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이윤지] 허술하지만 귀엽게, 딱 나 자신처럼
2011-10-27
글 : 주성철
사진 : 백종헌

“이제 진짜 기대하셔도 좋아요.” 이윤지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여유와 자신감이 넘쳤다. 그동안 자기를 수식했던 말들이 ‘성실한’ 혹은 ‘똑똑한’이었다면 지금까지의 이윤지를 깨는 모습이 두렵지 않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이윤지가 사극을 포함해 수많은 드라마를 거치며 보여줬던 밝고 건강한 ‘엄친딸’ 이미지는 <드림하이>의 매서운 무용선생 시경진 역할을 통해 큰 껍질을 벗었다. 그사이 연극 <프루프>를 통해 광기의 천재수학자 역할에도 도전했고, 엠넷의 페이크 다큐 프로그램 <UV신드롬>에도 출연해 능청스런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커플즈>에서는 옛 남자친구가 선물한 다이아 반지가 사실은 큐빅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애처로운 여자이기도 하다. 물론 예능인으로서 특수대학원이 아닌 일반대학원에 다니는 부지런한 학생의 모습도 거기에 겹쳐진다. 그렇게 이윤지는 계속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조바심이 났다. 물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윤지를 만나 지금의 마음을 들었다.

-공포영화 <령>(2004)에 ‘은정’으로 출연한 것이 영화배우로서의 데뷔다. 그때 기억은 어떤가.
=당시 <논스톱4>를 먼저 하고 <령>에 출연하게 된 건데 그게 진짜 첫 번째 영화였다. 많은 분들이 <커플즈>가 데뷔작이라고 말씀해주시면 쑥스럽다. <령>은 분량이 많지 않아서 4회차 정도 찍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게 현장에 나갔다가 그냥 정말 ‘맛’만 봤던 영화여서 ‘출연’이라고 하기가 민망하다.

-학업과 연기, 모두 소홀히 하지 않는 ‘똑순이’ 혹은 ‘엄친딸’ 이미지다.
=개인적으로 워커홀릭 성향이 좀 있는 것 같다. 지금도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그게 이상하게 지금의 나에게 받침대가 되어준다. 아무래도 연기자라는 직업이 늘 규칙적이지는 않다 보니 울림도 있고 굴곡도 있는 가운데 받침대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학교가 그렇다. 물론 거기에는 그 학업도 소홀해서는 안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자유롭게 연기자 생활을 하되 어딘가 적을 둠으로써 노멀한 패턴도 함께 가져가는 게, 연기자로서 더 자유롭게 놀기 위한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 같다.

-<커플즈>에서 김주혁과의 호흡은 어땠나? 드라마도 그렇게 늘 상대 남자배우들의 나이가 좀….
=내 파트너는 기본 10살 차이는 늘 찍어주는 것 같다. (웃음) <광식이 동생 광태> 등 로맨틱코미디도 많이 하신 분이라 큰 도움이 됐다. 수줍게 말 못하는 모습도 좋지만 약간 거칠고 빈티지한 형사 느낌의 <프라하의 연인>은 정말 좋아했던 드라마다. <커플즈>에서도 무척 귀엽고 사랑스럽고 의지가 된다. 무엇보다 주혁 오빠는 영화 안에서나 밖에서나 ‘양반’이다. (웃음)

-<커플즈>에서 연기한 ‘애연’이 경찰이라는 점에도 혹시 끌렸나.
=물론이다. 시나리오 받고서 감독님께 “애연이 영화에서 진짜 제복 입어요?”하고 물어봤다. 그런데 절도있고 시원스런 성격의 경찰처럼 보이다가도 소매치기나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사복 입고 길을 가다가 사람들하고 부딪히면 막상 말을 잘 못하다가 돌아서면 ‘저것들 다 처넣어버릴까?’ 하면서 실천을 못하는 모습도 나와 많이 닮았다. (웃음) 그렇게 말랑말랑한 로맨틱코미디 안에서 바람이 숭숭 통하도록 구멍이 뻥뻥 뚫린 애연이라는 캐릭터를 만나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

