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트시네마의 여름 기획전 ‘씨네 바캉스’에서 인상 깊게 본 영화 이야기를 하려 한다. ‘마이클 치미노 특별전’에 편성된 <천국의 문>(1980)이다. 치미노의 웅대한 야망이 장장 세 시간을 훌쩍 넘기는 서사시로 귀결된 <천국의 문>을 스크린으로 접했을 때의 느낌은 확실히 남달랐다. 짐작으로는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에 필적하는 감흥이라고 여겨진다. 10여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흥분은 거반 쉬이 들뜨고 과장하기 십상인 젊은 날의 감수성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바탕은 별스럽지 않은 소재(<천국의 문>은 웨스턴 장르의 현대적 변주로 편리하게 도식화할 수 있다)를 한껏 과장한 예술적 허세에서 유발되는 낯섦, 제작과정의 난맥상이 야기한 불균질한 기괴미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더하여 영화 한편으로 평생 지워질 수 없는 낙인이 찍힌 야심만만한 예술가 치미노의 불운이 영화의 신화화에 한몫했으리라 치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주받은 운명 탓에 도리어 평가절하된 측면이 있는 <천국의 문>의 실질은 미국적 자본주의 문명의 발아와 습속을 거대 서사와 적확한 스타일로 조형한, 전율적인 감동의 영화였다.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마이클 치미노에게 이토록 무모한 창작의 자유를 허락했던 유일무이한 그의 성공작 <디어 헌터>(1972)와 같이 <천국의 문>은 미국 신화에 반역의 자세로 선 영화다. 텍스트의 사상적, 철학적 기반이나 작풍으로 보건대 동시대 최고 걸작인 테렌스 맬릭의 <황무지>(1973)나 <천국의 나날들>(1978)에 견줄 만한 성취를 보여준다. 최초의 정치적 베트남전 영화였던 <디어 헌터>의 영향력 아래 놓인 <천국의 문>은 성패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영화다. 듬성듬성 건너뛰는 이야기와 투박한 서사의 전개는 이 영화가 치렀던, 전쟁에 가까운 제작과정의 속사정을 짐작게 했지만 한 젊은 예술가의 강박이 야기한 재앙을 부풀리기 앞서 텍스트의 원대한 미의식이 압도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 절경을 찬찬히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70년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끄트머리에서 발아한(영화의 아이디어는 1971년에 치미노의 머리에서 이미 수립되었다) <천국의 문>에서 치미노는 사멸한 서부극의 전통을 되살리면서 미국적 자본주의의 근간을 탈신화화하기 위해 알레고리 서사의 힘을 빌린다.
이야기는 19세기 말 와이오밍주의 이민자 정착촌 존슨 카운티 지역을 물들인 백인 지주들과 이민자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후일 역사학자 프레데릭 잭슨이 “존슨 카운티 전쟁이 끝나고 난 일년 뒤 프런티어 정신의 종말이 도래했다”라고 했을 정도로 존슨 카운티 전쟁은 한 세기의 종말과 또 다른 세기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인 이벤트였다. <천국의 문>에서는 문명과 야만, 이산과 정착, 지배와 억압 따위의 이항대립이 소환되어 이 신화적 서사의 축을 이룬다. 한때 평화롭고 단란했던 외지 촌락을 장악한 흉흉한 풍설을 탐문하면서 이민자들 편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안관 제임스 에이버리(크리스 크리스토퍼슨)는 이 공동체가 상상 이상으로 패악의 소굴로 변질되어가고 있음을 절감한다. 앵글로 색슨계 백인들의 또 다른 백인 이민자들(주로 러시아계)에 대한 인종 청소 작업을 감지한 제임스는 이주민들에 대한 살생부가 버젓이 나돌자 지주들이 학살극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면서 문제해결에 골몰한다. 여기에 이민자 출신으로 토호 지주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살인청부업자 네이트 챔피언(크리스토퍼 워컨), 제임스와 네이트 사이에서 미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프랑스 이민자 창녀 엘라(이자벨 위페르)가 갈등의 역학에 가담한다.
