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캐릭터에 빠져들기 힘들 때도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 안되나, 하는 주변의 요구에 부담을 느껴 촬영을 접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특수본>(특별수사본부)의 강력계 형사 ‘성범’은 쉬이 소화하기 버거운 상대였다. 하지만 성범은 그럴수록 뭐가 되건 정면으로 부딪혀 질주해야 하는 캐릭터였다. 자기를 믿고 따르는 같은 소속사 후배인 주원, 떼를 쓰고 애교를 부려도 받아주는 선배 성동일은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뭔가 잡히지 않을수록 채우지 말고 버리면서 다가가면 더욱 깊고 넓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성범이 처한 고통의 악조건도, 경찰서 내부를 둘러싼 의심스런 공기도 깊이 호흡하게 됐다. 그렇게 서서히 <특수본>의 ‘특별한’ 남자가 돼갔다.
엄태웅이 ‘씨발’을 입에 달고 다니는 거친 강력계 형사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핸드폰>(2009)의 ‘승민’처럼 ‘못된’ 남자는 아니고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의 ‘병훈’처럼 답답한 남자는 더더욱 아닌, 어쩌면 엄태웅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다. 영화 속 경찰서장(정진영)의 말을 빌리자면 <공공의 적>(2002)의 강철중(설경구)이나 <아메리칸 갱스터>(2007)의 리치(러셀 크로)를 직계 선배로 삼을 법한 ‘구멍 난 양말, 떨어진 운동화, 땀에 전 셔츠, 그게 자신의 몸인 양 그게 자신의 살인 양 살아온’ 형사다. “한동안 너무 말랑말랑한 캐릭터만 해온 것 같아 <특수본>의 ‘동물적’ 형사 ‘성범’에게 끌렸다”는 게 엄태웅의 얘기다. 그래서 성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일단 촬영 내내 메이크업을 하지 않았다. 성격도 거칠고 피부도 거칠다. 밤낮으로 잠복근무를 밥 먹듯 하고 끼니는 챙기는지 거르는지 알 수도 없으며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범인을 놓치지 않는 성범은 그렇게 특별수사본부(특수본)를 지키는 우직한 뚝심의 남자다.
강철중과 닮았지만좀더 아이 같은
<특수본>의 성범은 못마땅한 게 있으면 일단 시비부터 걸고 보는 남자다. 강철중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좀더 ‘애 같은’ 남자랄까. “술꾼들이 와인 유행한다고 와인 먹고 다니디?”라며 마약 판매상을 쫓고 “짭새가 선진화되면 봉황되는 거유?”라며 낙하산처럼 특수본에 떨어진 유학파 범죄분석관 호룡(주원)을 비꼰다. 그렇게 <특수본>은 동료 경찰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성범과 호룡, 두 성격 판이한 형사들의 버디무비다. 이런 유의 버디무비가 대부분 그러하듯 잘난 호룡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성범의 텃세는 수많은 장르영화에서 보아온 그대로다. “군대는 갔다 오셨나? 혹시 FBI에서 공익근무하다 온 건 아니지?”라며 약 올리고 현장 경험이 부족한 호룡에게 “자신없으면 들어가서 인형 눈깔이나 붙이고 계시든가”라고 자극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주원이 캐스팅되기 전, ‘성범과 호룡 중에 고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호룡은 그전에 했던 TV드라마 <닥터 챔프>와 비슷할 것 같아서” 성범을 택했다는 얘기다. 물론 “성범이 더 주인공 같아서”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후 호룡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고, 친형처럼 따르던 인무(성동일)에게 얽힌 비밀에 다가서면서 두 사람은 한몸이 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성범이 안과 밖을 파악하기 쉬운 남자는 아니다. 그가 보기에 성범은 ‘과거가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에도 기댈 것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결국 <특수본>은 성범의 내면의 변화를 따라가는 영화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수사가 이상한 난관에 부딪히고 결국 가족 같은 선배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른다. 선배의 누명을 벗기려는 시도는 급기야 자신까지 누명을 쓰게 되는 상황을 야기한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누명을 벗겨도 내가 벗기고, 잡아 처넣어도 내가 넣어”라며 성범은 진짜 짐승이 된다. “영화에서 내가 사람을 제일 많이 죽인 것 같다”며 웃는 엄태웅은 “<특수본>은 어떤 그리움 같은 게 있는 영화다. 인무 형을 의심하면서 얼마간 폐인처럼 지내고 나중에는 세상을 떠난 형의 사진을 태워서 소주잔에 재를 담아 마실 때 울컥했다”고 말한다. “그런 감정들이 힘들어서 촬영 끝나는 날 영화에 대한 꿈을 꿨다. 촬영하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고도 덧붙인다.
연기와 예능, 두 마리 토끼를 잡다
지금의 그를 말하는 데는 ‘영화배우 엄태웅’과 더불어 ‘<1박2일>의 엄태웅’을 지나칠 수 없다. <1박2일>은 TV드라마를 통해 친숙한 것과 별개로 별로 드러난 것 없던 배우 엄태웅의 이모저모를 그대로 드러낸 예능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가 중간에 투입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볼 만큼 자연스레 프로그램에 녹아들었다. “전에는 그냥 1박2일 놀다와야지, 라는 편한 마음으로 갔는데 사실 전혀 편하지 않았다. 영화배우라는 근육과 전혀 다른 근육을 쓰는 거라 생각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그는 “이제는 정말 낄낄대면서 하게 된다. 정말 쉬었다 오는 느낌이다. 궁극적으로는 연기에도 뭔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1박2일>에 처음 출연하던 시기가 바로 <특수본>의 스케줄과 겹치던 때였다. 양쪽 모두 얼마간의 불편함으로 다가오며 다소 혼란스런 감정이 찾아올 때도 있었지만 그래서 양쪽에서 서서히 자기 자리를 찾아나가던 쾌감은 더욱 컸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때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내년이면 또 다른 엄태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정려원과 함께 시한부 커플의 말랑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네버엔딩 스토리>가 1월경 개봉하고, 현재는 <불신지옥>(2009)을 만든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건축학개론>을 촬영 중이다. <건축학개론>에 대해서는 “<시라노; 연애조작단>처럼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로맨틱코미디가 강하진 않고 상처가 좀더 깊은 이야기다. 감독님과도 잘 맞는 거 같아 둘이 깐죽대며 잘 놀고 있다”고 만족감을 표한다. 그렇게 <건축학개론> 집 세트가 있는 제주와 서울을 오가고 또 1박2일의 여행을 떠나면서 엄태웅은 역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늘 보아오던 변함없는 미소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