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김효진] 캐릭터를 살리는 이타적 유전자
2011-12-08
글 : 김성훈
사진 : 오계옥
<창피해>의 김효진

결혼식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신부 특유의 분주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12월2일 있었던 배우 유지태와의 결혼식을 준비하랴(인터뷰는 결혼식 전에 진행됐다), 차기작인 임상수 감독의 신작 <돈의 맛>을 촬영하랴, <창피해>를 홍보하랴, 몸이 세개라도 모자랄 텐데 김효진은 외려 차분해 보였다. “결혼 준비는 틈틈이 하고 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도 많이 받고 있고. 오빠(유지태) 혼자 준비하는 거 아니냐고요? 오빠도 장편영화 연출 준비로 바빠요.” 인터뷰 전, 김효진의 매니저에게 결혼 관련 질문은 가급적 자제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차였다. 아무래도 소속사나 영화홍보사는 ‘새 영화’보다 ‘결혼’ 위주로 기사가 노출되는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창피해>가 완성된 지 거의 2년 만에 개봉하는 것이 아닌가. “상업영화가 아니잖아요. 감독님과 제작자가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막상 2년이나 걸리니까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극장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너무 좋았어요.” 배우가 자신의 영화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김효진의 이 말은 단순한 관심이나 애정 차원에서 한 말은 아닌 듯했다.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만큼 김효진에게 <창피해>는 “굉장히 빠져서 찍은 영화”였다.

영화 속 대사를 빌려 표현하자면, <창피해>에서 김효진이 맡은 ‘윤지우’는 “이타적인 유전자”의 소유자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감정을 자신의 그것보다 더 배려하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고, 그런 사랑을 믿지 않고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강지우’(김꽃비)로부터 상처를 받는 여자다. 화나면 화나는 대로, 기분 좋으면 좋은 대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뱉는 강지우와 달리 윤지우는 상처를 받으면 받는 대로 감정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는 답답한 여자이기도 하다. “원래 하고 싶은 역할은 꽃비가 연기한 강지우였어요. 처음에는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강지우가 속시원하고 좋았는데, 감독님과 대화하면서 감정을 누르는 윤지우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 매력적이라는 표현은 윤지우에게서 실제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어 익숙했다는 뜻은 아닐까. “저도 윤지우처럼 많이 맞추고 참는 편인데, 억지로 참고 넘어가진 않아요. 할 말은 해요. 너무 답답한 사람은 싫어요. 그런 사람은 나중에 한꺼번에 쏟아내잖아요.”

영화의 의외성을 맛본 <창피해>

“역할에 빠져서 찍은 영화”라는 김효진의 이 말을 ‘윤지우가 되려고 노력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김효진은 거의 모든 장면을 김수현 감독과 함께 만들어갔다. 그렇다고 김수현 감독이 김효진에게 캐릭터와 연기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한 것은 아니었다. “감독님께 물어봐요. ‘이 장면은 지우가 이런 감정인 게 맞죠?’라고 물으면 ‘허허허’ 하며 그냥 웃으세요. 그러면 나 혼자 막 고민하고. 그 뒤로 윤지우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영화 속 지우의 모습은 실제로 꽃비와 친해지면서 느낀 감정을 따라갔어요. 만약에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의 의미가 무엇인지 따져갔다면 캐릭터가 붕 떴을 거예요.” 캐릭터의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만들어가는 보람은 분명 있었다. 감독의 지시에 충실한 연기로는 경험할 수 없는 ‘영화의 의외성’을 겪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식당에서 밥을 먹잖아요. 원래는 쓸쓸한 표정으로 밥을 먹는 거였는데, 행복한 표정으로 바뀌었어요. 그때 제 마음이 행복했던 것 같아요. 또 꽃비한테 안아달라고 갈구하는 장면에서 담담하게 키스를 하는 장면이 시나리오에 있었는데, 막상 촬영할 때 막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감독님께서는 표현이 과한 게 아니냐며 우려하셨지만 나중에 모니터를 확인하시고는 괜찮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나오는 배우의 감정이 때로는 극중 인물의 성격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일 만한 표현이다.

