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이다지도 순진한 영웅
2011-08-18
글 : 김효선 (영화평론가)
뻔뻔해서 오히려 참신한 <퍼스트 어벤져>

노골적인 국가주의, 애국적 순응주의,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 <퍼스트 어벤져>가 일으키는 몇 가지 혐의들은 대부분 영화의 시대착오적인 설정에서 비롯된다. 프랭크 카프라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상주의적인 인물이 성조기 쫄쫄이를 입고 나치 세력에 맞서 싸우며, 정의감과 애국심간의 수상쩍은 공조가 별다른 회의없이 이루어진다. 영화가 2차 세계대전 당대의 이데올로기적인 판단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의 원작이 1941년에 간행을 시작한 <캡틴 아메리카>라는 코믹스이고 주인공이 나치에 대항한 애국적 인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질문의 방향은 조금 달라져야 할 것이다. 왜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웅을 굳이 1940년대 방식으로 노출시키고 있는가? 선과 악의 구분은 분명하고, 주인공은 고리타분할 법한 가치를 우직하게 고수한다. 그는 여타 히어로물의 영웅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에 대해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대적 배경이 상기시키는 평면적인 가치관을 순진하게, 그것도 거침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 뻔뻔함이 오히려 쿨하게 느껴질 정도다. 영화에서 중요한 문제는 당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입장 표명이 아니라, 그것을 이미 명백한 것으로 가뿐히 넘겨버리는 어떤 태도에 있다.

왜소한 체격의 국민 약골 스티브 로저스는 에스카인 박사가 개발한 세럼과 비타 광선으로 근육질의 슈퍼 솔저가 된다. 그러나 악당 레드 스컬이 이끄는 히드라의 요원에게 박사가 살해되면서 스티브는 애초의 의도와 달리 군수물자 공급을 위한 선전전에 동원된다. 성조기 코스튬을 입고, 역시 성조기가 그려진 방패를 든 그의 새 이름은 ‘캡틴 아메리카’. 코러스걸들이 노래하며 춤추는 동안 스티브는 채권을 사도록 장려하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어색하던 대사가 입에 붙을 즈음, 그는 전시 미국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다.

그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히틀러 역할의 배우를 녹다운시키는 몽타주 장면은, 캡틴 아메리카가 히틀러에게 주먹을 날리던 원작의 첫호 표지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는 코믹스가 미국 전역에서 팔려나가며 전쟁 선전을 담당했던 상황에 대한 자기 반영 혹은 일종의 패러디이다. 위문공연 시퀀스는 전쟁 기대주 슈퍼 솔저가 한낱 정치적 선전 도구로 이용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담지만 그렇다고 이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상황을 비난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대목을 유쾌하게 처리해, 관객이 별 불편함 없이 캡틴 아메리카의 공연을 즐기도록 만든다.

허구를 진실로 바꿔버리는 기적?

스티브 역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는 새 업무가 나름의 필요와 정당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전선에서 참전 군인들로부터 야유를 받기 전까지, 그는 묵묵히 역할을 수행한다. 만약 그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더라면 영화는 히어로물의 익숙한 공식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실험대상’이라거나,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거나, ‘선전 도구’일 뿐이라는 식의 인식은 영화에서 항상 타인의 입을 통해서 발설되고, 스티브의 신념은 이같은 지적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단호하며, 놀랍도록 순진하다.

하지만 이 순응적 태도야말로 그를 진짜 영웅으로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스티브가 선전전에 동원되었던 이유는 히드라 요원을 좇는 과정에서 그가 한 아이의 목숨을 구한 사실이 대서특필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술수, 상업적인 필요, 그리고 영웅을 원하는 대중의 욕구가 그의 선의를 소모한 셈이다. 캡틴 아메리카의 쫄쫄이와 방패는 전쟁을 둘러싼 이 기만적인 메커니즘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브루클린 출신의 약골이 전쟁 영웅으로 성장하는 구도 자체가 벤자민 프랭클린식의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하고 있다면 캡틴 아메리카라는 하나의 가상을 마치 실재처럼 소비하는 메커니즘은 미국적 이상의 착란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역전이 일어난다. 스티브는 무대 의상을 입은 채, 코러스걸들의 헬멧까지 훔쳐 쓰고는 적진에 잠입한다. 그리고 성조기가 그려진 방패로 친구를 구하고 수백명의 미군 포로들을 탈출시킨다. ‘히틀러를 (무대 위에서) 200번도 넘게 쓰러뜨린 사람’이라는 그의 농담은 자조가 아닌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허구의 이미지를 가지고 선전의 기만을 진실로 바꾸어버린다. 가짜가 진짜를 가능케 하는 기적. 스티브의 적응력과 낙천주의는 가상에 대한 환멸의 가능성마저 뛰어넘으며 이로써 캡틴 아메리카는 그의 진짜 이름이 된다.

