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관객을 관계의 중심에 놓다
2011-08-11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가슴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을린 사랑>의 충격효과의 기원

*스포일러가 처음부터 끝까지 있습니다.
<그을린 사랑>이 말하는 충격적인 스토리의 전말에 대해 재론할 생각은 없다. 현대 중동의 정치학과 오이디푸스 서사의 절충으로 이 영화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정치학과 정신분석학을 빌려 이 불편한 진실의 함의에 대해 해설하기보다 나는 가슴을 얼어붙게 만드는 충격효과의 기원에 대해 분석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사건의 대담성만큼이나 이 영화가 우리의 감정을 초토화시키는 것은 서사의 조직과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에서 체험하는 인식의 효과 내지는, 서사 정보가 은폐되고 점진적으로 또는 급작스럽게 누출되는 방식에서 찾아지기 때문이다. <그을린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 기획한 혹독한 운명의 비의에 대한 은밀한 성찰의 기회를 여로의 구조를 통해 서사화하고 있다. 현실에서 되풀이되는 갈등과 분쟁의 부조리를 현실감을 탈색시킨 공간과 이야기 구조로 풀이하는 이 영화의 서사화 전략은 근간에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였다. 이 전략이 또한 중동의 비극이나 희망을 다룬 무수히 많은 영화들과 <그을린 사랑>이 구별되는 혁신의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로를 탐사하는 다중 서사

이 글은 주제나 메시지를 풀이하기 위한 해제가 아니라 탐정 스토리를 보는 것처럼 흥미로운 이 이야기의 원리에 대한 것이다. 두개의 대륙과 수십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서사는 총 열개의 장(혹은 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단락으로 나뉜 이야기 조각들을 촘촘히 엮어내는 다중 플롯을 택하고 있다. ‘쌍둥이’, ‘나왈’, ‘다레쉬’, ‘남쪽’, ‘데레사’, ‘크파르 리얏’, ‘노래하는 여인’, ‘사르완과 자난’, ‘니하드’, ‘샴세딘’, 서사를 구성하는 장은 이렇게 열개이다. 애초 영화가 연극을 원안으로 한 각색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연극의 막 구성을 영화에서는 자막을 붙인 열개의 장으로 바꾸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여하튼 분절된 이야기 조각을 엮는 비관습적 내러티브 구조 안에서 나왈 마르완(루브나 아자발)의 과거 스토리와 쌍둥이 오누이 잔느(멜리사 드소르모- 풀랭)-시몽(막심 고데트)의 현재 스토리가 섞이고 이들의 연대기적이고 인과론적인 연결 대신 캐릭터와 상황 사이의 감정적인 연결을 강조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두 단락이 상호 융합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을린 사랑>은 탐색의 여로를 따라간다. 근래에 본 가장 인상적인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중동에서의 전쟁을 다룬 여느 이야기들과 완연히 다르다. 라디오헤드의 노래 <You and Whose Army?>를 따라 완만하게 패닝하는 첫 번째 숏은 목가적인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하는 풍경을 잡은 파노라마적 풍경이다. 살랑대는 사막의 바람에 흔들리는 종려나무의 시정으로 주의를 끄는 첫 번째 숏은 이내 한 소년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발목 뒤에 화인으로 새겨진 세개의 점 문신으로 그가 세개의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는 기구한 운명의 사슬에 매이게 된다는 사실(니하드 드 메->아부 타렉->니하드 하르마니)을 우리는 이 최초의 이미지만으로 도무지 예측할 수 없다. 속 깊은 우물과 같은 소년의 눈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카메라를 쏘아본다. 소년 니하드의 첫 이미지는 이 비극적인 가족의 연대기가 발화하는 지점, 패밀리주의의 외연을 확장한 종교와 민족의 갈등이 분기하는 기원을 보여준다. 모슬렘 난민 캠프를 폭격한 기독교 민병대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소년들은 무도한 원수들에 대항하는 전사가 되기 위해 이제 막 삭발을 하는 중이다.