“지금은 너무 전형적인 역할은 재미없다”지만 김효진은 ‘스타’로 출발한 배우다. 16살 때 한 패션지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런웨이, 잡지, CF 모델을 비롯해 시트콤 <논스톱>(2000)에 출연하면서 청춘스타로 활약했다. 이후, 스크린 데뷔작 <천년호>(2003)를 시작으로 <누구나 비밀은 있다>(2004), <생날선생>(2006), <맨발의 기봉이>(2006)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필모그래피만 보면 배우로서 모험이나 도전을 했다기보다 기획성이 강한 상업영화에서 전형적인 청춘 여성 캐릭터를 맡아 경력를 쌓았다는 인상이 강하다. 관객에게 ‘김효진’이라는 이름 석자를 각인시킨 작품이 거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영화를 한다는 게 막연히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들어오는 작품 중 제일 하고 싶은 걸 고른 건데, 골랐던 작품들이 그런 영화였고. 그 영화들을 촬영하면서 굉장히 재미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작품이 거듭할수록 어떤 작품을 하는 것이 배우로서 도움이 되는지를 알아갔던 것 같아요.”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부정하기보다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을 보면 김효진은 자신의 변화를 긍정할 줄 아는 배우인 것 같다.

변화를 긍정할 줄 아는 배우

‘스타’가 아닌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김효진은 옴니버스영화 <오감도>(2008)를 만났다. 민규동 감독이 연출한 <끝과 시작>에서 그는 선배(엄정화)의 남편(황정민)과 바람을 피우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선배에게 발각되는 철부지 후배 역할을 맡았다. 웃지 못할 상황에 처하는 역할도 역할이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김효진 특유의 표정이 제법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단편임에도 뭔가 새로운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흥행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끄집어내줄 수 있는 감독님을 만나고 싶었어요. 민규동 감독님과 작업하는 내내 즐거웠어요.” 이후 선택한 작품(김수현 감독의 <창피해>,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을 보면 ‘어떤 감독이냐’가 그가 작품을 선택하는 결정적인 기준으로 작용했을지도.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음…” 하며 한참 생각하다가 어렵사리 한마디씩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지금은 남편이 된 유지태와 인터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순간 들었다. 보통 커플들이 데이트할 때 인생 상담하듯 이 커플 역시 서로에게 연기 상담 같은 걸 하지 않을까 궁금해졌다. “연기에 대해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은 오빠가 어렸을 때 했던 거예요. 저는 굉장히 연기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연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오빠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아요. 결혼이 여배우한테 안 좋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은데, 결혼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아요. 둘 다 배우라 서로에게 시너지 효과를 줄 것 같고. 그게 행복인 것 같아요.”

다소 짓궂은 표현이긴 하나 김효진은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이미 기혼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유지태 말고 또 다른 남자라도 숨겨두었다는 말인가. 큰일날 소리다. 앞에서 언급한 <돈의 맛>에서 그는 부잣집 대가족의 딸이자 ‘영작’의 아내 ‘나미’ 역을 맡았다. 나미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기도 하다. 맞다. <하녀>에서 은이(전도연)의 딸 이름이다. “그 나미가 자란 버전이 <돈의 맛>이에요. 겉으로는 우아하지만 언제 ‘빵’ 하고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대가족 이야기인데요, 이런 캐릭터는 또 처음이에요.” 배우보다 배우의 연기를 더 많이 연구하는 임상수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김효진은 “다시 공부하는 기분”이라고 한다. <창피해>처럼 또 캐릭터에 깊이 빠지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김효진은 정색하며 대답한다. “아유, 이 역할은 흠뻑 빠지면 힘들어요. 좀 떨어져서 해야 해요. 결혼을 앞두고 기혼자 역할을 하는 게 참 재미있네요. (웃음)” 분주함은 느껴지지 않지만 발랄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답은 신부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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