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본>의 경찰서장 정진영은 빈틈없어 보이는 남자다. 경찰을 무시하는 국회의원들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을 만큼 강직하고 사사건건 후배들부터 챙긴다. 성격은 판이하지만 TV드라마 <브레인>에서 연기하는 ‘김상철’ 의사 역시 그렇다. 허름한 차림새에 의사로서의 권위는 온데간데없이 오직 환자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두 캐릭터 모두 정진영이라는 배우에게 기대하게 되는 신뢰에 딱 부합한다. <닫힌 교문을 열며>와 <초록물고기> 등을 시작으로 <와일드 카드> <왕의 남자>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참 많은 변화를 겪었고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너무도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정진영에게 2011년은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자’는 마음으로 살아온 해였다. 이쯤에서 그에게 개인적인 중간점검의 의미를 캐물었다.
-<특수본>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작품인가.
=영화사 수박의 신범수 대표와 <이태원 살인사건>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제발 완성해서 극장에 걸어보기만이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 만든 영화다. 그렇게 어렵게 영화를 만든 정이랄까, 그런 믿음 같은 게 있어 더 친해졌다. 그러면서 다음에 또 같이 하기로 한 작품이 몇개 있었다. 사실 <특수본>은 같이 하기로 한 영화가 아닌데 캐스팅의 마지막 조각을 내게 부탁한 것 같다. 신범수 대표가 삼고초려로 간곡히 부탁하고 나중에는 엄태웅의 소속사 사장님과 황병국 감독까지 돌아가며 전화를 하니 안 할 수가 없더라고. (웃음)
-조연이긴 하지만 사건의 열쇠를 쥔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 혹은 이전 영화들과 사뭇 다른 무게감의 강직하고 위엄있는 경찰서장이라는 캐릭터에 끌린 건가.
=배역이 끌려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전체를 책임지지 않는 주연급 배우가 아니라 마음 편하게 접근한 면은 있다. 원래 난 현장에서는 아주 순종적이지만(웃음) 크랭크인 전에는 아주 꼼꼼하게 캐릭터를 분석하고 토론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는 게 옳지 않다고 봤다. 황병국 감독에게 버디무비로서 두 형사들의 얘기가 중요하지 내 역할에 진을 빼면 안된다고 했다. 나를 배려하면 전체 이야기가 무너진다고도 했다. 다른 중심부터 세우고 얘기하자고 했다. 감독에게 믿음을 주고픈 생각이었지.
-황병국 감독은 기본적으로 능청스레 유쾌한 면이 있고, 자신이 직접 연기도 하며 입담도 좋은데다 또래 남자 감독들에 비해 마른 체형의 남자라, 왠지 당신과 많은 영화들을 함께 작업한 이준익 감독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황병국 감독은 촬영 전에 신범수 대표와 함께 만난 게 처음이다. 같이 술 마시자고 해서 만났는데 황병국 감독이 신 대표 통해서 제발 내가 출연할 수 있게 졸라보라고 했다더라. 이준익 감독과 닮았는지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음, 근데 다르다, 전혀 다르다. (웃음)
-말이 나온 김에 묻는 건데 이준익 감독과 연락을 하고 지내나. <평양성> 개봉 당시 ‘이 영화가 흥행하지 못하면 영화계를 떠나겠다’는 은퇴 선언을 한 이후로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그 은퇴 선언에 대해서는 올해 둘이서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게 <평양성> 전에 만든 <님은 먼곳에>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주지 못해 이번에는 꼭 잘돼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는 의미로 농반진반 한 말이다. 그런 말이 뭐 정치인의 공약처럼 구속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얘기가 커지다보니 스스로 구속력을 느끼는 것 같더라. 요즘 만나보니 굉장히 영화를 찍고 싶어 하더라. 이준익은 영화계를 떠날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을 거고.
-<특수본>은 <부당거래>나 <도가니> 등 최근 우리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일종의 고발영화의 면모가 있다.
=우리 사회가 그러니까 그렇게 그대로 담기는 거 아닐까. 딱히 과장이 아니다. <특수본>의 라스트 시퀀스는 누가 봐도 용산 참사를 작게 묘사한 거다. 원래 시나리오의 라스트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황병국 감독이 용산 참사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제대로 따로 만들고 싶었지만 <특수본>을 먼저 하게 되면서 미니멀하게 그런 식으로 담아낸 거다. 다른 나라에서는 SF라고 느낄 법한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참 흔하게 일어난다.
-요즘 TV드라마 <브레인>에 대한 반응도 많이 접할 것 같다.
=일단 캐릭터가 재밌다. 지금까지 TV드라마는 <바람의 나라>와 <동이> 같은 사극에 출연해서 현대물을 해보고 싶었다. <평양성>을 끝내고 TV단막극 <영도다리를 건너다>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튼 <브레인>의 의사 역할을 위해서 수술도 참관하고 의사들의 평소 일상도 익혔다. 기본적으로 대사를 주는 대로 외워서 하는 거지만 생활에서 쓰던 대사들이 아니라 입에 붙기까지 좀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클라리넷을 부는 장면이 있는데 그거 레슨받는 게 사실 가장 힘들었다. 3회에 나오고 그 뒤로 한두번 더 분다. (웃음)
-이후 흐름은 어떻게 되나.
