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오빠가 있다’의 시대가 돌아왔구나
2011-09-01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불편한 내셔널리즘이나 거대이념을 강요하지 않는 <최종병기 활>의 미덕

역적의 남매가 자란다. 누이의 결혼식 날 청군이 쳐들어와 누이를 데려간다. 오빠는 활 하나 들고 누이를 찾아 만주로 간다. 영화는 이리도 간단하다. 인조반정, 병자호란이라는 거대 역사를 병풍 삼고 있지만 도대체 중앙의 권력에는 관심조차 없다. 반정과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낸 남이와 자인 남매에게 나라와 임금은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남이가 전쟁에 나선 이유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다. <최종병기 활>에서 국가나 중앙정치 같은 커다란 추상은 그리 중요치 않다.

병자호란은 일본 식민지배 경험과 더불어 한국인에게 가장 큰 정서적 충격을 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임경업전>이나 <박씨전> 같은 영웅군담소설이 인기를 누렸다. 이들은 참담히 패배한 전쟁에 대한 사후적 위로이자 민중의 소망을 반영한 판타지였다. 마찬가지로 일제 지배가 끝난 이후 각종 대륙(만주) 소설과 영화들은 독립군의 일본군 토벌이라는 각색된 서사를 통해 강압 지배에 대한 소급적 대리만족을 얻었다. <최종병기 활>은 이러한 환상적 대리만족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역사적 수난기를 다룬 서사들이 가지고 있는 기층민의 소망을 담아내는 데는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영화는 중앙의 역사와 분리된 채 정념으로 움직이는 인간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포착해낸다.

영화는 자인(문채원)이 결혼하기까지의 전반부와 결혼식 날 잡혀간 누이를 찾아 남이(박해일)가 만주로 가는 후반부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다소 지루하고 일관성 없게 진행되어 영화가 어디로 갈지 묘연했다. 남이가 자인을 찾아 나서는 순간부턴 집중도와 속도가 붙어서 탄력있게 전개되었다. 이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인상적 장면이 등장하는데, 늘 빗맞는 듯 보이던 과녁의 뒤편에 곡사(휘어진 방향으로 뻗는 활)를 위한 진짜 과녁이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넓게 영화의 결말과 이어질 뿐 아니라 좁게는 남이라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늘 ‘그 너머’를 보고 있는 신중함을 지닌 인물임을 암시하고 있는 장면이 된다.

국가와 민족보다 중요한 형제애

이후 영화는 남이의 자인 구출과 적장 쥬신타(류승룡)의 남이 추적 부분으로 이어진다. 주된 내러티브(성장-결혼-납치-탈출)는 대개 진부하고 단순하며 우연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서사에 힘을 빼고 소재의 질감과 활극적 쾌감에 집중하면서 활력을 찾는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대중의 평가와 반응은 이 후반부에서의 극적 몰입도에 근거할 것이다. <최종병기 활>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명민하게 포착했다. 이제는 공중파와 케이블에 흔해져버린 때깔 고운 팩션 스타일을 피할 것, 멜로가 강화되면 디테일이 흐려지니 장르적 본분에 충실할 것, 리얼리티를 살려 고증하되 수다스럽게 설명하지 말고 곧바로 액션에 돌입할 것. 이리하여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과묵해지는 동시에 역동적으로 진행된다. 묘사하지 않고 행동하며 그리하여 끝까지 관객은 긴장하게 된다.

인조와 홍타이지(청 태종), 남한산성과 삼전도 굴욕 같은 중앙의 역사는 여기서 중요치 않다. 자인과 서군의 멜로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영화를 움직이는 것은 민족도 권력도 아닌 일차적 혈연에서 나오는 강한 애정과 복수심이다. 남이는 누이를 구하기 위해 청군을 추적하고, 쥬신타는 조카인 왕자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남이를 추적한다. 전쟁영화라기보다 추적의 영화이기에 대규모 전투장면보다는 추격장면에 공을 들였다. 영화에는 다소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남매의 과도한 상호 애착과 암시적으로 설정된 쥬신타와 노가미(오타니 료헤이)의 모호한 관계가 설정되었다. 감독에 의하면 말 못하는 대신 다른 촉이 발달한 노가미라는 캐릭터는 쥬신타와 다소 동성애적 느낌을 보이는 인물이라 한다. 쥬신타와 함께 남이를 쫓는 니루(청나라 정예부대)는 모두 강한 형제애로 묶여 있는데, 이도 느슨하게 보면 같은 맥락에 있을 듯하다. 마초적이며 불굴의 끈기를 지닌 적장 쥬신타 역할의 류승룡은 강하고 섬세하며 우아한 품격의 연기를 선보여 TV드라마 <개인의 취향>에 이어 이색적인 퀴어 캐릭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영화는 멜로와 적대를 주된 동기로 설정하지 않았고 역사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큰 폼을 잡지도 않았다. 더불어 민족주의, 반전(反戰) 같은 보편적이지만 피상적 양념에 그치기 쉬운 달콤한 주제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는 한편 궁술, 기마 전투신, 만주어 등 리얼리티를 살렸지만 영화적 스펙터클과 실감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세부에 공을 들였다. 리얼한 연기를 위해 만주어를 학습하고 복원하는 열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만주어는 현재 사어가 되어 있고 문헌과 어휘만 남아 있다. 대륙 무장들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만주어 어휘에 인접어인 몽골어의 억양을 섞어서 현실감을 더했다고 한다. 청나라 정예부대로 설정된 ‘니루’의 원의미는 ‘화살’이라고 한다. 그만큼 만주족에게 활이란 전쟁의 기본 상징이라는 의미다. 한민족도 만주족도 모두 북방의 후예들로 기마궁술에 익숙하다. 영화는 중간중간에 적들과 우리의 근원이 같은 곳에 있다는 묘한 암시를 흩뿌려놓았다. 화살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든지 호랑이 경계 표식이 같다든가 하는 방식을 통해 적이지만 묘한 연대감을 암시해두었다.

