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글쎄 한 45등 정도 하지 않을까.” 카메라 앞에서 어색함을 떨치려고 무진장 애쓰는 김우택 대표에게 물었다. 올해 ‘한국영화산업 파워50’을 뽑는다면 몇등이나 할 것 같냐고. 돌아온 답변은 ‘45’. 쇼박스와 메가박스 대표를 지냈던 그는 매년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힌 파워맨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대기업 임원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중소기업 사장님이다. 그런데 왜 이리 웃고 있느냐고. 산업 내에서의 영향력은 줄었지만 보고 싶은 영화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여지는 더 많아져서다. 올해부터 투자배급사 NEW 대표를 맡은 그의 입가에선 웃음이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엘리트 느낌을 물씬 풍겼는데. 인상이 변한 것 같다. 얼굴선도 동글동글해졌고.
=그때는 눈빛도 또렷하고 그랬는데. 나이 먹어서 그런가. 요즘엔 자꾸 눈이 처지고 눈 아래 그늘도 지고 그런다.
-감독들과 자주 만난다고 들었다. 대기업에 있을 때와 가장 다른 게 뭔가.
=그룹에 있을 때는 말을 편하게 할 수도 없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여유로워지니까 사람 만날 때도 편하다. 얼마 전에 이창동 감독님과 식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멋진 분이다. 모르는 게 없고, 삶의 원칙도 분명한 분이시고. 대기업에 있었다면 그런 면모를 발견할 수 없었을 거다.
-올해 NEW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세운 목표가 있다면.
=우리는 사업 계획은 안 짜는 회사인데. 200만명 할 거라고 봤던 영화가 20만명이 되고, 50만명 될 영화가 500만명도 되는 것이 이 산업의 속성이다. 이전엔 올해 매출 얼마 해야 한다, 뭐 그런 게 있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 한번도 안 맞는데. 맞지도 않고 맞출 수도 없고. 사실 크리에이티브 영역을 제외하면 영화산업이 과연 개인이 할 만한 비즈니스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그럼 투자배급사를 차린 건 무슨 이유에서였나.
=기본적으로 미디어 사업이 갖는 소통의 즐거움 때문이다. 그 재미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하는 거다. 영화 안 좋아하는 사람 있나. 전에 그룹에 있을 때 사장들 모여서 차 한잔 마시면 누구는 증권 이야기 하고 누구는 새로 출시된 제과 이야기 하고. 그때마다 다들 ‘아, 그래요?’ 하면서 흘려듣는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면 다들 그 영화의 그 장면은 이상한 거 아니냐, 부터 팝콘이 맛이 있네 없네, 까지 모두 한마디씩 한다. 이게 영화의 장점이자 매력 아닐까. 그때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짜증났지만. (웃음)
-대기업에 있을 때와는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진 것 같다.
=어릴 때는 시장에서 1등 하고 싶었지. 경쟁사한테 지기 싫고. 빨리 크고 싶고 돈도 벌고 싶고 폼도 내고 싶고. 지금도 1등 하고 싶은 건 똑같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그 이후에 뭘 하고 싶냐를 생각하게 된다. 사회에 의미있는, 좋은 영화를 많이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거지.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103만명 돌파하고 파티를 했는데 이전이라면 100만명 들었다고 잔치하고 좋아했겠나.
-지난해 CJ, 롯데에 이어 국내 배급사별 시장점유율 3위를 기록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12.5%의 점유율을 보였고, 성수기에도 3위를 차지했다.
=수치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지난해보다 성장했다는 점은 고무적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만. 내 입장에서 현실적인 문제는 성장을 계속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가다.
-<헬로우 고스트> <그대를 사랑합니다> <블라인드> <가문의 영광4: 가문의 수난> <풍산개> 등을 투자배급해 좋은 흥행 성적을 거뒀다. 이들 영화 모두 제작비가 중소 규모다. 업계에선 NEW의 틈새시장 공략이 주효했다고 하던데.
=손해보지 않을 작품을 선택하려고 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바깥에서 볼 때는 다른 회사들에서 투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영화들처럼 볼지 몰라도 내부적으로는 자신있었던 영화들이다. 다행히 결과들이 좋아서 기쁨이 배가 된 거지.
-<헬로우 고스트>는 시나리오를 읽고 하루 만에 결정했다고 하던데.
=집에 가서 시나리오를 봤는데 너무 좋았다. 사실 직원들이 시나리오를 건네줄 때 뉘앙스가 조금씩 다르다. 본인들이 좋아하는 거면 씩 웃으면서 집에 가서 읽어보시죠, 그런다. 그게 아니면 같이 회의하자고 하고. 직원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언제부터인가 시각이 많이 비슷해졌다. 나를 포함해서 다들 따뜻한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이고. 그런 영화들이 승률도 더 좋고.
-현장에선 NEW의 강점 중 하나로 결정이 빠르다는 점을 꼽는다. 콘텐츠 확보에 있어 메이저 투자배급사와 경쟁하기 위한 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로 뛰는 것밖에 더 있겠나. 자금이든, 조직이든, 인프라든, 리소스든 대기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데. 현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남보다 기민하게 뛰고, 의사결정 좀더 빨리 해주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한 제작자는 앞으로 NEW랑 쭉 할 거라고 하더라. 투자배급사가 제작을 겸하는 상황에서, 제작사를 파트너로 삼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남달라 보인다.
=대기업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다만 투자배급, 제작, 상영부문까지 다 경험해보니 제작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더라. 구조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한곳에 모아놓으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대기업 입장에선 시장이 작다보니 한데 뭉쳐서 하려고 하는 것이고 창작자들 입장에선 자본과 인프라의 힘이 세지니까 결국 그렇게 가는 것인데. 창작자들은 그룹 내의 누군가가 내 크리에이티브를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저 시스템이 내 크리에이티브를 인정하게끔 맞춰야 하니까 힘들 테고.