=신하균이 정말 이번 드라마에서 독기를 품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무섭다. 이제 본격적으로 갈등이 구체화될 거다. 20부작의 이야기가 꽉 차 있다. 그런데 TV드라마를 하면 많이들 알아본다. 아무래도 내 캐릭터가 좋아서 그런 것 같은데 <왕의 남자> 때도 들어오지 않았던 CF가 들어왔다. 드라마에서 신경외과 의사인데 구강청정제 CF다. (웃음)
-과거 TV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올해는 그와 성격이 상당히 다른 <휴먼서바이벌 도전자>(이하 <도전자>)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부산영상원회 부위원장직도 흔쾌히 수락했다. 배우 정진영이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는 모양새로 보인다.
=사실 부산영상위원회 부위원장 같은 직책은 예전 같으면 안 했을 거다. 물론 부산영상위원회 조종국 사무처장의 압력이 가장 컸지만(웃음) 어느 순간 안 해본 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도전자>라는 프로그램도 그렇다. 다른 예능프로그램도 그렇고 ‘못할 게 뭐 있나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나이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런 변화에 어떤 계기가 있었나.
=말 그대로 ‘낼모레 쉰’인데, 나이 들며서 좀 무던해지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뭔가를 지키고 싶어 하면서도 딱히 나서서 뭔가를 하고 그러진 않았다. 그렇게 뭔가를 안 하면서 내 정체성을 찾으려 했는데 이제는 뭐 이것저것 해보고 평소 익숙하지 않은 것에도 적응해가면서 내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정도면 됐다’고 하기엔 ‘인생은 한번이니까’라는 생각으로 안 해본 것도 해보자, 다 해보자, 다짐한다. 그래서 몇몇 기자들이 ‘<특수본>의 경찰서장은 조연인데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같은 질문을 하면 오히려 이상하다. 난 한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다. 분량이 어떻건, 캐릭터가 어떻건 마음에 들면 하는 거지 뭐.
-연기 생활 20주년 뭐 그런 얘기도 했는데 ‘배우 정진영’에 대한 중간점검 같은 걸 한다면.
=엄밀히 얘기해서 난 소리가 나지 않는 배우다. 인터넷 기사를 봐도 예전에는 ‘장진영’이라는 오타가 많이 났고, 요즘은 또 종종 ‘정재영’으로 오타가 난다. (웃음) 가끔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전 슬럼프도 전성기도 없었어요’라고 답한다. 어딘가 절박한 것 없이 터벅터벅 20년 가까이 걸어온 것 같다. 물론 열심히 하긴 하지만 딱히 연기력이 대단한 배우도 아닌데 고맙게도 오래도록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 수 있었다. 관객이 그런 나를 꾸준히 믿어주시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행운이라는 생각도 들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지금껏 출연한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 한편을 고른다면.
=<날아라 허동구>다. IQ 60의 아들을 둔 치킨집 홀아비 사장으로 나왔는데 <왕의 남자>보다 더 좋았다. 이준익 감독한테도 그렇게 얘기했다. <왕의 남자>보다 <허동구>가 더 좋다고. (웃음) 흥행이 안돼 더 안쓰럽고 짠하게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심지어 홍보를 위해 TV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 치킨 배달부로 카메오 출연한 적도 있다. 예능 울렁증이 엄청 심할 땐데도 어쨌건 연기를 하는 거니까 괜찮다고 해서 나왔었다.
-TV단막극 <영도다리를 건너다>도 <날아라 허동구>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
=맞다. <영도다리를 건너다>에서는 집을 떠나고 싶어 하는 딸(정은채)과 함께 사는 작은 통통배 선장으로 나왔다. 내가 좀 그런 캐릭터나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가족애가 살아 있는 휴먼드라마라고나 할까. 지난해 12월30일에 대본을 받았고 1월에 <평양성>이 개봉하면서 한창 바쁠 때였지만, 무조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홍보 활동하다가 다시 부산 내려가서 촬영하고 그랬다. 그렇게 서울, 부산, 왔다갔다하며 힘들게 촬영하고 그러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혹시 볼 기회가 있으면 꼭 보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로 아끼는 작품이다.
-모 포털사이트에 유명인이 자신의 서재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는데, 자신의 집이 아니라 동네 공공도서관을 소개했더라. 신선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어서 부끄럽긴 한데, 그 역시 예전에 안 해보던 걸 해보자는 생각으로 한 거다. 독서 캠페인 같은 느낌이 있으니까 취지도 좋은 것 같고. 물론 내 집의 서재를 소개할 수도 있지만 다들 실물을 안 보고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 시대에 나만의 도서관 진흥 운동을 하고 싶었다. 촬영한 곳도 실제로 책을 많이 빌려 보는 도서관인데, 누구나 찾아보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도서관이 있다는 걸 알 거다.
-이제까지 인터뷰한 걸 보면 인문학자의 풍모가 있다. 실제로 서울대 국문학과를 나오기도 했고, 자신의 연기 생활에 인문학이 끼친 영향이 크다는 얘기도 많이 했다. 요즘 영화 현장이나 여러 곳에서 워낙 변화가 크다 보니 느끼는 낯섦 같은 게 있을 거 같다.
=변화를 경멸하고 거부하면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특수본>의 소재 같은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도 우리 사회고 반면에 느닷없이 등장한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 같은 것이 쾌감을 주는 것도 우리 사회다. 그나저나 요즘 <나꼼수> 때문에 미치겠다. 차 안에서 몰입해서 듣다가 고속도로에서 인터체인지를 그냥 지나친 적도 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어디서 사회를 보는데 그 인간들처럼 잘난 척하면서 말하게 되더라. 사람들 화법까지 바꾸는 것 같다. (웃음) 살다 보면 세상이 팍팍한 것 같으면서도 뜻하지도 않게 재밌는 일은 늘 생기기 마련이다. 세상의 변화에 너무 쓸쓸함만 느끼며 살면 바로 꼰대가 된다. 늘 명심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