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시체와 함께 드라이브를
2011-12-15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혼성모방 시대의 미학의 운명 <드라이브>

<드라이브>에 대한 평가는 충분한 듯하다. 물론 호평 일색이다. 몇주 먼저 <드라이브>에 대한 글을 쓸 기회가 있었다면 나 역시 호평의 글을 썼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드라이브>는 첫 번째 감상과 두 번째 감상간에 너무도 큰 간극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나는 첫 감상에서 너무나 매혹된 것과 달리, 두 번째 감상에서는 이전의 매력이 나의 눈을 현혹하는 신기루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두 번째 감상에서도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연출력에 여전히 감탄한 것은 사실이나, 그마저도 여러 인용들을 매끄럽게 누비는 바느질 솜씨에 대한 것으로 제한되는 듯한 느낌마저 일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러한 신기루에 현혹된 것일까? 이 글은 첫 번째 감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두 번째 감상의 결과다.

가면의 영화, 대역의 영화

<드라이브>에는 짧게나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있다. 영화 도입부의 카체이싱 장면 이후, 우리는 경찰복을 걸친 주인공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그가 혹시 낮과 밤의 이중생활을 하는 경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순간적으로 품게 된다. 이내 그가 경찰역을 맡은 스턴트 대역 배우임이 밝혀지면서 그 의심은 금세 풀리지만, ‘이름 없는’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의 직업 중 하나가 할리우드의 대역 배우라는 사실은 이 영화의 정체성과 관련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남자가 쓰는 가면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표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할리우드 스턴트 대역 배우라는 설정이 이름 없는 드라이버의 정체성과 관계된 것이라는 점은 너무나 명확해 보인다. 영화 종반부의 칼부림 장면에서 사람의 형상 대신 그림자로 뒤섞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가 담아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드라이브>는 가면으로 부정하고 억눌렀던 자신의 본성을 끝내 마주하게 된 주인공에 대한 영화다. 자신의 천성을 거역하지 못하는 전갈의 우화의 반복. 드라이버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아이린(캐리 멀리건)에 대한 감정과 자신이 소망했던 환상에서 소외된다. 이러한 면에서 <드라이브>는 반영웅의 모험을 뒤쫓는 전형적인 미국영화이자 소외에 대한 일종의 자기 연민의 영화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설정을 좀더 다른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의도와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편이 <드라이브>의 영화적 성격과 관련해 더 중요한 함의를 갖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면이 그 뒤편의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만약 가면 뒤편에 아무것도 없다면? 달리 말해, 가면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그 뒤편에 무언가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을 만드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면 어쩌겠는가? 이름 없는 드라이버는 밝혀지지 않는 여러 의문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그에 대한 궁금증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는 듯하다. 또한 시종일관 풍기는 비밀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의 과거에 관해 조금의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그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발견되는 영화적 인용의 목록 속에서 그의 정체성과 관련한 단서를 끊임없이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이름의 자리가 텅 비워진 주인공은 <사무라이>의 제프 코스텔로(알랭 들롱)가 되기도 하고, <택시 드라이버>의 트레비스(로버트 드 니로), <드라이버>의 드라이버(라이언 오닐), 심지어는 <셰인>의 셰인(앨런 래드), <황야의 무법자>의 이름 없는 자(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으로 끊임없이 증식된다. 빈자리의 유혹. 물론 이는 내가 만든 신기루다.

이러한 면에서 이름 없는 드라이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역 배우’다. 그런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으로부터 상기되는 과거 영화의 어떤 주인공을 대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그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침묵이나 무표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길게 입을 다무는 것 역시 그리 대단한 비밀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는 스스로를 비워냄으로써, 달리 말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됨으로써 모든 것이 되는 역설적 캐릭터다. 그런 그가 가면을 벗어 자신의 진실, 즉 광기로 물든 괴물의 형상과 마주하게 된다는 표층적 차원의 이야기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서사적 차원에서 이러한 해석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온갖 것들을 인용하는 <드라이브>의 성격을 염두에 둔다면, 대역의 가면을 벗는 순간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에 불과하다. 이름 없는 드라이버에게는 가면(대역)이 전부이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인용의 퀼트로 완성된 가면은 영화적 경험에 내재한 공허함을 잊게 해주는 최음제다. 물론 포스트모던한 시대를 맘껏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된 자들이라면, <드라이브>는 충분히 취할 만한 가치가 있다.

<드라이브>의 엘리베이터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다. <열혈남아>(왕가위, 1989)의 공중전화부스 키스신에 버금가는 낭만적 사랑과 B급 할리우드 하드고어 영화의 잔혹성을 동시에 표출하는 이 장면은 <드라이브>의 혼성모방적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둘 중 하나가 아닌, 그것이 동시에 동일한 표면 위에 펼쳐질 때 <드라이브>는 그 매력을 발산한다. 김도훈이 지적(<씨네21> 829호)한 바 있는, 유럽 예술영화적인 분위기와 할리우드 장르의 혼합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둘 중 하나였다면, 이 영화는 그저 평범한 영화에 머물렀을 것이다. <드라이브>는 온갖 인용을 통해 이러한 혼합을 실현한다. <드라이브>는 리모컨으로 TV를 이리저리 원격 조정해서 화면 위로 펼쳐지는 여러 영화를 한편의 영화로 녹여낸 작품에 가깝다. 폴 들라니가 리모컨을 가리켜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도구라 불렀던 것처럼, 여러 영화의 직접적 인용뿐만 아니라 핑크색 타이틀,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영화음악의 활용,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도시의 야경 등 1980년대 할리우드영화의 지표로 넘쳐나는 <드라이브>는 자신이 과거의 영화 유산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드라이브>가 보여주는 세계는 상투적 이미지와 영화적 상황의 집합이다.

‘스타일상 중요한 것이라면’ 과거에 유행했던 모든 것을 끌어다 마구 뒤섞어버릴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지전능함은 <드라이브>의 궁극적 동력이고, 이로 인해 상투적인 것들이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살찌운다. <드라이브>는 태생적 뿌리가 각기 다른 영화들의 콜라주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는 아무런 충돌 없이 자연스럽게 용해된다. 이는 레픈의 뛰어난 연출력을 입증하는 것임에 분명하지만, 또 다른 요인은 인용된 작품의 시간성(역사성)의 흔적을 지워버린 채로, 그러니까 이들 작품을 출산한 시대적 뿌리를 잘라낸 뒤 오로지 표층의 차원에서 영화와 영화를, 스타일과 스타일을 연쇄시키기에 가능한 일이다. 스타일이 시간성(역사성)을 대체하는 사태. 우리는 그저 한때나마 유행했던 올드 패션의 향연 속에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은 듯한 달콤한 환상에 빠져들면 그만이다. 마치 아이린에 빠져버린 이름 없는 드라이버처럼.

포스트모던적인, 너무나 포스트모던적인

영화는 엔딩에서 다시 한번 관객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자동차 안에서 죽은 듯 보였던 이름 없는 드라이버는 천천히 눈을 깜빡인다. 그렇게 그가 되살아났다는 착각. 하지만 그렇게 지속하게 된 그의 삶은 어떠할까?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마따나, 스타일상의 혁신이 더이상 불가능해져 세계에 남겨진 창작의 방법은 죽은 스타일을 모방하고, 가상의 박물관에 있는 죽은 스타일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눈을 깜빡이지만, 그에게 삶의 역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죽지 않았을 뿐, 살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그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혼성모방 시대의 미학의 운명이다. 시체와 함께 드라이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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