캡틴 아메리카의 활약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실패도 없고, 친구의 죽음을 제외하고는 딱히 갈등도 없다. 러브라인의 오해도 쉽게 풀린다. 영화는 동료들간의 마찰이나 자기 성찰 등으로 시간을 끌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우애가 강조되는 것도 아니다. 용기, 희생정신, 다원주의와 같은 이상적인 가치들이 전면에 드러나지만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복잡한 서사를 첨가하지도 않는다. 영화는 그저 시치미를 뚝 떼고, 진부한 요소들을 오히려 순진하게 밀어붙인다.

이같은 안이한 태도가 끝까지 가능한 이유는, 역시 주인공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약골 스티브는 뉴욕 뒷골목에서 이리저리 얻어터지면서도 건장한 사내들에게 맞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섯번이나 입영 거부를 당했으면서도, 징병 포스터를 보자마자 또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좀 맹목적인 구석이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선하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의 선의는 단 한번의 흔들림도 없다. 입지전적인 성공을 이루어낸 뒤에도 그의 성품은 때묻지 않는다. 스티브의 캐릭터는 평면적이다 못해 인물 자체가 하나의 덕목을 구현하는 알레고리적 인간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이 고지식한 면모가 그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든다. 그의 사명감과 희생정신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때로 살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마저 능가한다. 훈련 도중 수류탄이 굴러오자, 그는 주저없이 몸을 던진다. 땅 위로 납작 엎드린 그의 앙상한 몸은 주변의 모든 의심을 불식시키기고, 박사의 선택에 반대하던 대령의 마음까지 움직인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중요한 고비가 있을 때마다 스티브의 선택은 고민을 거치지 않는다. 그는 맹목적이나, 그 순진함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감동을 준다. 스티브라는 하나의 알레고리는 캡틴 아메리카에 덧입혀진 모든 상징적인 기의를 통과하면서도, 초연히 살아남는다.

연민을 아는 약자의 눈빛

<퍼스트 어벤져>에는 유난히 와이드 앵글의 정석적인 숏들이 두드러진다. 복고적인 형식이 표방하는 정직한 지향성은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명백한 태도와도 연결될 것이다. 영웅들의 숭고한 행위를 드라마틱한 플롯을 거쳐 제시한다면 그들의 선의는 오히려 다른 여러 의미들을 덧입고는 불순해질지도 모른다. 전쟁의 명분과 희생의 가치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설명하는 작품이야말로 전쟁 선전물이 아니었던가? <퍼스트 어벤져>는 복고를 지향하지만 감상적인 향수와는 거리를 둔다. 그리하여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배경과 익숙한 디테일을 가지고서 다소 참신함이 느껴지는, 흥미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빙하에 불시착한 캡틴 아메리카는 결국 한장의 사진으로 남는다. 슈퍼 솔저가 되기 전, 훈련을 하던 스티브의 모습이다. 사진 속 그의 몸은 왜소하고 보잘것없지만, 이 한장의 사진이 주는 울림은 소박하지 않다. 에스카인 박사가 스티브를 선택한 이유는 약자인 그가 힘의 가치와 연민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선함은 그가 약자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성조기 쫄쫄이를 입고 방패를 들었을 때에도 그의 눈빛만큼은 과거 그대로이다. 그 눈빛이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진부한 가치, 착하고 올곧은 마음이다.

국가주의, 순응주의, 이상주의, 영화를 둘러싼 모든 혐의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스티브 로저스의 눈빛만은 아련하게 살아남는다. 바로 이 점이 영화가 원제의 반쪽인 ‘캡틴 아메리카’를 잘라내고 그냥 <퍼스트 어벤져>로 개봉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미국이 아닌 보편을 향하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그럴 법한 근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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