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9일
동시통역으로 진행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는 녹음이 불가능했다. 끝나자마자 행여 기억이 새어나갈까봐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적어내려간 메모를 여기 옮겨둔다. 우선 감독으로서 적성에 관한 독특한 해석. “나는 누나 둘에 터울이 많이 지는 장남이자 막내로 일본에서는 최악의 신랑감이다. 그런데 그 응석받이 천성이 감독의 일과 잘 어울린다. 감독은 스스로 뭘 못해도 된다. 잘하는 스탭한테 시키면 되니까. (웃음) 술도 못하고 가라오케도 싫어하고 지도도 못 보고 운전도 못하는 내가 회사원이 됐다면 대박이었을 거다. 감독이란 직업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 경위도 맥락이 비슷하다. 촬영감독에게 야단맞고 심지어 손찌검당하는 집단 작업이 싫어서 궁여지책으로 혼자서도 만들 수 있는 다큐멘터리에 입문했는데 거기서 불현듯 영화에 매료된 거다. 도피가 기회로 승화된 형국이다. 한편 좋은 배우의 정의를 묻는 연기자 지망생 청중의 질문에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는 현재를 통해 어제도 거기서 살았고 내일도 그 자리에서 살아갈 것같은 인물을 구현하는 연기”라는 요지의 답을 한 고레에다 감독은 <기적>의 한 장면을 예로 부연했다. 딸의 이혼으로 함께 산 지 6개월 된 외손자가 학교에서 돌아와 할아버지에게 모종의 상의를 하려고 한다. 이때 할아버지 역의 하시즈메 이사오가 소년의 말을 막으며 “일단 ‘다녀왔습니다’ 해야지”라고 부드럽게 꾸짖는 대사는 배우가 즉흥적으로 더한 요소였다고 한다. “그 한마디로, 반년이란 시간 동안 할아버지가 이 소년에게 아버지 역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단번에 영화 속 세계를 풍부하게 만드는 연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리고 중얼거렸다. “내가 시나리오에 애초부터 썼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진심으로 분한 듯 잠시 먼 산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모습에 웃음이 터진다.
10월10일
<기적>의 GV가 40분이나 남았는데 급한 심정이 역력한 자원봉사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게스트로 예정에 없던 배우 오다기리 조가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심사까지 맡은 스타가 그리 한가할 리가! 서둘러 대기실에 도착해 보니 과연 오다기리상은 고레에다 감독이 들려주는 점심으로 먹은 간장게장 자랑에 솔깃해져 달걀 노른자를 넣는 편이 맛있을까 아닐까의 문제에 열중해 있었다. 스타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두르고 다니게 마련인 긴장의 자장(磁場)이 몸 주변에 전혀 흐르지 않는 참으로 기이한 배우다. 그렇다고 존재감이 약한 것도 아니니 더욱 의아하다. 그가 출연했던 작품의 제목인 ‘유레루’(흔들리다)라는 단어가 불쑥 떠올랐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한들한들. 작품 속에서 항상 얼마간 유원지에 놀러온 사람처럼 유유자적해 보이는 이 배우의 연기 스타일은 천품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GV 시작 직전 무대 뒤. 관객을 깜짝 놀래주려는 궁리로 “객석에서 보이면 안돼요!” 하며 슬쩍 소매를 끌자, 순순히 그 버드나무 같은 장신을 숨기려고 애쓰는 모습이 키만 훌쩍 큰 소년이다.
