 그런 구별에 대한 의식이 이들에게 중요하기는 할까. 어쨌든 아이들이 실재와 가상을 넘나들며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사는 동안, 어른들은 여전히 현실의 경직된 논리에 갇혀 있다. 그들은 초현실적인 생명체의 등장에 소련의 침공이라느니, 곰이 한 짓이라느니 한심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기껏해야 총으로 위협할 줄만 안다. 카메라가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 잡아낸 괴물의 정체를 경찰의 아날로그적인 수사방식은 끝내 밝혀내지 못한다. 이 어른들은 현실의 논리를 넘어서는 대상과 소통하는 법은커녕 접촉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아이들은 오직 기계만이 포착할 수 있는 우연을 즐기고 기계의 촉수를 가지고 놀 줄 알지만 어른들은 기계를 무기로 쓸 줄만 알거나, 심지어 극한 상황에서는 컨트롤조차 하지 못한다(마을에 진입한 탱크와 총들이 인간의 의지를 벗어나 움직이며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장면). 이 영화에서 어른들에게는 없고, 아이들에게만 있는 건 기계적 상상력과 능숙함이다. 같은 시공간을 사는 것처럼 보여도 아이들과 어른들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
동심 가득한 스필버그의 아이들이 아냐
그렇다면 <슈퍼 에이트>는 이 영화키드들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즐겁게 껴안고 있는가? 이에 대해 생각할 만한 두 가지 상황이 있다. 영화가 끝난 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마치 부록처럼 아이들의 완성된 영화(<더 케이스>)가 공개된다. 이들의 촬영과정을 따라가며 영화의 단편들만 엿보다가 마침내 한편의 영화로 보게 되는 순간인데, 본 영화보다 아이들이 만든 영화 속 영화가 더 재미있다는 세간의 평은 납득할 만하다. 내용은 이렇다. 화학물질 때문에 노동자를 좀비로 양산하는 화학공장이 있다. 이 사건의 연쇄가 단순히 사고가 아니라고 판단한 형사가 기업 사장을 찾아가 수사하지만 사장은 발뺌한다. 물론 이 악덕 사장은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중이었고, 형사의 아내 역시 좀비가 되지만 우여곡절 끝에 백신을 구해 아내를 살린다. 내용상으로는 좀비영화의 전형적인 줄거리로 딱히 특별할 건 없는데, 슈퍼 8mm로 찍은 ‘영화 속 영화’ <더 케이스>는 <슈퍼 에이트>와의 관계 안에서 특별한 힘을 발휘한다.
<슈퍼 에이트>의 장르적 느슨함에 비해 치밀하게 짜인 <더 케이스>의 컬트적인 감수성이 귀여워서이기도 하지만 이 작은 영화에 스며든 정치적인 예민함 때문이기도 하다. <슈퍼 에이트>의 도입부에 좀비영화를 준비하던 아이들은 “사람들이 좀비가 되는 건 화학공장 때문이지?”라는 말을 하는데, 그즈음에 뉴스에서는 작은 소리로 노심용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방송이 나오고 있다. 좀비-노동자-화학물질-악덕 기업주-자본주의 시스템. 아이들에게 계급의식이 있을 리도 없고, 이 연결고리는 물론 더없이 순진하고 평면적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영화키드들이 세상을 이렇게 장르적으로 파악할 때의 이상한 에너지가 있고, 그 에너지는 <슈퍼 에이트> 속 어른들의 정치적인 무력감의 세계에는 없던 것이다. 아이들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와 좀비의 연관성을 ‘영화적’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 앎이 깊은 사유의 결과일 리 만무하지만 아이들의 영화적 감수성에는 어른들의 세계가 보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것들에 대한 감각이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더 케이스>의 이야기는 이 아이들이 사는 현실의 사건과 묘하게 맞물리며 현실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코멘트로 기능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슈퍼 에이트>가 시작할 때, 영화가 처음 보여준 건 “릴리안 제철 무사고 기간”이 칠백 며칠에서 1일로 바뀌는 장면이다. 뒤이어 알게 되는 건 그 공장에서 노동자가 죽었고 죽은 자는 앨리스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출근했던 조이의 엄마이며, 그 제철공장이 이 마을의 하층민 노동자들의 주요 일터라는 것이다. 앞선 뉴스의 내용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사건을 개인적인 불운의 차원에서만 다루기 때문에 우리는 공장 내부의 상황이나 사건의 정황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마을이 관심을 기울이는 사건은 외부에서 침입한 공군과 괴물이 벌이는 일들이다. 하지만 사실 이 마을의 정치적인 무력감이나 우울은 영화 시작에 드리워진 릴리안 제철소의 어둠과 더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더 케이스>만이 그 트라우마를 망각하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상황은 아이들이 앨리스를 구하기 위해 무작정 불타는 마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을 때 생기는데 이 경우 그들의 모습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마을에 불을 지르며 괴물을 뒤쫓던 군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무기도 컨트롤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폭탄을 터뜨리는 형국을 맞이한다. 이 불바다에서 아이들이 피해다니는 건 군인들의 공격도, 괴물의 공격도 아니라, 제멋대로 움직이며 폭발하는 기계들이다. 실제 상황이라기보다는 가상과 실재의 경계가 무너진 시공간, 혹은 전쟁 시뮬레이션 안에서 아이들이 마치 전쟁놀이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현실을 영화로 파악하는 영화키드들의 동일한 활력이 <더 케이스>에서는 현실과의 관계 안에서 신선하게 작동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현실의 파국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한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슈퍼 에이트>는 한때 영화키드였던 자들의 낭만적인 추억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향수영화가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 현재성을 의식한 지점들이 있다. 괴물을 촌스럽게 공격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그 대상을 ‘터치’함으로써 소통하는 법을 금세 터득한다. 그 터치가 체온의 교류, 혹은 인본주의적인 공감의 능력이 아니라, 스마트폰 시대의 터치의 기술에 더 밀접해 보였다고 말한다면 비약일까? 그 어떤 공군도, 경찰도 해결하지 못한 사태를 이 아이들이 가볍게 풀어내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든 생각. 터치를 모르는 구식 어른들은 이제 과연 어떤 영화적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스필버그의 아이들은 이제 가족주의의 품 대신 기계의 예민한 감각을 더 믿는다. 그들은 판타지를 순수하게 신뢰하는 대신, 판타지를 만들거나 가지고 논다. <슈퍼 에이트>는 21세기의 아이들을 70∼80년대의 장르적 세상 속으로 보낸 다음,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는 희한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