음악은 계속되고 서사는 문서 파일들이 빽빽이 들어찬 2009년 캐나다의 한 공증인 사무실로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나왈 마르완’의 파일을 열면서 우리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 쌍둥이 남매의 탄생과 관련한 믿기 힘든 비밀에 조금씩 접근해간다. <그을린 사랑>은 단순한 디자인의 무작위적인 반복에 기초한 비선형적 내레이션이 아니다. 서사는 계산적으로 설계된 직소퍼즐을 이루는 바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각각의 장들은 가족사의 미스터리와 관련된 하나의 궁금증을 풀고 다음 퍼즐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끝이 난다. 교차서사를 조직하는 이 원칙을 지키면서 드니 빌뇌브 감독은 과거와 현재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가족 구성원들의 파편적인 스토리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분노와 증오에 관한 거대한 암각화가 되어가는가를 조금씩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통제와 힘 바깥에 놓인 무작위적이고 믿기 힘든 사건들의 연쇄는 민족, 종교분쟁의 탁류에 휩쓸려 지나가버린 죽은 시간을 부활시킨다.

한편으로 <그을린 사랑>은 비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의도와 달리 아이덴티티의 변질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랑에 모든 걸 걸었던 무지렁이 시골 처녀에서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암살하는 테러리스트, 악독한 고문을 버티는 정치범, 공증인 사무실의 비서로 여생을 마친 나왈의 인생 궤적, 버려진 고아에서 소년병, 신출귀몰한 전쟁광 저격수, 인면수심의 고문기술자, 과거를 감춘 버스 청소원으로 진화하는 니하드의 역사, 사르완과 자난이라는 태명을 상실하고 캐나다 시민 시몽과 잔느로 살아온 쌍둥이 남매의 아이덴티티는 죄 하나의 뿌리를 갖는다 할 것이다. 이를 조직하는 서사 구축 방식은 너무도 치밀하여 이야기에 관객을 깊이 연루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감정을 쥐락펴락한다. 가상의 중동지역으로 설정된 익명의 공간이 이야기를 추상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속적으로 끊어지는 장 구성과 각 장들에 붙여진 제목, 불연속적으로 보이지만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는 장들 사이의 관계가 끊이지 않는 중동의 분쟁에 대한 알레고리로 텍스트를 위치시킨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관객은 잔느-시몽과 같은 탐색자의 자리에서 영원히 봉인될 수도 있었던 이 가족사의 미스터리를 풀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가족사의 비밀을 추궁하는 이 탐색의 서사는 둘둘 휘말린 운명의 논리에 지배되는 인간세계의 우화이다. 엄격하게 핍진성의 잣대를 들이대고 자연주의적인 기준을 적용하자면 과거와 현재로 나뉜 두 이야기를 감싼 우연이 쉽게 수긍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사의 핍진성은 이 영화가 제공하는 드라마의 무게, 탁월한 서사전략에 비해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교차편집을 통해 이야기의 단절과 접점을 만들어내는 방식, 서사 정보의 흐름을 조율함으로써 관객의 반응을 끌고 가는 솜씨는 하나의 장 안에서도 명징하게 확인된다. 플롯의 주도면밀함은 쇼킹한 결말로 가까이 가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여러 단서들이 이미 첫 장면에서부터 거기에 끼워넣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두번 반복되는 수영장 신. 처음 등장하는 수영장 신에서 우리는 반쯤 얼이 빠진 나왈이 선베드에 주저앉아 있는 원경 숏을 보게 되는데, 그녀가 받은 충격은 같은 장면의 반복을 통해 해설된다. 다중 플롯의 묘미, 보다 직접적으로 가족사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의 강도는 바로 이 서사 정보의 단계적 노출과 위계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정보의 위계에 따른 점진 노출