10월11일
부산에서 본 마지막 상영작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의 <자전거 타는 소년>은 이제 와서 영화에서 움직임이 무엇인지 새삼 고민하게 만들었다. <자전거 타는 소년>은 정말 부단히 움직인다. 아니, 움직임이 이 영화의 전부라 표현해도 좋을 지경이다. 주인공인 열두살 소년 시릴(토마스 도레)이 잠시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열두살 사내아이가 가만있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시릴은 한순간도 그저 놀거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법이 없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담장을 타오르고 계단을 뛰어내리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거리를 숨차게 누비는 소년의 줄곧 급박한 동작은 모조리 확고한 목표에 봉사한다. 아들이 짐스러워 의도적으로 연락을 끊고 몰래 이사가버린 무책임한 아빠와 그의 사랑을- 껍데기만이라도- 다시 찾겠다는 독한 의지가 그것이다. 소년의 움직임은 생존하려는 어린 짐승의 발버둥이다. 시릴의 역동성과 대비되는 것은, 그를 주말마다 맡아 돌보는 선량한 위탁모 사만다(세실 드프랑스)의 수동성이다. 사만다의 행위는 인위적이리만큼 철저히 리액션에 한정된다. 이를테면 인간의 근본적 선의라는 미스터리를 의인화한 인물 같다. 세실 드 프랑스는 무슨 단역처럼 소품처럼 스쳐가듯 영화에 등장해 소년이 원하면 곁으로 다가가고 밀치면 밀쳐지고 아이를 말리다 다치기도 하면서 따라다닌다. 두 사람의 첫 접촉이, 시릴이 사회복지사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우연히 근방에 있던 사만다의 허리를 끌어안은 충동적 동작이었다는 점은 얼마나 적절한가! 다르덴 형제는 이 여인이 소년을 보호하려고 하는 심리적 동기도 고매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는다. <자전거 타는 소년>은 그렇게 오로지 육체와 사물의 표면만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다르덴 형제는 정신 사나운 움직임의 소용돌이 안에서 용케 인간 내면의 가장 비밀스럽고 고요한 지점을 짚어내고, 아주 박약하지만 거기 분명히 존재하는 사소한 구원의 가능성까지 건져올리는 신기를 부린다. 곤한 몸을 보따리처럼 끌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도, 폭도의 깃발처럼 스크린에 종횡무진 나부끼던 소년의 빨간 셔츠가 지워지지 않았다. 태양을 올려다 본 다음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 떠다니는 그 잔영처럼.
10월17일
근미래의 로봇 격투기를 소재로 부자관계 드라마를 풀어놓는 숀 레비 감독의 <리얼 스틸>에는 세 갈래 벤치마킹이 교차한다. 첫째는 당연히 <트랜스포머> 시리즈. <리얼 스틸>은 마이클 베이의 현란한 CG 액션에 결여된 부피감과 중량감, 쇳덩이끼리의 슬램이 불러일으키는 둔중한 물리적 쾌감을 살려낸다. 현대판 글래디에이터로 등장하는 로봇들은 따지고 보면 충분히 하이테크를 요하는 기계임에도 실감을 위해 그렇지 않은 양 교묘히 위장돼 있다. 고철더미에서 끌어낸 켄튼 부자의 로봇 이름이 ‘아톰’인 것도 그 디자인이 지브리의 추억어린 거신병 로봇을 닮은 것도 우연은 아닐 터다. 두 번째 전범은 퇴물 복서 아버지의 재기와 부성 회복을 그리는 <챔프>식 드라마다. 여기서 업데이트 하나. 켄튼 부자는 훨씬 덜 끈끈하고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적다. 아들 맥스(다코타 고요)는 시합이 끝나면 아마도 양육권을 가진 이모의 품에 돌아갈 것이다. 부자를 결합시키는 끈은 혈연보다 로봇이라는 공동의 취미이며 맥스가 아빠에게 요구하는 것은 평생의 보호가 아니라 한번의 시합이다. 어찌됐건 스포츠영화와 가족드라마의 전형 안에 머무는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리얼 스틸>이 기어이 영화적 매력을 발휘하는 대목은 브래드 버드 감독의 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를 연상시키는 소년-로봇의 관계다. <리얼 스틸>은 맥스와 아톰이 밤 산책을 나가는 장면에서 가장 아름답고, 링 위에서 이인무를 출 때 제일 신나며 아톰의 분전에 소년이 안타까워하는 순간 최고로 슬프다. 숀 레비 감독은 여기서 최대의 함정을 뛰어넘으며 영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그것은 아톰을 감상적으로 의인화하지 않는다는 결단이다. 망가진 로봇의 윤활유는 마치 사람의 피마냥 웅덩이를 이루고 서로를 마주보는 소년과 아톰은 엘리엇과 ET처럼 보이지만 <리얼 스틸>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관객의 투사된 감정일 뿐임을 명백히 한다. 시합 전 대기실에 혼자 남은 아톰이 거울쪽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반영과 투숏을 만들 때 우리는 그의 얼굴에 모종의 감정이 스쳐간다고 느끼지만 영화는 끝내 아톰의 눈을 깜박이게 하지 않고 다음 컷으로 넘어간다. 순간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맥스와 관객은 로봇이 인성을 지녀서 애착하는 게 아니다. 아톰은 일종의 거울이어야 한다. 로봇과 소년의 교감이 극중 용어대로 ‘쉐도우 모드’에 그쳐야만 <리얼 스틸>은 적절한 톤을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음을,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숙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