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design+] 차분한 거실에 생기를 불어넣은 건
2011-11-17
글 :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
<써니>의 나미가 사는 ‘고품격 유러피언 타운하우스형’ 아파트

아침 여섯시, 자명종 소리가 울리면 전업주부의 하루가 시작된다. 1970년생 임나미(유호정)씨는 남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도톰한 슬리퍼를 신고 주방으로 나선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족의 조식을 준비하는 것이 그녀의 첫 임무다. 입맛을 잃은 여고생 딸을 위한 메뉴는 토스트와 에그스크램블, 술에 취해 밤늦게 귀가한 남편을 위한 메뉴는 하얀 대구탕이다. 부산하게 움직이던 그녀의 손놀림이 식탁 위에 삐딱하게 놓인 오이소박이 그릇의 위치를 바로잡으면 2인분의 식사 준비는 마무리된다. 식탁 위 접시와 그릇들의 기하학적 배치는 묘하게도 아파트의 평면 구성과 닮아 있다.

임나미씨의 아침 식사는 남편과 딸이 집을 나서고 난 뒤에야 시작된다. 발코니 확장 공사를 한 자리에 놓인 앤티크풍의 의자와 탁자, 그녀는 거기에서 아침 햇살을 맞으며, 딸이 남기고 간 토스트를 먹는다. 거실 뒤편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턱 앤드 패티의 <타임 애프터 타임>이 그녀의 배경음악이다.

“홍 서방이 저리 잘될 줄 어찌 알아겄서.” 사위에게서 샤넬 백을 선물로 받은 친정어머니가 야무진 전라도 사투리로 했던 말이다. 기업 인수로 바쁜 사위는 병문안을 갈 시간이 없어서 출근길에 아내의 손에 수표를 쥐어주었고, 그녀는 렉서스 RX350을 몰고 손님이 드문 평일 오전의 백화점에 들러 명품 백을 골랐다. 대리석 바닥재가 깔린 60평형대 새 아파트로 이사한 것도 요 근래의 일이다. 주변의 권유에 따라 먼저 재건축 아파트와 주상복합 아파트들을 둘러보았지만 그녀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고품격 유러피언 타운하우스형”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건축 양식을 테마로 한 격조 높은 외관”, “동양적인 정서와 환경친화적 트렌드를 믹스시킨 모던한 실내 분위기” 등과 같이 약간 기묘해 보이는 디자인 컨셉을 내세워 최신 아파트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 나이에 뭘, 그냥 사는 거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중년의 임나미씨에게 이 아파트는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제공해줄 것처럼 보였다.

이사 뒤, 그녀는 “화이트 컬러의 클래식한 마감재”가 연출하는 거실의 “엘레강스한 분위기”가 못마땅했다. 너무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소파 양옆에 뱅앤드울룹슨 베오사운드 오디오를 배치했고, 벽면에는 그림 한점을 걸어두었다. 단박에 눈에 띄는 것은 후자였다. 제각각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섯명의 소녀들. 그녀들은 약간의 설렘을 담은 몸짓으로 이리저리 오가면서 차분한 거실 분위기에 자유분방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혹시 그녀들을 바라보는 임나미씨의 시선에는 25년 전 전남 벌교에서 서울로 전학 왔던 여고 시절 자신의 모습이 잔상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투리 억양을 꾹꾹 눌러 감춘 서울말로, “너희 새엄마가 전라도 사람이라고 나까지 싫어하는 건 부조리한 일이야”라고 말하던 16살의 풋풋한 그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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