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는 볼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영화다. 처음엔 성장영화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거기 있었다. 또한 음악영화였다. 록과 클래식이 거기 있었다. 또한 연대에 대한 영화였다. 공동체가 거기 있었다. 파업을 주도한 빌리의 형 토니가 도망칠 때 클래시의 <London Calling>이 흐른다. 주민들은 쪽문을 열어 길을 열어주지만 이내 토니는 기마경찰의 곤봉에 얻어맞고 개처럼 끌려간다. 그 앞에서 빌리는 고개를 숙이고 저항은 좌절된다. 하지만 얼마 뒤, 주민들은 빌리의 진학을 위해 돈을 모은다. 곧 사라질 탄광촌에서 그들은 미래의 뭔가를 위해 주머니의 몇 페니를 꺼내고 또 손을 맞잡는다. 네가 희망이라고 말한다.
최근 한진중공업 노조가 파업을 철회했다. 175일 넘게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씨와 해고자들은 몰랐다. 버림받은 그들은 여전히 싸운다. <빌리 엘리어트>는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된 1984년의 픽션이다. 김진숙씨는 2011년 한국의 논픽션이다. 클래시의 <London Calling>은 “진짜 좋았던 적은 결코 없었어”로 끝나지만 그 직전에 “이게 다 지나가면 한번 웃어주겠니?”라고 눙친다. 이게 다 지날 때까지, 그러니까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때까지 당신들과 함께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