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이 뜨겁고 빠르다. <최종병기 활>이 개봉하고 나면, 아마도 병자호란 당시 사랑하는 여인을 구출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는 청년 서군을 연기한 김무열은 또 다른 의미에서 ‘최종병기’로 떠오를 것이다.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활처럼 사랑을 지키려 물불 가리지 않는 열혈청년 서군은 꽤 매력적이다. 그러나 정작 김무열 본인은, 상영 중인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무대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라 아직까지 관객의 열기를 실감하지 못했다고 했다.
-<최종병기 활>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은 게 언제였나. 첫인상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아마 기억하기로 12월 정도, 눈이 수북이 쌓였을 때였다. 김한민 감독님이 한번 만나자고 부르셔서 시나리오를 읽고 갔다. 일단 재미있었고, 서군이라는 캐릭터도 기존에 자주 맡았던 악역이 아닌 서글서글한 역이라 욕심이 났다. 그리고 감독님을 뵈었는데, 머리를 길게 길러 하나로 땋고 물담배도 갖다놓으시고, 활을 갖고 오시더니 다리 사이에 척 끼워넣고 익숙한 솜씨로 줄을 갈아끼우시더라. 깜짝 놀랐다. (웃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역사 전반에 걸쳐 공부를 많이 하셔서, 거의 역사 선생님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인간적인 모습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서군이라는 인물에 대해선 어떻게 파악했나. 사실 영화 자체로는 남이(박해일)와 쥬신타(류승룡)의 대립구도가 큰 줄기라서 서군은 자칫 약하고 뻔해 보일 수 있는 캐릭터였다.
=나름대로의 드라마가 있다. 자인과 혼인을 할 때까지 그 나이 먹도록 특정한 직업이 없다. (일동 웃음) 아버지는 무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이를테면 한 마을의 지주 느낌으로 뿌리를 깊이 박았다. 그에 비해 서군은 나쁘게 말하면 한량일 수 있고 좀 덜 똑똑해 보일 수 있다. 그러다가 병자호란이 터지면서 지금까지 비행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인물이 아내를 지킬 수 있는 성인 남성으로 변해간다. 그런 드라마를 연기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최종병기 활> 자체는 활을 중심으로 삼는 액션영화지만 서군은 칼을 쓴다.
=서군에게는 칼에 대한 집념이 있다. 처음 청나라 군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서군이 올가미에 목졸려 끌려가면서 “칼… 칼…” 하고 부르짖는 장면이 있다. 혼을 다해 연기했는데, 편집 과정에서 없어졌다. (웃음) 한번 칼을 잡지 않으면 놓지 않는 서군, 이라는 포인트 때문에 들어간 장면이었다.
-사극 액션은 한국영화계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분야다. 도포를 펄럭거리면서 뛰어다니는 연기가 여타의 액션 연기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직접 몸으로 연기한 배우 입장에선 남다를 것 같다.
=현대극에서 강조되는 리얼함의 액션과는 다소 거리가 있긴 하다. 무엇보다 사극에선 실제 살상 무기를 쓴다. 칼과 활과 도리깨가 난무하면서 생사가 쉴새없이 오가는 현장을 담아내야 한다. 중요한 건 매번 그렇게 죽음과 맞선다라는 감정을 놓치면 안된다는 점이다. 배우가 그 감정선을 꼭 붙잡고 가지 않으면, 배우가 그걸 놓는 순간 관객도 그 작품과 편하게 안녕을 고하게 된다. (웃음) 그 부분이 되게 어렵다. 액션은 액션 합대로 맞아야 하고 감정은 감정대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몸동작이 감정에서 비롯되어야 하기 때문에, 액션장면을 찍을 땐 배우들 모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위험한 현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서로 집중하며 매 장면을 찍다보니 큰 사고는 별로 없었다는 게 정말 다행스럽다.
-영화 전반적으로 의외의 코미디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군이 그런 역할을 자주 담당한다. 특히 남이와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관객의 폭소가 터지더라.
=약간의 해학이나 풍자가 있었다. 서군은 병자호란 터지기 전까지는 귀한 집 자식이라는 느낌, 남이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망가져버린 동네 백수 건달 같은 느낌으로 출발한다. 그런 대비에서 오는 웃음이 있었다. 감독님 역시 영화 중간중간 유머가 필요하다고 늘 강조하셨다. 인터뷰 때 많이 나온 얘긴데, 해일이 형이랑은 진짜 술을 마시면서 촬영했다. 원래 해일이 형의 팬이었고 이번에 처음 함께 출연했는데, 연극 무대에 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형이 한번에 오케이낼 생각을 절대 안 한다. “해본 거야 그냥. 어떻게 한번에 잘해. 계속 해보자” 그런다. (웃음)
-러브 라인도 좀 묘하다. 남이와 자인은 어딘지 근친상간적인 느낌까지 자아내는데, 그에 비해 정식 부부인 서군과 자인의 사이는 조금 서먹해 보인다.