1980년 개봉 당시 비평가들과 박스오피스에서 당한 수모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문>은 프로덕션의 완성도뿐 아니라 자기 반영적 장르의 원형적 알레고리와 시네마틱한 스타일의 원숙미가 높은 경지에 오른 걸작으로 보였다. 이민자들을 억압하는 정착민 지주들과 이에 대한 저항을 기둥 줄거리로 한 이야기는 노골적으로 웨스턴풍이다. 당대의 평론가들은 서사의 치밀함이나 이야기 전개의 완결성 면에서는 투박하기 짝이 없어 영화가 끝난 뒤엔 듬성듬성 기워진 누더기를 감상한 것 같은 찜찜함이 남는다며 맹공을 가했다. 이번 특별전에서 상영된 219분 길이의 판본은 최초 공개된 버전으로 평론가들의 질책이 집중되었던 바로 그 버전이다. 그러나 <천국의 문>은 고전적 서사 구축의 입론을 따르기보다 미국의 뿌리에 대한 신화적 알레고리에 몰두한다. 존슨 카운티 전쟁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각색한 이 영화의 서사와 스타일을 주관하는 것은 서부극 장르에 고유한 대립적 갈등이다. 스톡그로워(stock-grower) 조합과 이민자 농부들, 두 집단 사이의 갈등과 투쟁은 달리 보면 부자와 빈자, 최초 정착민과 후발 이민자, 문명과 야만, 자연과 법 사이의 대립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 미국사회와 그 역사적 토대에 대해 극도로 염세적인 비전을 제시하여 관객과 평론가들을 충격에 빠뜨린 치미노의 암울한 비전은 스탠리 큐브릭의 편벽증과 샘 페킨파 영화의 자멸적 어조를 섞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큐브릭과 페킨파뿐 아니라 리들리 스콧, 브라이언 드 팔마 같은 스타일의 대가들과 마찬가지로 치미노에게도 장르의 시각적 아이디어를 통해 오디오 비주얼한 이미지의 파토스를 연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뚜렷이 읽힌다.
<천국의 문>은 신화적 서사의 구성적 조직과 그것을 받침하는 형식의 화용이 돋보이는 영화다. 따라서 영화에는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장면들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명징하게 뇌리에 남는 첫 번째 살해신.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1968)에서 헨리 폰다의 등장을 연상케 하는 이 장면은 가축을 노획한 대가로 죽임을 당하는 농부와 냉혈한 청부살인자 네이트의 첫 번째 이미지를 보여준다. 자신이 도륙한 소와 같은 처지가 되는 러시아계 이민자의 참혹한 몰골은 완전한 침묵 속에서 시적으로 연출되었다. 치미노는 킬러 네이트를 즉각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바람에 살랑대는 캔버스 안에 실루엣으로 보이도록 감추면서 순간순간 서스펜스를 조성한다. 침묵과 은닉의 방식으로 장면을 연출한 치미노의 영화적 스타일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정교한 자연광 사용이나 커팅의 타이밍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팽개치지 않으면서 우아한 시정에 도달하는 스타일에 정통한 작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알레고리 서사의 건축적 미장센
평론가 미셸 시망이 사회자로 나선 파리의 한 마스터클래스 행사에서 마이클 치미노는 <천국의 문>을 존 포드의 서부극에 견주었다. “존 포드는 위대한 영화는 세 가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항상 말했다. 달리는 말과 우뚝 솟은 산, 그리고 춤추는 커플. 나는 전적으로 포드의 생각에 동의한다. <천국의 문>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들어 있다.” 위대한 영화의 조건을 온전히 충족시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국의 문>의 파노라마적 풍경 숏과 반복되는 댄스 시퀀스는 휘황한 겉치레로 소비되지 않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회화적 구도에 따른 프레임 구성과 카메라의 움직임을 관장하는 것은 원(circle)의 모티브다. 원의 도상은 공동체적 일체감 또는 배타적 경계 짓기를 시각화하는 건축적 미장센으로 쓰인다.
