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춤> DVD를 가방에 싸가지고 다니면서라도 보여주고 싶다.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알리고 싶다.” 인터뷰 도중 송일곤 감독은 그간 자신이, 아니 저예산영화가 외면받아왔고 설 자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오직 그대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관객,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정체를 찾기 위한 그의 시도이자 선택이다. 눈이 멀어가는 여자와 그 여자를 위해 헌신하는 한 남자. 운명적인 사고로 엮인 이 둘의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열광했던 홍콩영화와 <러브 어페어> 같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 그리고 한국적 신파드라마를 떠오르게 한다. 만남과 헤어짐, 역경과 슬픔 등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지만 그게 <꽃섬>과 <깃> <마법사들>을 만든 송일곤 감독의 것이라면, 그건 어디까지나 의외다. 의외로 그는 다른 시도를 하지 않는 정공법으로 정공법의 영화에 다가선다.
-부산에서 ‘7초 매진’ 기록을 세웠다. 영화제임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놀라운 수치다. 작품하면서 이런 호응은 처음이었을 텐데.
=지금도 얼떨떨하다. 살면서 자주 오지 않는 순간이다. 특히 영화의 전당 첫 상영작이라는 것도 의미있었다. 덕분에 부담도 컸다. 혹시 실망을 안겨주면 어쩌나 정말 긴장되더라. 개막식 때 팔짱을 끼고 가는데 소지섭, 한효주 같은 대스타들도 파르르 떨더라. 그런 건 팔짱 낀 사람끼리는 다 알지 않나. (웃음)
-<오직 그대만>은 어떻게 시작한 건가.
=대본은 2년 전에 썼다. 초고 쓰는 데 1주일밖에 안 걸렸다. 근데 너무 신파 아닌가 싶더라. 그래도 지금 시대엔 동화 같은 사랑이자 가치와 미덕이 있는 스토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소지섭씨한테 보냈는데 드라마 <로드 넘버 원> 찍을 때라 거절하더라. 그래서 접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에 일본 야쿠시마섬에 갔다.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의 배경이 된 섬인데 7천년 된 나무를 찍으러 갔다. 영화도 잘 안되고 힘들 때라 다 잊고 지내자 싶었다. 근데 거기서 지섭씨에게 전화가 왔다. 같이 하고 싶다고.
-결국 소지섭씨 마음이 안 바뀌었다면 사장될 뻔한 프로젝트였나 보다.
=소지섭씨한테 오는 많은 대본이 트렁크에 있는데 다행히 우리 영화는 조수석에 있었다고 하더라. (웃음) 사실 나도 그간 변화가 좀 있었다. <시간의 춤> 기자시사회 때 약간의 다짐을 했었다. 잘 만든 영화냐 아니냐를 떠나 이런 작은 영화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사에 참석한 기자가 열 매체도 안되더라. 내레이션에 참여해준 이하나, 장현성도 그날 많이 놀랐다. 앞으로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려면 길을 택해야 한다 싶더라. 홍상수, 김기덕 감독님처럼 스타일을 브랜드화하든지 그렇지 않다면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를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대중성이 결국 당신의 영화 만들기에 있어서 기준이 된 건가.
=홍상수 감독님의 팬이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것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지금 타르코프스키 같은 명가들이 대본을 가지고 간다면 투자받기 힘들 거다. 아무도 그에게 돈을 주지 않을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영화가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을지 타진해보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연극적인 영화 등의 연출로 형식이나 스타일 면에서 관습적인 걸 탈피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반면 이번엔 애초 스토리와 캐릭터간의 관계 설정 모두가 관습적인 작품이다. 그럼에도 본인만의 의외성을 가져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얼마나 전형성을 잘 재현하냐가 의도였던 것 같다.
=정공법이 뭘까 고민했다. 철민과 정화의 감정에 관객이 가장 쉽게 따라갈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꼼수를 부려서 다른 방식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 관객이 가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기존 연출방식으로 보자면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게 어려운 점이었지 싶다.
=난 이 영화가 인물화라고 생각했다. 인물을 잘 잡아야 했다. 호퍼의 그림을 많이 참고했다. 그들이 어떻게 주변을 응시할까에 대해 고민했다. 시각장애인인 정화의 입장에서의 액션과 리액션, 빛의 처리, 이런 것들이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해온 영화적 기법, 미학적인 것들은 인물을 뒤에서 받쳐주는 정도에서 그쳤다.
-사랑과 운명이라는 센 감정, 직접적인 감정을 표하는 데도 철민과 정화의 표현을 다소 절제한다는 느낌이었고, 덕분에 막판 한효주가 오열할 때 터지는 효과도 배가 됐다.
=정화는 슬픔이 있지만 너무 바깥으로 표출하지 않고 그것 때문에 더 씩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다. 어떤 순간에 그게 터지면 그제야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봇물 터지듯 감정을 분출하는 거다. 평소에 징징대지 않고 담담한 여자로 그리려고 했다. 철민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가진 고통, 그리고 현재 정화를 알게 되면서 가진 고통도 모두 쥐고 있어야 한다.
