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미술관 앞의 나무. 시각에도 관성이 있나보다. 그림을 구경하다 나온 눈은 무심코 나무한테서도 태도와 표정을 찾는다. 줄기가 잎을 지탱하는지 잎이 줄기를 버티고 있는지 분별할 수 없다. 쓰기 위해 생활하는지 생활하기 위해 쓰는지 흐릿한 날이 있는 것처럼.
8월9일
유인원이 혁명에 성공한 미래가 왔다고 치자. A.A.(After Ape) 100년경 출생한 영화사 연구자 찰튼 시저 3세는 시네마테크에서 2011년 여름의 사료를 뒤적이며 “호모 사피엔스가 자랑하던 할리우드의 창의력은 이즈음 고갈의 징후를 보였다”고 결론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부심어린 한줄의 메모를 덧붙일 수도 있겠다. “단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개중 돋보였다.” 확정된 시작도 끝도 없는, 즉, 총체적 설계가 유예된 프리퀄과 속편으로 포화 상태를 이룬 2011년 할리우드를 보면 적어도 주류 오락영화에서는 브랜드와 코드가 마침내 창작자(auteur)를 대체한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는,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연작의 전통적 의미를 벗고, 일정한 컨셉을 변주 및 중첩하는 작업이 되어버린 인상이다. 이 현상이 미학적으로 바람직한가에 관한 판단과 무관하게,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전통적인 영화 액션의 쾌감과 드라마를 보존해 올여름 대작 오락영화 가운데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상대적으로 낮았던 기대치를 상기하면 다크호스라는 용어를 한시적이나마 ‘다크멍키’로 바꿔 써야 도리가 아니겠나 잠깐 고민할 정도다.
동물의 생김새와 움직임이 아름답다고 감탄한 적이 무수하지만 영장류만큼은 예외였다. 내가 속한 종인 인간과 닮은 까닭에 진화가 덜된 인간의 불완전한 형태라는 무의식이 작용한 것 같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그 편향된 미감을 걷어주었다. 침팬지와 오랑우탄, 고릴라들이 긴 팔을 늘어뜨리고 비스듬한 각도로 전진하는 광경, 일견 느린 듯 공간을 척척 접어버리는 움직임, 뛰는 것도 나는 것도 아닌 그들의 종횡무진은 스파이더맨의 활강과는 다른 중량감을 발휘하며 눈을 휘어잡았다. 샌프란시스코 주택가의 활엽 가로수들이 그들의 이동에 따라 우수수 잎을 떨어뜨리는 간접적 장면과 내가 본 영화 속 어떤 금문교 신보다 압도적이었던 클라이맥스가 두 표본이다. 금문교에서 기마경찰의 말을 빼앗아 탄 주인공 침팬지 시저(앤디 서키스)의 이미지는 여태 접한 모든 회화와 조각 속 반인반마가 몽땅 가짜처럼 느껴질 만큼 강렬했다. 켄타우로스가 고대 신화에서 본디 인간의 동물적 속성을 상징했던 존재였으므로, 원숭이와 말이 혼연일체가 된 모습이 반인반마의 그것보다 진정한 켄타우로스의 형상으로 보인 건 당연한 노릇일 수도 있다. 말을 탄 시저에겐 지성적 위엄이 넘쳤다. 영웅 아킬레스의 스승이었다던 켄타우로스 키론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루퍼트 와이어트의 프리퀄은 1968년 오리지널이 시작한 지점까지 마저 달려가지 않고, 어떤 전망을 제공하는 지점에서 간격을 두고 멈춘다. 인간이 왜 멸종 위기에 몰리고 유인원이 헤게모니를 잡았는지 충분한 암시를 주는 데에 그친다. 결말부에서 삼나무 숲 우듬지에 올라 샌프란시스코 시가지를 바라보는 시저의 시야처럼. 현재 흥행 추이를 보건대 어림없는 소망이 확실하지만 관객인 나는 성찰과 상상을 허용하는 그 빈틈이 굳이 메워지지 않기를 은근히 바란다. 이 영화가 보여준 유인원의 강점은, (돌연변이로) 인간만한 지성을 갖췄으나 쓸데없는 말과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이제 인간의 진보는 뭘 더하는 것보다 불필요한 짓을 덜 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교훈이 아닐까.
8월10일
오늘은 어제 본 영화의 인간을 생각해본다. 본의 아니게 인류의 운명을 뒤바꾼 과학자로 나온 제임스 프랑코는 아직 배우로서보다 셀레브리티로서 흥미롭고, 그 연인인 수의사로 분한 프리다 핀토는 고혹적이지만 그게 전부다. <해리 포터> 시리즈로 알려진 톰 펠튼의 캐릭터는 딱 드레이코 말포이가 샌프란시스코 영장류 보호소에 취직하면 할 법한 행동을 하고 보호소장 역의 브라이언 콕스는 <엑스맨>과 <본> 시리즈에 이어 미심쩍고 사악한 기관을 운영하고 있으니 이건 좀 너무 무성의한 캐스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호모 사피엔스 캐릭터의 심심함은 어느 종이 이 ‘창세기’의 주역인지 분명히 못 박기 위해 의도된 설계일 수도 있다.