이와 관련하여 원형의 운동 역학에 따라 조성된 세 장면이 눈길을 끈다. 하버드의 졸업식이 끝난 뒤 잔디밭에서 펼쳐지는 군무를 전경화한 프롤로그, 제임스의 친구 존 브리지스(제프 브리지스)가 운영하는 ‘천국의 문’ 살롱에서 벌어지는 롤러스케이트 댄스 시퀀스, 그리고 조합과 이민자들이 맞선 살풍경한 최후의 전투. 프레임의 구도나 연출 방식에서 일관되어 있는 세 장면의 연출은 치미노의 작가적 역량을 입증한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흐르는 프롤로그에서 쌍을 이룬 커플들은 하버드대학 앞뜰에서 정력적으로 춤을 춘다. 1870년으로 설정된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의 내전이 끝난 직후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세상을 휩쓸고 있을 때다. 여섯대의 카메라로 찍은 이 시퀀스는 정확히 3분여간 지속되고 1분 반 정도로 구성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슈트라우스의 왈츠는 정상적인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연주되고 있다. 엄청난 속도와 압도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앞 단락은 중심부 나무 주변을 빙빙 돌며 원을 이루는 무리들, 주인공 제임스와 친구 빌리(존 허트)가 파트너를 바꿔가며 추는 빠른 템포의 왈츠를 교차하며 빠르게 편집된다. 두 번째 단락은 졸업 의식의 마지막 순서로 학생들이 나무 주변에 운집해 가장 처음으로 꽃다발을 쟁취하려 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춤을 멈춘 졸업생들은 둘로 나뉘어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두 개의 동심원(미클로시 얀초의 영화를 보고 있다는 데자뷔가 드는 장면이다)을 만든다. 나무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이 시퀀스에서 인물들의 동선과 카메라의 움직임은 원의 형상을 이룬다. 다분히 상징적이고 제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이 첫 번째 원형의 운동은 세상이 완악한 전쟁에 휘말리기 전 충만한 공동체적 일체감을 시각화한다.
70년대 영화에서 춤은 그것을 실행하는 방식과 연출에 따라 유용한 표현 수단이 되었다. 치미노 자신의 <디어 헌터>나 코폴라의 <대부>(1972), <거미의 계략>(1970), <순응자>(1971),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1900년>(1976) 등 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라고 할 만한 베르톨루치의 많은 영화들이 입증하는 것처럼 춤은 단지 스펙터클로서의 쓰임에 머무르기 전에 영화를 관통하는 긴요한 의미 맥락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천국의 문>에서도 춤은 원의 도상과 함께 공동체적인 기운이 약동하고, 변질되고, 마침내 괴멸되는 과정을 은유하는 장치로 쓰인다. 이와 관련해 롤러스케이트 댄스 시퀀스는 프롤로그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 시퀀스에서의 정서적 일체감은 공동의 제의와 규율, 독자적 질서를 가진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프롤로그의 집단 군무에서는 모든 이들이 원형으로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며 움직이지만 여기서는 한 소년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원을 만들면서 플로어를 돈다. 10분여에 달하는 이 시퀀스 역시 두 단락으로 나뉜다. 살롱에 모인 이민자들이 흥겨운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1부와 완연히 다른 시간대로 전환하여 제임스와 엘라가 낭만적인 사랑의 완성을 예감하게 하는 커플 댄스를 추는 2부다. 공동체의 합일을 경축하는 1부는 장대한 규모뿐 아니라 정교하게 계산된 연출로 눈길을 끈다. 밴드의 미소년 리더가 바이올린을 조율하고 군중을 가로질러 원을 그리며 스케이팅을 시작하고 그를 따라 카메라가 이동하기 시작한다. 치미노의 카메라는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이들에 대한 청중의 박수갈채가 한숏 안에 잡힐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전방에서 빠르게 움직인다.