-지금의 이윤지를 말하는 데 있어 드라마 <드림하이>의 ‘경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를 통해 이윤지를 재발견했다는 사람들이 많다.
=<드림하이>의 경진은 가장 적은 신에 가장 강한 임팩트를 원하는 역할이었다. 게다가 상대 아이들이 아이돌이다 보니 나름 내가 지휘하면서 가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 힘들기도 했다. 캐릭터가 이전과 다르다, 하는 그런 단순한 문제라기보다 한번에 응축된 에너지를 뿜어내야 하는 캐릭터였기에 힘들었다. 준비가 덜 됐구나,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지만 많은 분들이 ‘재발견’ 같은 표현을 써주셔서 감사했다. 그래서 그런가? 해보자! 하는 마음도 들고. 그래서 <드림하이> 때 재발견인 줄 알았더니 이번이 재발견이네, 하면서 계속 새롭게 봐주신다면 정말 더 좋을 것 같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스페셜 <터미널>도 무척 좋았다. 주변에서 울었다는 사람 꽤 되더라. (웃음) <드림하이>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이윤지를 발견한 느낌이다.
=<터미널> 얘기해주시면 정말 너무 좋다. 예전 드라마 <대왕세종>에 출연할 때 조연출하셨던 분께서 직접 연락해온 거였는데, 대본 보는 내내 행복했다. 내가 소속사에다가 이런저런 내용인데 너무 하고 싶다, 꼭 해야 한다, 그렇게 주장해서 한 거다. 단막극의 풋풋함과 애잔한 멜로의 감성이 잘 살아 있고 CG도 너무 귀엽다. 내가 연기한 ‘연수’가 안돼 보이고 좋기도 해서, 주책바가지라고 할 거 같아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 작품인데도 지금도 계속 틈만 나면 다시 보고 또 본다. 다들 좀 많이 봐줬으면 좋겠는데 재방송 계획은 없는지 물어봐야겠다. (웃음)

-좋아하는 배우가 있다면.
=이자벨 위페르를 좋아한다. 최근작 <코파카바나>를 너무 재밌게 봤다. 엄마랑 같이 봤는데 실제 우리 엄마도 그런 철딱서니 없는 엄마라서 더 재밌었다. (웃음)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서 좋았던 게 바로 그녀가 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진전도 한다고 해서 개막식 다음날 아침에 들렀다. 아직 준비 중이라고 개관을 안 했던데 그래도 관계자 분께서 들어와서 봐도 된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 전시를 둘러보고 있는데 너무 감동이었다. 그냥 바로 눈물이 흘렀다. 그런데 마침 개관 준비 때문에 이자벨 위페르가 왔다는 거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다이어리를 꺼내서 사인받을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워낙 위엄있는 배우라 통역을 통해 이런저런 얘기를 직접 나누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주책이지만 ‘이번에 유준상씨랑 홍상수 감독님의 <다른 나라에서>라는 영화도 촬영한 걸로 아는데, 사실 유준상씨가 우리 소속사(나무엑터스) 선배님입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그런 말에도 ‘그런데?’ 하는 표정이었다. 그마저도 너무 멋있었다. (웃음) 또 내털리 포트먼도 좋아한다. <브라더스>를 인상적으로 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 대기실에서 소파에 다리 걸치고 ‘흐흐흐흐흐’ 하고 웃는 장면이 좋았다. 새침 떨고 편안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뭔가 깊이 숨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수많은 드라마를 함께해온 국내 연기자 중에서는 누구를 얘기하고 싶나.
=고두심 선배님은 내 첫 번째 엄마였고 최명길 선배님은 두 번째였다. 그래서 두분이 TV에 나오면 우리 엄마가 “야, 너네 엄마 나왔어!” 하고 부르신다. (웃음) 내가 지난해에 <프루프>라는 연극을 했을 때 고두심 선배님은 초반과 마지막 그렇게 두번이나 오셨다. 왜 수고스럽게 두번이나 오셨냐고 여쭤보니 ‘내 연기가 나중에 어떻게 변하는지 보려고’ 그러셨다는 거다. 최명길 선배님도 드라마 끝나고 메이크업을 안 지운 채로 오셨더라. ‘남편이랑 시간 맞춰 오면 늦을 거 같아서’라는 게 이유였다. 너무 감사했다.

-<드림하이>를 시작으로 드라마든 영화든 요즘 부쩍 ‘전면’에 나선다는 느낌이다. 모두가 당신을 달리 보고 있다는 점에 대해 본인도 분명 체감하고 있을 것 같고. 혹시 개인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웃음)
=요즘 너무 재밌다. 늘 바쁘고 체력적으로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그럴 때 행복하다. 가령 청양고추를 엄청 좋아하는데 아무리 매워도 입안에 뜨거운 밥을 넣고 입을 꼭 닫는다. 자동적으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데 묘한 희열이 온다. 아무래도 나에게 변태 성향이 좀 있는 것 같다. (웃음) 지금까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봤는지도 안다. 잘하고 성실한 건 알겠는데 별다른 기대는 안 했다고나 할까. ‘이윤지 걔 괜찮은데 글쎄, 흥미롭지는 않아’ 그런?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눈을 게슴츠레 뜨고 ‘흐흐흐흐’ 그렇게 웃으며 그 기대없음을 깨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왜 종이로 만드는 개구리 장난감 있잖나? 손으로 콕 누르면 뛰어오르는. 지금까지는 내가 빳빳한 종이가 아니어서 어설프게 눌렀다가 발라당 넘어질 것 같았다면, 이제는 ‘높게 한번 제대로 튀어볼까’ 하는 느낌이 왔다. 그렇게 이윤지가 제대로 한번 시작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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