-신파라고 하지만 운명적 사고로 둘이 엮여 있단 점은 다소 작위적인 설정이었다. 우려와 달리 스토리와 잘 융화됐다.
=대본에서부터 그 부분은 많이 고민했다. 굉장히 자극적인 설정이다 싶더라. 둘은 모르게 하고 관객만 알게 할까. 그래서 두 가지 버전을 촬영했다. 철민과 정화는 모르고 관객만 아는 버전과 지금의 버전 이렇게. 그런데 편집하다 보니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지만 영화라서 이게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두 배우의 공이 크다. 운명을 대처하는 데 있어서 담담하고 진정성있는 연기가 오버하지 않고 비극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됐다.
-영화 미학과 관념을 중시하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소수지만 그걸 지지하는 관객이 존재한다면 이번 선택은 어쩌면 그들에겐 등을 돌리는 선택이 될 수도 있었다.
=난 두 관객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직 그대만>은 정공법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두 배우의 감정선을 잡는 데 있어서는 <깃>이나 <마법사들>에서 보여준 것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그전에 딱히 내 스타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꽃섬>이 로드무비를 하면서 어떻게 인물을 캡처했을까를 고민했다면 <간과 감자>는 할리우드적이면서도 유럽적인 화면에 대한 탐구였다. 매 작품 스타일에 고착되지 않으려고 했고 스타일리스트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저예산영화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현장을 경험했다.
=이번 작업으로 시스템에 대해서 많은 걸 배웠다. 제작자, 매니저, 스타와 같은 시스템들. 이전 현장과 달리 항상 꽉 짜인 예산과 스케줄도 생소했다. 다행히 남녀주인공들이 스타인데도 헌신적이었고, 조연배우로 출연한 선배님들도 도움을 많이 주셨다. 가장 힘들었던 건 투자사와 내가 원하는 것 사이의 조율이었던 것 같다. 결국은 대중이 원하는 게 뭔가에 대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투자사가 주도하는 환경에선 그게 핵심적인 룰이 될 수 있다. 비교적 일찍 영화를 만들었고, 감독 중심의 영화 만들기가 가능한 90년대 후반의 풍족함을 누린 세대라면 2011년의 제작 풍토에 상실감도 느꼈을 텐데.
=상실감과 동시에 오히려 도전정신이 생겼다. 60년대, 70년대 시대마다 영화가 변하고 그에 따라 관객도 변한다. 내가 공부하던 시절의 거장들이 누리던 영화의 시대가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지금은 문학적인 시대가 아니라 인터랙티브한 시대다. 관객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작가도 거기에 촉각을 세워야 한다. 예전에 안판석 감독님이 그러더라.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TV는 유일한 문화행위이고, 그래서 자신이 책임감을 느낀다고. 결국 지금은 대중성 안에서 고급문화를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영화 환경의 변화도 있지만 감독으로서 그간 개인적인 변화도 이번 작품에 반영됐을 텐데.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도 있는 작품이다.
=난 영화감독을 빨리 시작한 경우다. 영화제도 많이 갔고 상도 많이 받았다. 근데 어느 날 보니 내가 진짜 만들고 싶은 영화는 뭐였지 싶더라. 영화제도 사실은 또 하나의 세계다. 그 안에서 주목받기 위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변질되는 것도 있다. 물론 문화를 지키는 최전선의 가치로서 영화제는 의미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겐 아니다. 영화제 가서 상 받고 이런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고 재밌어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펠리니도 후기엔 예술과 관념의 세계에 심취했지만 <길> 같은 작품은 시대와 호흡한 작품이었다. 청년기를 지나서 나도 어느새 마흔이 됐다. 영화 미학을 끝까지 펼쳐보고 싶었던 젊은 시절이 내게 먼 여행 같았다면 지금은 재밌는 이야기를 툭툭 던져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더 크다.
-그러니 다음 작품이 더 궁금해진다.
=거의 완성된 대본도 있고 써놓은 대본도 있고. 무엇부터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1년에 한편씩, 아니 3년에 2편씩은 만들고 싶다. 처음 칸영화제 갔을 때 함께 간 우츠(폴란드 영화학교) 출신의 친구들이 이젠 자국의 영화시장이 없어서 더 이상 영화를 하지 못하고 있다. 몇몇을 제외하고 유럽국가들의 상황이 비슷하다. 우린 지속적으로 영화가 생산되는 나라이고 난 그래서 운이 좋다. 대중하고 소통하면서 맥이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영화감독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장에 카메라 들고 나가는 것이다, 란 말을 했었다. 영화 만들기가 대단한 일이 아니라 그저 노동자가 그날의 일을 하러 가듯이 직업처럼 하는 것이란 뜻이다. 예전에 영화에 가졌던 기대가 초월적인 것, 혼신의 힘을 바쳐 살아가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통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대중’과의 첫 만남이다.
=아마 여태까지 내 영화에 든 모든 관객 스코어가 하루 만에 깨질 수도 있을 거다. (웃음) 그만큼 내 영화를 본 관객이 많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