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갑옷도 다 벗어젖히고 민머리로 허겁지겁 산속을 헤매시나요?
=와타루 살랑가 파리돼지앵 에쿠니 가오리.
-무슨 말씀이신지. 만주어를 모르니 독자들을 위해 그냥 한국말로 해주시면….
=나 쥬신타가 우리 위대한 청나라의 왕자님을 죽인 조선놈을 잡으러 왔다는 말이오. 이놈 어디로 도망갔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네. ‘남이’라고 비열하게 못되게 생긴 놈 있소. 다 잡았다가는, 숨 돌리게 딱 5분만 쉬었다 가자고 하는 것에 속아 놓쳐버렸소. 혹 발견하거든 일러주오.
-그런 사람 하나 빨리 못 잡는 거 보니 대 청나라 군대도 어쩔 수 없군요. 게다가 청나라 군대의 활솜씨가 한국의 국궁에는 못 미치나 봅니다. 남이라는 친구는 그래봐야 일개 게릴라에 불과할 뿐인데, 그 한 사람에게 수도 없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나갔으니.
=아니 이런, 우리 만주인의 기상이 그것밖에 안되는 줄 아시오? 우리 청나라의 육량시는 사지를 갈기갈기 찢을 정도로 강한 화살이오. 두세 사람 정도는 한번에 꿰어버릴 수 있다니까. 조선 놈들 전부 꼬치로 꿰어 구워먹으리.
-조선의 곡사는 그보다 더 대단하지요. 활을 태산처럼 받들어 화살은 호랑이의 꼬리처럼 말아서 쏘니 멋지게 휘어서 날아간답니다. 말하자면 낙차 큰 변화구나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적들이 단단히 매복해 있어도 단숨에 목을 관통할 수 있지요.
=제기랄 어쨌건 조선의 운명은 끝났어. 포로들 모두 다 데려가서 죽을 때까지 부려먹을 테니. 결국 너희들은 진 거야. 임금이 남한산성 안에서 베이징 방향을 바라보며 춤까지 췄다니까. 내가 조선 사람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지. 세상에 그런 굴욕이 어디 있담.
-거기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네요. 나라가 지켜주지 못해 포로로 잡혀가 고향을 떠난 사람들. 병자호란이 끝나도 임금은 그들을 송환할 생각조차 않겠지요. 살고 싶거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그저 각자 알아서 돌아와야 될 겁니다.
=내 말이. 압록강을 넘어오는데 조선처럼 국경 수비가 허술한 나라가 없었소. 알아서 성문을 열어주더군. 굳이 육량시를 쓸 필요도 없었지. 제 나라 사람들이 개처럼 끌려가는데 임금과 신하는 성 안에서 말싸움이나 하고 있으니 원. 남이 그놈 꼭 잡아서 가슴팍에 커다란 구멍을 내버려야지. 그럼 마지막 남은 감수성을 함락시키려 이만 일어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