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서는 현재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최근 ‘완고’를 끝낸 이 시나리오에 대해 그녀는 “내가 보고 싶고, 연기를 하고 싶은 영화를 찾다보니 결국 직접 쓰게 됐다. 영화화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써본 것”이라고 말했다. <올드보이>로 주목받은 이후, 여배우로서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을 찾기보다는 취향과 고집으로 작품을 선택해온 그녀다운 대답이다. 한편 윤진서는 영화 <결정적 한방>에서 공무원인 하영을 연기했다. 하영은 전작들의 캐릭터와 다르게 밝고 씩씩한 여자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에서 약간 비껴나 있는 조연이다. 직접 만들고 싶은 영화를 꿈꾸고, 이전과는 다른 캐릭터를 선택한 여배우의 속내가 궁금했다. 지금 윤진서가 생각하고 있는 배우로서의 앞날은 어떤 모습일까.
-<도망자 Plan B> 이후 어떻게 지냈나.
=여행 다니다가 <결정적 한방>을 찍고 다시 여행을 갔다. 인도도 다녀왔고 스페인부터 그리스,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를 돌았다. 바쁘게 보낸 건 아닌데, 멍하게 보낸 시간은 없었다. 사실 멍하게 있는 걸 되게 좋아한다. 홍대 근처에 만든 카페도 그런 용도였고. 태생이 한량인 것 같다. (웃음)
-<결정적 한방>의 하영은 전작과 다르게 밝은 캐릭터다.
=그 점 때문에 선택했다. 내가 나이 이야기를 하는 게 좀 웃기기는 하지만, 어쨌든 갈수록 따뜻하고 온기있는 게 좋아지더라. 20대 초반에는 차갑고, 도도하고, 시크한 것들만 눈에 들어왔는데 말이다. 그때는 따뜻한 느낌의 영화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갈수록 관심이 생기더라. 난 직업이 배우인데, 어떤 영화든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고. 영화적으로 미덕이 있는 작품에 출연할 수 있는 거고, 정말 후진 영화를 찍어서 욕도 먹을 수 있는 거니까. <결정적 한방>을 선택할 때에는 편하게 연기하면서 애드리브도 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도망자 Plan B>의 선택도 비슷한 맥락이었을 것 같다. 아무래도 두 작품의 캐릭터 모두 전작들의 성격과는 다르니까.
=그 드라마가 끝난 뒤 또래 친구들이 나를 밝은 이미지로 봐주더라. 그런데 사실 또 많은 사람들은 “너의 매력은 그런 게 아니야”라고 한다. 아직은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작품을 선택하면서 ‘너의 매력은 그런 게 아니야’라는 말에 영향을 받은 적이 있었나.
=아무래도 조금은 있다.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이 나를 지배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는 되게 답답했다. 이것도 저것도 해보면 되는 거고, 내가 부딪히고 내가 깨지는 건데 왜 자기들이 그러지? (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정신이 확 들더니, 생각이 바뀌게 되더라.
-주위에서 말하는 윤진서의 매력이 뭐였나.
=많이 이야기하는 건 아무래도 <올드보이>다. 묘한 섹시함이 매력이라고. (웃음)
-<올드보이>의 캐릭터가 윤진서를 알리는 동시에 신비화한 건 아닐까? 그 때문에 제안이 들어오는 캐릭터도 한정적이었던 건 아닐까.
=묘한 느낌의 캐릭터들이 정말 많았다.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한편으로는 배우 본인의 의지도 있었을 것 같다. 20대 초반에는 지금보다 더 꿈이 많은 신인배우였을 테니까.
=그때보다 지금 더 많은 꿈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때와 다르게 여유가 있기 때문일 거다. 글쓰는 사람도 되고 싶고 영화도 만들고 싶다. 감독을 하고 싶은 건 아니고, 일단 현재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한 2년 정도 썼는데 이제 완고가 나왔다.
-‘완고’라고 말하는 걸 보니,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게 있나 보다.
=아니다. 그냥 완고만 나왔다. 감독은 정해졌다. (웃음) 정재은 감독님의 팬이라 직접 그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감독님이 재밌어하셨다. 물론 좋은 말씀만 하신 건 아니다. “그런데 진서야, 시나리오를 이렇게 쓰면 안돼. 더 써야 돼.” (웃음) 그래서 나중에는 시나리오작가도 따로 고용했다. 3명이서 한달에 한번씩 회의를 하면서 쓴 게 2년이 된 거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소개해줄 수 있나.