크레딧에서 제임스 프랑코보다 먼저 이름이 나오는 것이 온당할 시저 역의 앤디 서키스(<반지의 제왕> <킹콩>)는 조만간 (어쩌면 이미) 영화과 논문 주제로 각광받을 법하다. 오랫동안 양념과 어릿광대 구실에 그쳤던 CGI 캐릭터를 필마단기로 드라마틱한 주연으로 끌어올린 이름이므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그는 침팬지의 행태를 감쪽같이 모방할 뿐 아니라 딜레마에 빠진 신동 캐릭터를 호연한다. 앤디 서키스는 섬세한 표현력을 갖췄으나 주류 장르인 로맨스와 액션의 주역이 될 수 없는 신체조건의 배우가 퍼포먼스 캡처를 빌려 얼굴 없는 히어로(아직 스타라고 쓸 수는 없다)로 자리잡은 첫 사례다. 이 분야의 베테랑이 된 그는 70년대 배우들의 두꺼운 라텍스 분장과 털옷에 비해 퍼포먼스 캡처 방식이 자유롭고 쾌적한 연기 환경을 제공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모든 배우가 거기에 동의할지는 다소 의문이다. 분장과 의상이 배우에게 불어넣는 정체감과 자기 최면은 연기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전통이므로.
8월11일
배우가 아닌 관객에게 퍼포먼스 캡처가 끼치는 영향 중 적어도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이 기술로 말미암아 오늘날 관객은 인간보다 인간적인 다른 종족에게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 서슴없이, 강력하게 동일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이족이 인간을 패퇴시키도록 응원할 수도 있게 됐다. 이 맥락에서 <아바타>와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서사와 테크놀로지가 가장 깊이 밀착된 경우다. 육체는 기획과 기술에 따라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를 은연중에 파급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퍼포먼스 캡처는 성형과 보디빌딩, ‘세컨드 라이프’ 게임과 교집합이 있다.
8월13일
보호해줄 중앙정부 따위는 없다. 법은 저만치 멀리 있으니, 관건은 개인의 윤리와 의지다. 돌아갈 마을은 불타버렸다. 싸움은 국경이 아니라 국경 너머에서 불붙는다. 극중 인물들은 빈번히 어떤 ‘강’을 목적지로 입에 올리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흙먼지 이는 황야를 무대로 한다. 이상 나열한 관습과 기호가 가리키는 장르는 웨스턴이며 <최종병기 활>은 놀랄 만큼 서부극의 내규를 따른다. 달리 말해 <최종병기 활>은 <무사>와 <좋은 놈, 나쁜놈, 이상한 놈>이 심중에 품었으나 시원스레 풀어내지 못한 장르적 쾌감의 구상을 꽤 만족스럽게 실현한다. 성패는 서사를 맺고 푸는 수순과 액션의 스타일을 드라마와 맞물려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요령의 차이에서 갈린다. 귀향길에 만난 공주를 지키고 토성에서 옥쇄하는 <무사>가 전쟁영화와 무협 사이에서 망설이며 지쳐갔다면 <최종병기 활>은 훨씬 단순한 과제를 안고 기동력을 발휘한다. 보물지도를 찾아 쫓고 쫓기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어느 순간 나침반을 잃은 채 과거 뛰어난 웨스턴의 총격전을 재연했다면 <최종병기 활>의 동선은 선명하고 활 액션은 소박하나 참신하다. 화살의 궤적과 시위 당기는 법을 솔깃하게 묘사하고, 적중의 순간을 우리가 아는 가늘고 날카로운 물체의 찌름이 아니라 돌팔매로 후려치듯 묵직한 타격으로 그림으로써 관심을 끌어낸다. 캐릭터가 끌어가는 영화냐 사건이 밀어가는 영화냐 묻는다면 <최종병기 활>은, 단연 후자다. 꽤 미묘한 삼각관계를 중심에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시나리오는 남매애와 부부애를 명확히 다루거나 서사로 밀어주지 않는다. 대신 관객이 은근히 지겨워해온 상투적 하위플롯과 인물 묘사를 요령껏 피하는 자잘한 포석에 정성을 들인다. 장담할 수 있는 사실 하나. 연말까지 다섯달이나 남았지만 보나마나 ‘올해의 오빠상’은 <최종병기 활>의 남이(박해일)가 따놓은 당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