무질서하게 보이는 <그을린 사랑>의 서사구조에는 희미한 배열의 원리가 있다. 그것은 분리된 시간을 하나의 플롯 안에 모이게 만드는 서사의 원리와 결부되어 있다. 동일자와 타자가 머리와 몸이 되어 나타나고 마는 우울한 가계(家系)의 여로, 좀체 풀릴 기색이 없는 증오의 고리를 끊어내려는 나왈의 간절함과 그녀의 뒤를 밟는 쌍둥이 남매의 초조와 연민으로 뒤숭숭한 마음속을 이 원리가 관통한다. 이 영화는 파편화된 삶, 멀리 떨어져 아무 관련성도 없어 보이는 인간과 사건들 사이의 비의적 연결, 아이러니한 비극의 순환고리를 ‘장의 구조’를 통해 체험하게 한다. <그을린 사랑>이 묘사하는 생멸(生滅)의 시간은 이데올로기, 이념, 종교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지만 그 핵심 메타포는 강간(“강간이 가족의 내력”이라는 시몽의 조소는 괜한 농지거리로 들리지 않는다)과 근친상간이다. 서사가 진전되면서 하나씩 벗겨지는 미스터리의 실체는 이 두 메타포를 경유하는데, 그 누출의 순간이 다소간 다르게 처리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개성적인 서사화 방법론을 입증한다.

<그을린 사랑>은 시종일관 날카롭게 잘린 삶의 단면처럼 삶과 죽음, 희극과 비극, 안정과 불안정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배열한다. 여기서 연대기적인 시간의 배열은 감정의 시간으로 대체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각난 내러티브 단위들은 불연속적으로 연결되기보다 미리 계획된 컨티뉴이티 또는 공명효과를 일으키며 이전 장면들과 묶인다. 예컨대 오프닝에서 우리는 소년 니하드의 삭발식 장면을 보게 되는데 뒤에 이어지는 것은 소년의 불운한 탄생 내력을 보여주는 스토리이다. 3장에서 기독교 민병대의 민간인 버스 학살 신에 이어 버스 안에서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듣고 있는 잔느의 모습으로 커팅되는 연결, 9장 ‘니하드’에서 10장 ‘샴세딘’으로 넘어가는 챕터의 전환 역시 이같은 원리를 따른다. 9장에서 샴세딘 요원의 안내에 따라 자동차에 타는 시몽을 보여주는 숏 뒤에 이어지는 것은 한적한 도로 곁에 주차된 한대의 밴 뒤에 멈춰 서는 자동차인데, 우리는 이 숏이 이전 숏의 연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이 플래시백되어 출소한 나왈이 조직의 지도자 샴세딘을 만나는 것으로 밝혀진다. 액션의 컨티뉴이티를 유지하면서 챕터와 그 주제가 자연스레 전환되는 현대적인 컨티뉴이티 양식의 비근한 예로 이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연관된 장소와 인물, 상황을 교차시키는 배열방식이 인식의 충격을 만들어내는 이 영화의 핵심요소인가? 전술했듯이 배열의 효과를 배가시키는 것은 정보에 대한 단계적이고 차별적인 인지이다. 여기서 전제할 것은, 서사 정보에 대한 관객의 인지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나왈이 아니라 탐색의 주체인 잔느-시몽을 따라간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을린 사랑>이 던지는 서사상의 반전 또는 충격적 진실은 두 가지로 제시된다.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아부 타렉이 잔느와 시몽의 친부였다는 것이 하나요, 쌍둥이 남매가 찾는 나왈의 또 다른 아들 니하드와 아부 타렉이 동일인이라는 것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 진실은 13년간 나왈을 감시한 전직 교도소 간수의 증언을 통해 잔느에게 전달되고, 두 번째 진실은 샴세드 조직의 한 노인의 진술을 통해 시몽에게 전달된다. 주의 깊게 살필 것은 은폐된 정보의 누출을 조율하는 이 방식에 간과할 수 없는 차이이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관객이 작중인물과 맺게 되는 정보의 위계에 유념해보자. 첫 번째 진실이 밝혀질 때 관객은 잔느-시몽보다 그것을 먼저 알게 되는데 반해 두 번째 진실이 밝혀질 때는 무방비 상태의 그들과 동일한 시간에 별안간 인식하게 된다. 이 차이는 두 번째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의 강도를 한층 높여놓는다.

