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그녀의 소식이 궁금했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감독, 정재은의 장편 필모그래피는 6년 전 <태풍태양>에 머물러 있다. 결코 짧지 않은 그 시간동안 영화를 놓고 산 건 아니었다. “준비하고 있던 프로젝트들이 있었는데 잘 안 풀렸다. 골방에만 틀어박혀 시나리오만 쓰자니 너무 답답했다.” 닫힌 공간에서 벗어나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순간 정재은 감독에게 떠오른 건 평소 관심을 가지고 주의깊게 지켜보던 건축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였다. “어린 시절부터 어떤 장소에 가면 그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나 유명한 건축물을 찾아보곤 했다.” 건축 다큐멘터리는 그녀에게 영화라는 직업과 건축이라는 관심사를 결합한 친밀한 과제였던 셈이다.
<말하는 건축가>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와 ‘기적의 도서관’ 설계로 유명한 고 정기용 건축가의 삶을 다룬다. 정기용은 고고한 예술품처럼 취급받던 한국의 건축물을 현실적이고 친근한 삶의 공간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을 회관을 온천으로, 어린이 도서관을 놀이 공간이 포함된 장소로 설계한 그는 건물 이전에 그곳에 몸담은 사람이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적인 매력이 <말하는 건축가>의 주인공을 공간에서 사람으로 돌려놓았다고 정재은 감독은 말한다. “절부터 수녀원까지, 정기용 선생님과 참 많은 곳을 함께 다녔다. 처음에는 특정 공간이 전해줄 수 있는 느낌에 집중하려 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가부터 영화감독으로서 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까지 생각을 확장할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라는 색다른 작업을 통해 오히려 영화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할까.” 정기용 건축가가 유언처럼 남긴 말들을 통해 한층 더 깊어진 공간에 대한 고민은, 아마도 정재은 감독의 다음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차기작은 한국 궁궐의 지하공간에 대한 SF호러물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