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그렇듯, 나도 한동안 착각에 빠져 살았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나는 옷을 참 잘 입어.’ ‘말은 안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사람, 내 옷 입는 감각에 감탄하고 있을걸?’ 그러나 또 모두가 그렇듯, 그렇게 자부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켕기는 면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맨 먼저 다짐한 것이 옷장을 정리하겠다, 어울리지 않는 옷부터 삶에서 제거하겠다는 것이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둔 지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도 내 옷장은 여전히 그 상태, 언제 샀는지도 알 수 없는 옷과 도대체 이걸 왜 샀지 싶은 옷과 평상시엔 거기 있는지도 몰랐던 옷들로 뒤범벅이 된 카오스 상태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내일은 꼭 옷장을 정리해야지’ 생각하다 막상 다음 날이 되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당장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옷장 정리는 내일 하지 뭐’ 생각하는 날들이 근 한달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옷장 정리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어쩌면 옷장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옷들을 마주하는 일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저지른 과오, 어리석은 욕심, 남들은 물론이고 자신에게조차 부린 허세와 마주하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 아닐까? 필요 없는 옷, 맞지 않는 옷, 그리하여 내 삶을 오히려 초라하게 만드는 옷으로 가득 찬 옷장이야말로 지난 몇년간의 내 삶을 비추는 거울임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문득, <아이 엠 러브>를 다시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질 샌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최고의 디자이너 중 한명인 라프 시몬스가 옷을 디자인했다는 사실만으로 잔뜩 기대를 하고 극장을 찾았다가 <섹스 앤 더 시티>는 물론이고, <가십걸> 같은 TV시리즈보다도 덜 화려해서 실망하고 돌아섰던 영화. 최고의 소재, 간결하고 심플한 실루엣, 꼭 필요한 곳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개의 액세서리가 단정하면서도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주던 엠마(틸다 스윈튼)의 옷차림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이었는지, 욕심 많고 어리석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였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을 때, 모두가 우려하고 염려했던 것처럼 어쩌면 나는 한달 새 많은 걸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다. 많이 더하는 대신 과감하게 빼내고 꼭 필요한 것만 제자리에 있게 함으로써 기품을 갖게 된 틸다 스윈튼의 옷차림처럼 품위있는 삶도 갖고 있는 걸 놓을 줄 아는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으니까. 자, 이제 그만 자자. 내일은 꼭 옷장을 정리해야지. 그런 다음, DVD 플레이어에 <아이 엠 러브>를 걸어두고 와인 한잔 마셔야지. 군더더기가 정리된 내 삶과, 삶에는 이미 가진 좋은 것들을 다 버리고라도 얻어야 하는 더 큰 가치가 있음을 깨달은 엠마의 삶을 위해 건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