=두 여자가 등장하는 소품 같은 영화다. 예전에 잠깐 뉴욕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 나를 열여섯 꼬마로 보더라. 햄버거 가게를 가도 덩치가 큰 아저씨들 틈에 있다가 한참 뒤에야 주문한 적도 여러 번이다. 한번은 완전히 인종차별이라고 열받은 적도 있었다. 사실 인종차별이 아닌데 말이지. 오히려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이왕이면 <고양이를 부탁해> 같은 영화를 하고 싶기도 했고. 아무튼 완고를 보니 정말 재밌더라. 누가 투자를 해주면 좋겠다. (웃음)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생각하는 롤모델도 있나.
=자비에 돌란의 영화를 보고는 정말 놀랐다. 얘는 도대체 뭔가, 싶더라. (웃음) 89년생인데 각본·감독·미술·의상·배우까지 다 했더라. 그런데 나는 돌란처럼 천재는 아니니까, 감독님이랑 작가를 섭외한 거지. (웃음) 하지만 연출부도 하고, 의상도 해보고 싶다.
-<결정적 한방>의 하영은 조연이다. 꼭 주연만 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의외다.
=사실 그런 건 별로 고민을 안 하고 산다.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편이다. 행복하려고 영화를 선택한 건데, 굳이 그런 고민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물론 배우에게 일이 중요하고, 일은 곧 돈문제다. 돈을 못 벌면 떠날 사람이 떠나고, 카페도 처분해야 하고, 회사에 있기도 쉽지 않은데, 그러면 뭐 혼자 다 하면서 살아야지. (웃음)
-조연을 연기하는 윤진서를 보면서 떠올린 건, 부산영화제에서 본 <아리 아리 한국영화>였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질문을 던지는 윤진서는 배우로서의 입지, 그리고 여배우로서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때가 고민이 많던 시기이기는 했다. <비밀애>가 끝난 뒤였는데, 여배우로 사는 게 행복하지 않더라. 난 행복하려고 영화를 택했고, 여배우가 됐고 이름이 알려졌고, 원하는 대로 영화를 찍는데 왜 이렇게 불행하지? 이런 생각이었고 그 이유를 찾는 와중이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이유를 찾은 건가.
=어느 정도는. 일단 내가 원하는 영화를 찍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비밀애>를 예로 들자면, 사실 나는 여성감독님이 여성의 시각에서 그리는 여성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선택한 영화였다. 그런데 나중에 남자감독님으로 바뀌면서, 시선이 달라지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됐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투자사의 횡포도 있었다. ‘벗어라. 이미 (노출에 대해서는) 계약 끝났잖아. 그래도 벗어라. 계약 끝났잖아. 그래? 그럼 대역 쓸 거야. 왜 대역을 써? 몰라, 우리는 대역 데리고 다 찍었어. 영화에 넣을 거야. 우리 마음이야’, 이런 식이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거다. 여배우로서 하고픈 작품을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뭔가를 하나 찾았는데, 그것마저도 알맹이가 빠져버렸으니까. 그래서 불행하게 느낀 것 같다.
-현실적으로 볼 때, 여배우로서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동시에 의지를 가지고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영화들은 많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도 윤진서란 배우는 어떻게든 그런 영화를 찾으려고 한 경향이 있다. 그런데 남자배우에게 의존하더라도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없나.
=그런 건 없다. 사람들의 기대가 엄청나게 많았을 때는 물론 수많은 제안이 있었다. 드라마부터, 가요프로그램 MC까지 정말 많았는데, 그런 제안에 관심이 없었다. 일단 관심이 있어야 할 수 있지 않나. 그때의 나는 프랑스영화만 보고 살던 20대 초반의 영화 마니아일 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정적 한방>의 경우는 나름대로 타협을 한 것도 있다. 영화에서 내가 원하는 게 세 가지라면, 그걸 다 충족시키는 작품을 찾으려고 하다가는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을 잃을 수도 있겠더라. 배우인 이상 1년에 한편이라도 연기를 해야 배우가 직업인 거니까. 20대가 나만의 취향이 강한 시기였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유연해진 것 같다.
-다음 작품은 뭐가 될까.
=아까 말한 정재은 감독님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웃음) 그거 말고는 없다. 원래 출연하려던 영화가 있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역시 여성이 중심이 되는 코미디이다 보니까 투자가 어려운 것 같다. 남자 2명이 메인인 영화였으면 그럴 리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 취향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또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윤진서네?” 이러는 것보다는 소수의 팬들이 나를 진짜 좋아하는 게 더 좋다. 물론 그렇게만 살 수 있는 현실이 아니니까,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거지. 나도 힘든 건 있다. 그래도 나름 소신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는 거다. 돈은 못 벌 수 있지만, 일단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많은 시행착오와 고민 끝에 지금처럼 안정을 찾은 게 1, 2년 된 거 같은데, 쓸데없는 고민을 안 하니까 얼굴도 평안해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