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보라. 당신은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고의 거장 중 한명의 아들이다. 그런데 첫 번째 영화가 완전히 실패했다. 사람들은 재능도 없는 놈이 거장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출세했다고 떠들어댄다. 당신이라면 두 번째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는 주저앉지 않고 다시 돌아왔고, 지브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두 번째 영화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완성했다. 거장의 아들에게 서면으로 물었다.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나?” 대답이 돌아왔다. “O와 X였다. ‘다소는 인정을 받은 건가?’라고 생각했다.”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이하 <게드전기>)이 나왔을 때 회의적인 반응들이 나온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작의 평가로 인한 부담감이 있었나.
=당시 ‘이제 눈에 띄는 짓은 그만하자’라는 생각이었고, 지브리 미술관에 도망가 있었다. <게드전기>를 만들 때는 이번 한번만이라고 생각했지만 다 만들고 나니 주위에서는 당연히 다음 작품도 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스스로도 하나만 만들고 도망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놀고 있을 수는 없다는 분위기에 휩싸여 프로듀서한테 끌려서 돌아왔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만들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의견이 대립하는 부분도 있었을 법하다. 세대 차이도 분명히 있었을 테고 말이다.
=그다지 같이 만든다는 느낌은 없었다. 각본에는 평소대로라면 아버지가 하지 않을 것들이 많았다. 특히 두 사람이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장면 같은 것. ‘자기도 안 하는 일을 나한테 시키다니’라고도 생각했다. 게다가 ‘이건가? 저건가?’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등 뒤에서 “그게 아니지! 이거지!”라고 말하거나 해서 조금 거추장스러웠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 하나하나에 설득력이 있었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니 왠지 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당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시대가 배경이다.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지금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애쓴 부분은 뭔가.
=당시의 청춘영화들을 많이 봤다. 감정적인 부분을 의미있는 것으로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말하고 어떤 표정을 짓는다’라고 하면 그 사이에 여운을 두지 않고 대화와 행동의 축적만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딱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의 감각과도 맞아떨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지금 사람들보다도 말하는 게 빠르다. 걷는 템포도 빠르고 모두 성격이 급하다. 지금과는 ‘사람’ 자체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그 시대를 무리해서 끌고 오는 게 아니라 내가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코쿠리코 언덕에서>를 비롯한 최근 일본영화들에서는 회고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런 문화적 분위기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현재의 일본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간 듯한 폐색감과 장래를 전망할 수 없는 불안감 속에 있다. 그런 분위기가 일본이 원기왕성했던 시대를 그리워하는 공기를 낳는다고 생각하지만 단, 그것은 장년층의 감각이고 당시를 모르는 젊은 세대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며 옛날이 좋았다고 할 의도는 없다.
-출생의 비밀이 영화에서 주요한 모티브로 다루어진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출생의 비밀이 다소 갑작스럽게 해답을 찾고 마무리된다. 이토록 한호흡에 갈등을 해결한 이유는 뭔가.
=출생의 비밀을 푼다는 것이 주제가 아니라 주인공 우미의 ‘모습, 존재’를 그리는 것이 영화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지브리 영화의 오래된 전통 중 하나는 음식에 대한 집착이다. 이 영화 역시 아침밥을 차리는 장면과 고로케를 먹는 장면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먹는다는 행위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먹는 것은 사람의 괴로운 심정을 달래고 닫혔던 마음을 풀어준다. 사람의 연을 두텁게 하는 최고 좋은 방법은 식탁에 같이 앉는 것이다. 그건 한국인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브리의 영화는 지난 10여년간 점점 ‘어른을 위한 영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유로 이런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 그리고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미래에도 지켜야 할 가치는 뭐라고 생각하나.
=스튜디오의 중심인물(미야자키 하야오와 스즈키 도시오)이 나이를 먹은 것이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 관객을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브리가 미래에도 지켜야 할 가치는, 과거의 성공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만 있을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려는 자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