-수직계열화된 대기업 주도의 산업 안에서 NEW가 일정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상대적으로 우리가 좀더 편하겠지. 제작사와 소통하고 의견을 반영하는 데 있어 큰 기업보다는 자유로우니까. 그게 NEW의 강점이긴 하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도 그렇고 제작사도 그렇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로 대안을 찾다 보니 서로의 요구가 맞은 측면도 있다.
-이전에도 중급 규모의 배급사가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극장을 갖지 못해서라고 보는데.
=유통에 있어서 극장 인프라가 없다는 건 핸디캡이다. 대기업들이 작품을 가져올 때 극장 인프라를 내미는 경우도 많으니까. 사실 그게 자연스럽다고 본다. 감독이나 제작자들도 이왕이면 그렇게 하는 게 낫다. 하지만 시장은 계속 돌고 도는 거다. 윈도가 많아질수록 인프라의 힘은 떨어진다. 유통 채널이 많아질수록 제작사처럼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쪽이 힘을 더 가질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올 거다. 그때까지 우리도 버텨야 하고, 감독이나 제작자들도 버텨야 한다. 근데 불쌍한 중소기업에 도움되는 질문을 좀 해주면 안되나. (웃음)
-직접 돈을 구하러 다녀보니 어떻던가.
=내가 옛날에 이랬는데, 저 사람이 전엔 나한테 안 그랬는데 뭐 그런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지. 다만 중요한 건 팩트인 것 같다. 한때는 왜 좋은 시나리오가 우리한테 안 오냐 뭐 그러기도 했지만 그게 팩트 아닌가. NEW는 개인 회사이고, 작은 회사이고, 더 뛰어야 하는 회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만 이제 인프라는 없으나 대안적인 배급사로서의 위치까지는 오른 것 같다.
-2009년 ISU-글로벌 콘텐츠 투자조합(200억원)을 시작으로 대략 800억원 규모의 펀드를 결성했다. 지난 3년 동안 안정적인 자금 확보를 위해 애썼는데.
=극장을 못 주면서 자본에 대한 불안감까지 안길 수는 없잖은가. 지금은 프로젝트를 운용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처음에는 친한 분들한테 부탁해서 여기서 3억원, 여기서 5억원 이런 식으로 모았다. 욕먹을 이야기지만 사실 첫 한국영화 배급할 때 3억원 넣고 배급했다. 다행히 지금은 넉넉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다.
-내년 개봉예정인 <미쓰 GO>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은 제작비가 50억원을 넘나든다. 2013년 라인업에는 대형사극과 전쟁영화가 끼어 있다.
=농담삼아 직원들에게 우리도 500만짜리 영화 해보자고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거다. 큰 영화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기도 하고. 다만 내년쯤엔 적어도 1편 정도는 메인시장에서 승부를 볼 수 있겠구나 한다. 물론 중요한 건 체력이다. 오버할 생각은 없다. 배급편수도 1년에 16∼20편 정도를 유지할 거다.
-2009년에는 <트와일라잇> 시리즈, <블랙> 등과 같은 외화 위주로 라인업을 짰고, 지난해와 올해는 한국영화 위주로 라인업을 구성한 것 같다.
=처음부터 한국영화를 많이 할 수 있었겠나. (웃음) 다만 앞으로 한국영화 위주로 라인업을 꾸리겠다 뭐 그런 건 아니다. 산업의 트렌드에 맞게 작품을 수급하고, 한편한편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지금은 시들해진 통신사 자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애초 목적이 통신 인프라에 얹을 콘텐츠가 필요한 것이었지 투자배급해서 1등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는 거다. 근데 막상 보니까 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한해 300억, 400억원 정도 쓰면 시장에 쉽게 진입할 수도 있고. 그랬는데 막상 와보니 먹을 게 없는 거지. 또 이 과정에서 다른 대기업과 경쟁구도가 되어버렸고. 전략에 미스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배급하지 않고 여러 펀드에 그 자금을 뿌렸다면 애초 목적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해외팀을 충원한다고 들었다. NEW 입장에서도 해외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을 텐데.
=태생적으로 작은 시장의 한계들을 돌파하려면 해외시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우리에게 해외시장은 당면과제가 아니다. 나도 합작해서 내 이름 영어로 올리고 싶지만 안되는 걸 어떻게 하나. (웃음) 사람을 뽑는 건 준비해야 하니까 조금 더 투자하는 정도다.
-쇼박스가 CJ나 롯데와 겨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력 세팅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계 인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서 수업료를 덜 지불했던 것 아닌가. NEW 역시 가장 큰 자산은 사람과 네트워크일 텐데.
=돈은 정말 중요하다. 사람 좋아도 돈 없으면 안된다. (웃음) 대기업에서 일할 때부터 갖고 있었던 원칙이 하나 있다. 개별 구성원의 실력보다 조직 내에서 그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크리에이티브한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투자배급과 같은 일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사실 이것 때문에 그룹 안에 있을 때 다른 계열사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 이만큼 해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고 우리 직원들한테 물어보면 다 자기가 잘해서라고 한다. 이게 내가 바라는 NEW다. 누구 하나가 잘했고, 다른 사람들은 들러리 섰다는 식은 싫다. 사실 올해도 영화인들보다 직원들하고 더 많이 놀았다. 만날 술 먹고 밥 먹고 야구 보고. 우리 회사 엥겔지수가 굉장히 높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