첫 번째 진실, 아부 타렉이 쌍둥이의 친부라는 사실을 우리는 전직 교도소 간수의 말을 듣는 즉시 깨닫는다. 그러나 니하드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는 잔느와 시몽은 처음에 아부 타렉의 강간으로 잉태된 것이 그들의 배다른 형제, 즉 니하드라고 믿는다. 당시 수형자 신분이었던 나왈을 대신해 자신들을 돌본 노파의 말을 듣고 나서야 쌍둥이는 이 사실을 깨닫는다. 첫 번째 진실을 인지하는 관객과 캐릭터의 시간차는 생각보다 큰 서사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두 번째 진실의 폭로와 관련하여 이 원리가 더 명확해진다. 샴세드 조직의 노인에게 5월의 니하드가 아부 타렉이었다는 걸 듣게 되었을 때 황망하게 얼이 빠지고 마는 시몽처럼 관객 역시 기습적으로 이 충격적 진실을 대면하게 되고, 듣는 즉시 머리가 멍해진다. 첫 번째 반전에서 우리는 미처 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잔느와 시몽의 반응에 주목하게 되지만 두 번째 반전에서 우리는 그들과 동일한 망연함을 느끼게 된다. 두 번째 반전 전까지 관객은 항상 작중인물(잔느와 시몽)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특정 지점에서 우리는 나왈보다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하기도 하는데, 이는 부모에게 버려진 뒤 니하드가 보냈을 자멸의 나날들에 대해 간헐적으로 정보를 제공받기 때문이다. 특별히 잔느와 시몽은 내레이터가 이전에 관객에게만 알려주었던 정보(나왈의 고향 데롬에서 벌어진 태초의 비극과 미시적인 그녀의 스토리)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뒤늦은 탐사’를 계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의 우위에 대한 관객의 안도감은 두 번째 진실이 기습적으로 폭로되는 순간 무참히 깨진다. 그러니 작중인물이 모르는 정보를 관객에게 먼저 제공한, 그래서 관객에게 앎에 대한 신적인 자리를 내어준 서사상의 전략은 이 두 번째 진실의 충격적 인식효과를 위한 미끼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중 교차 내러티브의 힘

면밀한 스토리텔링의 능력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묘사하려는 세계의 모습과 조응할 때 힘을 얻게 된다. <그을린 사랑>은 인물들의 얽힌 운명에 의해 혈연적 유대감이 적개심으로 변질되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다중 교차 내러티브는 잠시 혼란스럽지만 드니 빌뇌브는 이런 유의 이야기에 정통한 듯 복잡한 스토리를 능숙하게 다룬다. 민감한 정치적 이슈를 감성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스토리텔링은 관객을 멀리 떼어놓는 대신 캐릭터들에 강하게 이입하도록 만들면서 관객과 인물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교묘하게 계산된 교차편집과 두 단계로 나뉜 진실의 누출은 완고한 나왈의 고향 마을과 무겁게 가라앉은 2009년의 캐나다, 검붉은 화염과 건물의 잔해가 뒹구는 난민 캠프, 무참스런 남부의 감옥을 오가며 서사시적인 광대함을 보여준다. 한번 잘못 연결된 저주의 고리가 걷잡을 수 없는 패륜의 연쇄로 번져가면서 어머니는 냉혈한 테러리스트가, 아들은 흉포한 고문기술자가 되며 형과 아버지는 자웅동체가 되어 나타나는 믿을 수 없는 현실로 귀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잔느가 몰두하는 이론 수학의 원리처럼 명쾌한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이 또 다른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불러오는 진정한 ‘고독의 나라’를 목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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