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는 건 설레면서도 잔혹한 일이다. 모호하게 부유하던 장면들이 스크린 위에 움직임으로 정착되었을 때, 환희와 실망은 동시에 찾아온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대한 평가가 유독 박한 것은 그 태생적인 원죄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나 비처럼 쏟아질 혹평의 칼날에도 불구하고 각색 영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까닭은 (사실 산업적인 이유가 대부분이겠지만) 그것이 ‘꿈의 실현’이라는 스크린의 욕구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영화가 상상의 실현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한, 우리는 혹은 원작 팬들은 매번 실망하면서도 극장으로 발길을 향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의 무수한 실망을 뒤로한 채, 여기 히트 만화를 원작으로 한 또 한편의 영화 <간츠>가 관객의 평가를 기다린다.
무존재감으로 일상을 살아가던 소심남 쿠로노 케이(니노미야 가즈나리)는 어느 날 소꿉친구였던 카토 마사루(마쓰야마 겐이치)와 함께 선로에 떨어진 술주정꾼을 돕다 전철에 치인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두 사람은 이상한 아파트 한가운데에서 눈을 뜨고, 그곳에서 영문을 모른 채 끌려온 사람들과 함께 방 한가운데 있는 수수께끼의 검은 구체 ‘간츠’를 발견한다. 이윽고 간츠로부터 “당신들의 목숨은 이미 끊어졌습니다. 그 목숨을 어떻게 사용하든 그건 내 마음입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제한된 시간 동안 성인(星人)이라 불리는 미지의 존재를 해치우고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꿈인지 현실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생존 게임에 내던져진 사람들. 영문도 모른 채 벌어지는 사투의 반복 속에서 간츠에 적응하며 차츰 변하는 쿠로노와 모두와 함께 살아서 동생에게 돌아가려는 카토는 서로 반목하고, 위기가 더해갈수록 검은 구체의 비밀은 서서히 밝혀진다.
원작 <간츠>는 2000년부터 <주간 영챔프>에 연재되어 1600만부의 누적판매량을 기록한 오쿠 히로야의 19금(禁) SF만화다. 목적없는 나약한 주인공이 생존이란 난제에 부딪혀 스스로 문제를 내고 답을 찾아가는 전형적인 소년 장르만화의 성장담을 뼈대로 하지만, <간츠>의 진정한 매력은 19금다운 과격한 표현과 설명 없이 내던져진 공간에서 펼쳐지는 예측할 수 없는 전개에 있다. 그런 만큼 특유의 기이한 상상력과 선정적인 묘사를 영상화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원작의 인기에 힘입어 우려와 기대 속에서 결국 영화화되었다. 그렇다고 미리 낙담할 필요는 없다. 개봉 뒤 4주간 일본 흥행 1위를 차지하며 34억엔 이상의 흥행수입을 거둔 사실이 증명하듯 영화는 대체로 깔끔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아라시의 멤버 니노미야 가즈나리와 <데스노트>의 ‘L’로 잘 알려진 마쓰야마 겐이치가 주연으로 발탁된 순간, 이 영화의 방향은 결정된 거라고 봐도 좋다. 무려 4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영화는 뼈대, 설정, 분위기는 그대로 가져오되 블록버스터답게 표현수위는 최대한 순화했다. 원작 최대의 매력을 어느 정도 포기한 만큼 나머지 부분, 특히 작품의 분위기와 캐릭터에 관해선 원작과 최대한의 싱크로를 추구한다. 영화만의 오리지널 스토리와 재해석은 연이어 개봉할 <간츠-파이널 앤서>에 맡긴 채 ‘간츠’의 세계관과 인물을 설명하는 데 주력한 느낌이다.
다만 블록버스터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일본시장 기준인 만큼 할리우드의 각색 스타일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단지 CG나 특수효과의 수준문제가 아니다. 압도적인 비주얼의 홍수로 과잉의 미학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의 만화 원작 영화들과 달리, <간츠>는 캐릭터의 내면과 드라마 묘사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문제는 그럼에도 방대한 원작에 대한 압축적 전개를 강요당한 탓인지 상당 시간을 할애한 드라마적 요소가 정서적 동화보다는 액션의 속도감을 늦추는 방향으로만 작동한다는 점이다. 스펙터클과 드라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엇박자를 치는 리듬감은 영화를 점점 지루하게 만든다. 또한 유독 밤에 찍은 액션장면이 많은데, 원작의 설정 때문이라기보다는 CG의 한계를 감추려는 시도가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지나치게 어두워 액션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된다. 하지만 워낙 원작과의 싱크로율이 높기 때문에 원작 팬이라면 복잡한 심경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극장을 나설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적어도 <간츠-파이널 앤서>를 보기 전까진 단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