=처음에 시나리오 읽을 때 나도 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고, 한지붕 아래서 12년 동안 같이 살았더라도 혼인하기 전이니까 스킨십은 없었을 거다. 약간은 서먹한 사이가 맞는 것 같고 그게 더 재밌는 부분이기도 했다. 막말로 손도 한번 못 잡아봤기 때문에 청나라 군대 연병장까지 쫓아갈 수 있었다는 농담도 주고받았다. (웃음)
-실제 중국에 가서 촬영했나 싶을 정도로 한국 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공간들이 눈에 띈다.
=연기할 땐 그런 현장들로부터도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영화에서 포로로 잡혀간 서군이 남이와 재회하는 장면이 압록강변으로 설정됐는데, 실제 찍은 곳은 빙도라는 섬이다. 강가 근처 땅바닥이 습지대 비슷하게 조성되어 있다. 서 있기만 해도 발을 빼기가 힘들다. 거기서 10일 정도 촬영했는데, 매일 12시간 이상씩 그 물컹한 땅을 밟으니까 포로의 지친 모습이 절로 나오더라. 그냥 앉아 있을 뿐인데 카메라가 막 돌아가도 괜찮을 정도였다. (웃음) 산에서 막 뛰어다녀야 했던 형님들은 더 했을 거다. 아침에 산에 올라갈 때 얼굴과 촬영 마치고 내려올 때 얼굴이 다르더라.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후가 궁금하다. 서군과 자인은 무사히 조선 땅에 돌아올 수 있었을까, 혹시 영화 속 대사처럼 입국이 거절되진 않았을까.
=편집된 장면 중에, 서군과 자인이 남이와 재회하기 전에 한번 압록강변에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청나라로 한번 넘어간 사람은 더이상 조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그러니까 두 번째로 압록강변에 가는 거다. 앞서의 교감이 있었으니 받아주지 않았을까, 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나라 정책이 그러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순 없었겠으나,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와 드라마는 아무래도 무대에서보다 소재의 제약도 많고, 젊은 남자배우들에게 가는 역할의 폭이 조금 좁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유는 거의 없는 게 맞다. (웃음) 영화와 드라마쪽에선 개인적으로 나만의 대의를 가져가려고 한다. 안 해본 역할, 어떻게든 끌리는 지점이 있는 역할을 중요시한다. 어떤 캐릭터든 이미 예전에 한번 써먹은 캐릭터다. 대신 그걸 김무열이 하면 어떻게 달라질까, 그게 스스로도 궁금한 거다. 지금 출연 얘기가 오가는 저예산영화가 한편 있는데, <저수지의 개들> 같은 스타일이고 찌질한 지역 양아치 느낌의 배역이다. 그런 안 해본 장르와 역할에 대한 욕심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얼마만큼 좋아하며 담그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뮤지컬과 영화, 드라마를 계속 병행하는 이유도 매체마다 맡은 역할들이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욕심이 과욕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대 내내 뮤지컬부터 시작하여 쉴새없이 수많은 작품을 누볐다. 가장 고비였다고 느낀 순간은.
=재수를 할 때다. 안양예고 시절 내내 밤새 연기만 하고 세트 만들면서 살았는데, 대학교를 떨어질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거다. 엄청 충격이었다. 1년 내내 동네에서 별의별 짓을 다 하며 살았다. 20대 내내 연기를 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에 맞닥뜨렸다. 현실적으로 돈을 벌어야 하는 나이가 다가오는데, 별로 유명하지 않은 배우로서는 그런 수입을 꿈도 꿀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만 생각할 수 있도록, 이기적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준 토대가 바로 그 방황하던 재수 시절이다.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 중 지금까지 연기를 계속하는 친구는 10명 남짓이다. 나머지는 다 연기를 포기했다. 왜 그랬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실 웬만한 일들엔 다 면역이 되어버린 것도 고민이다. 배우가 감정이 풍부해야 하는데 너무 둔감해지고 있지 않나 싶어,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삶의 변화, 그런 전환점이 배우로 살아가는 데 밑바탕이 된다는 걸 갈수록 절감한다.
-차기작 계획은.
=9월 중순까지 LG아트센터에서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아까 말한 영화 얘기가 계속 오가는 중이고. 아참, 그리고 <최종병기 활>뿐 아니라 이번 여름에 개봉한 한국영화 모두 잘됐으면 좋겠다.
-아니, 개봉을 앞두고 그렇게 공식적인 멘트를 하다니!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