현기증을 느낄 만큼 아찔한 속도감으로 안내하는 이 퍼포먼스와 관련해 특이한 점은 내러티브적으로 그 장면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춤을 영화에 삽입할 때 가장 편리한 것은 결혼이나 크리스마스, 마을 축제 따위의 설정이지만 이 장면에는 누군가의 결혼식이나 집단의 기념일 따위의 어떤 이벤트적인 설정도 들어가 있지 않다. 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별안간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원을 그리며 흥에 겨워 하는가. 2부의 시작은 더 느닷없다. 시간의 단절이나 생략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이 낭만적인 분위기로 급작스럽게 전환되면서 제임스와 엘라가 그들만의 시간을 보낸다. 창녀와 보안관 사이의 센티멘털리즘은 웨스턴 서사의 전형으로부터 차용된 완벽하게 신화적인 설정이다. 또한 후끈 달아오르는 열기를 뿜어내는 존의 살롱은 후일 살생부에 적힌 사람들을 공표하면서 대혼란이 야기되는 장소와 같은 곳이다. 공동체의 끈끈한 유대와 그 괴멸의 풍경을 한 장소 안에서 처리하면서 극단적인 아이러니를 연출하고 있다. 내러티브 안에서 실제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고 긴 러닝타임을 더 장황하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인 이 장면들은 세계의 합일과 균열, 그리고 무참스런 붕괴를 함축하는 알레고리적 표현을 위해 거기에 삽입되어 있다.
프롤로그로부터 시작된 원형의 도상 모티브는 조합과 이민자 저항군이 맞서는 최후 전투 장면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결말부 전투 시퀀스 역시 나무 주변에 진지를 구축한 조합의 용병들을 포위하고 이민자들이 로마식 원형 대형으로 저들을 포위하고 진격해오는 1부와 이민자들이 승리하기 직전 프랭크 칸톤이 이끄는 기병대가 개입하여 원으로 주변을 감싸며 군령을 선포하는 2부로 나뉜다. 여기서 원의 구도는 타자의 출입을 불허하는 배타적 경계의 모습으로 바뀐다. 사회적 제의를 신화와 결합시킨 이 장황한 이야기를 묶어내는 것은 이처럼 일관성있게 설계된 시각적 디자인이다. 치미노의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농장과 매음굴, 넓은 서부의 평원을 가로지르는 존슨 카운티의 문화와 이 선과 악의 가치가 뒤엉킨 다질적 공동체를 장악한 윤리적 모호함과 카오스를 체험하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는 5시간이 넘었다는 치미노의 최초 편집본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뭉클 솟구쳤다. <천국의 문>에서 그가 보여준 야심은 최소한 이 영화가 야기한 스캔들 이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감독으로서 권한을 남용하고 책임을 방기했다는 야유에 시달린 이 역작은 당대 할리우드의 규범에서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도전이었다. 산업적이고 문화적인 고려에 밀려 수용되는 영화 만들기의 여러 조건들에 대한 타협 없이 예술가의 창의와 강박이 도달할 수 있었던 최상급의 야망을 실현하려 한 영화로 <천국의 문>은 기억될 것이다. 요즈막에 영화가 잃어버리고 있는 문학적 깊이와 서사적 비주얼의 위엄, 시네마틱한 작가의 자의식을 느낄 수 있는 <천국의 문>은 지금에 와선 당시와는 완연히 다른 영역에 놓일 수 있는 혁신적 텍스트다. 야만적인 역사와 인간성의 모호함에 대한 감상적인 기술, 초인적인 영화 만들기의 범례를 보여주면서 오래된 영화에 대한 향수와 영감을 자아내는 경이로운 괴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