남이와 쥬신타 모두를 움직이는 것은 중앙의 논리라기보다 각자가 지닌 정념과 넓은 의미의 형제애(siblinghood), 다시 말해 상부하달식의 이념이 아니라 수평적인 연대감이다. 이 영화가 은폐하고 억압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수평적 연대성에 기반한 근친과 동성애라는 다소 도착적인 요소들이다. 설정은 있지만 애써 이를 억압하는 난감한 서사로 인해 영화는 대중적 기반을 마련했겠지만 동시에 이러한 억압을 통해 영화는 깊이 없는 범작에 그치게 된 한계에 머문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준다. 영화 곳곳에는 작위적인 설정이 보이기도 한다. 결혼식 날 청군이 쳐들어오는 설정은 청군이 출격 열흘 만에 개성에 도달했으며, 수도 한양에서도 하루 전에야 조정에 그 사실이 전달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참고로 하면 넘어갈 만하다. 남이가 자인을 구하기 위해 홀로 청군에 맞선다는 과도한 설정을 위해 주변에서 희생되는 인물들의 뻔한 방식이나 고전적인 꽃신 모티브 등은 소박을 넘어 투박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영화는 자신의 목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데 있다는 목표에만 충실하려는 듯 서사적 투박함을 짐짓 무시하고 앞으로만 나아간다.

과묵함이 미덕이다

내러티브의 적절성을 위해 많은 설명을 하지 않기에 영화는 과묵하다. 그것이 내러티브의 거친 면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 영화는 시끌벅적한 전장의 영화라기보다 긴장감 있는 추격의 영화인데, 최근 한국형 스릴러의 긴박감에 길든 대중의 구미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추격의 디자인을 잘 짰기 때문으로 보인다. 더불어 남이와 쥬신타라는 쟁쟁한 맞수를 설정함으로써 영화적 균형감을 살렸다. 박해일은 눈이 깊은 배우다. 흔들리지 않는 동공으로 목표를 조준하는 신궁 남이의 역할에 제격이었다. 적군인 청군 니루들의 개성은 더욱 확실하게 살았다. 영화의 가장 진중한 힘은 넉살 좋지만 속 깊은 신궁 남이와 막강한 쌍을 이루며 확실한 공감대와 지지를 얻는 적장 바질러 역의 류승룡의 육중한 연기력에서 나왔다. 끝까지 살아남는 다소 비개연적인 설정 속에서도 그 확고한 캐릭터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서사의 부족을 존재감으로 상쇄했다.

이들 남이와 쥬신타를 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국가라는 추상이 아니라 혈육의 직접성과 남매애/형제애였다. 국가간의 전쟁을 다루면서 개인의 사정을 통해 전쟁의 세부를 그려내는 이러한 경향은 근래의 개인 자경단 영화나 사적 복수물들과 맥락이 닿아 있는 한편 불편한 내셔널리즘이나 거대이념을 강요하지 않는 세련된 내러티브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또한 고요하고 역동적인 솔로액션물의 특성은 <아저씨> 이후 한국 스릴러에서 그다지 낯선 현상이 아니다. 국가와 민족 건설기에는 아버지의 위상이 강화되고, 민족 수난기에는 고아 남매의 수난과 오빠의 역할이 부상된다. 민족 수난기나 경제 불황기에 부활하는 ‘오빠가 있다’류의 남매 내러티브가 오랜만에 등장했다는 것에 대해서 영화사적으로 한번 음미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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