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조진웅] 충무로의 제일검이 되겠소
2011-12-22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퍼펙트 게임>의 조진웅

<퍼펙트 게임>의 김용철. 그는 롯데 자이언츠의 4번 타자다. 그가 배트를 내려놓고 글러브를 집어들면 어떨까. 그는 영락없이 직구로 승부를 보려 할 것이다. 김용철이라는 야구선수를 잘 알고 하는 말이냐고. 전혀 아니다. 야구에 문외한으로서 김용철에 대해서는 눈곱만치도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김용철이라는 이름을 잠시 걸쳤던 조진웅은 그럴 것 같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투수의 구질에 비유하자면 그는 직구를 닮은 남자였다. 삶을, 연기를, 인간을 대하는 그의 기본자세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다. 출연하기로 약속한 연극이 ‘자빠졌을’ 때는 직접 기획까지 책임지며 무대를 되살려내기도 했고, 서울시립극단에서는 자신이 꿈꿨던 저항적 예술과 거리가 멀어 입단 3주 만에 짐을 싸들고 나오기도 했다. 연애를 할 때도 헤어지면 헤어졌지 바람피우는 법은 없고, 끊을 수 없는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단다. 잠시 다음 질문을 헤아리느라 대화가 끊기자 “다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세게 던져보세요”라고 말하는 그는 마운드에 올랐을 때나 타석에 섰을 때나 정면대결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걸이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그를 상대로 변화구를 날리는 건 무모하고 소모적인 짓인 듯해 직설화법으로 들이댔다. 롯데 자이언츠 팬이라고 하던데….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죽죠. 모태 롯데지, 모태 롯데. 아버지께서 경남고 출신이어서 저 야구선수 시킬 뻔도 하셨어요. 체격이 좋잖아요, 제가.” ‘정작 야구는 못하신다면서요’라는 물음의 꼬리가 다시 목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그는 롯데 타자들의 명단을 줄줄 꿰고 있었다. 그래서 박희곤 감독에게도 “야구를 잘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희곤 감독은 그가 “야구를 잘한다”라고 들었다. 그가 공 한번 제대로 던져본 적 없는 젬병이라는 사실은 캐스팅이 되고도 합숙훈련에 들어가서야 밝혀졌다. 이 영화에서 야구를 지도한 박민석 코치가 “조진웅은 자신없다”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그는 기본기부터 다졌다. “한동안은 영화에 쓰지도 않을 기초체력훈련만 계속 했죠. 근데 나중 되니까 저절로 자세가 나오더라고. 신기했죠.” 사실 그는 어떤 인물을 맡아도 기본기에 천착한다. 영화 연기와 드라마 연기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영화보다 드라마 현장이 더 빡빡하니까 순발력도 더 많이 요구된다?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본을 4부까지만 줘도 안에 캐릭터가 다 들어 있어요. 그 캐릭터를 살갑게 만들어놓으면 어딜 가도 그 캐릭터가 나와요. 무휼이를 잘 만들어놓으면 얘는 반촌에 갖다놔도 무휼이듯이. 밀도있는 작업을 해놓으면 영화건 드라마건 흔들릴 일이 없죠.”

<퍼펙트 게임>에서 그가 살을 붙인 허구의 인물 김용철은 질투의 화신이다. 조진웅은 그 안에 자신을 많이 담았다. 박희곤 감독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고 그는 “같은 연기자들 중에 너무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답했다. 이번 촬영 중에 그가 가장 시기한 배우는 조승우였다. “못하는 게 없더라고요. 뮤지컬도 봤는데, 참 나, 기가 꽉 차서. 선물을 사갔는데 주지 말고 돌아올까 싶었다니까.” 그런 솔직함을 그는 김용철의 눈빛에, 주먹 끝에 묻혔다. “자기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타자인데 홈런 두방을 쳐도 ‘에라’를 낸 최동원한테만 기사가 가니까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그래서 살도 뺐어요. 이대호 선수처럼 거포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몸이었는데. (웃음)” 그렇게 그는 20kg를 줄이고 대신 질투심을 찌웠다.

몸이 가벼워지니 <뿌리 깊은 나무>로의 환승도 어렵지 않았다. 턱선마저 ‘조선의 제일검’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충분히 날렵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연기에는 훨씬 격심한 다이어트가 요구됐다. <퍼펙트 게임>에서 그의 주된 무기는 넉넉한 리액션이었다. 후배에게 엄하게 구는 최동원에게 어설픈 서울 말투로 “재수없다~”를 지껄이는 말본새, 관중이 던지는 쓰레기를 온 얼굴로 맞아내는 풍모(!), 스크린 너머로까지 똥냄새를 풍길 기세로 찌그러뜨린 표정. 예상치 이상으로 늘어나는 근육은 참으로 유연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속도를 늦춰야 했다. “이렇게 절제를 많이 해야 하는 작업은 처음이에요. 원래는 변화를 많이 주는 편이죠. 어떻게 하면 교란을 일으킬까 고민하고. 근데 무휼은 걷어내고, 덜어내고, 스트레이트로 가야 했어요.” 액션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화장실에서 ‘눈탱이 밤탱이’ 되도록 막무가내로 몸싸움을 걸던 김용철은 눌러둬야 했다. “제가 주로 했던 액션은 치고 박고, 물고 뜯었어요. 근데 무휼은 검을 쓰잖아요. 딱 쳐다보고, 슥 뽑아서, 탕탕 부딪치고, 싹 베고.” 시선을 처리하는 방식도 180도 바뀌었다. “김용철은 그냥 막 두리번거리다가 ‘뭐, 임마. 밥 먹었냐?’ 이런 식이잖아요. 근데 무휼은 착 한번 보고는 ‘그랬느냐. 기다려라’ 이러니까 움직이고 싶어 미치겠는 거야. 가만히 서서 눈으로 말해야 되는 거지. 전하의 턱을 보느냐, 발밑을 보느냐, 먼 산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 달라요. 그런 역할에 이 몸이 맞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지금도 헤매요.”

웨스턴을 보고 자란 남자

그가 자신에게 어울릴지 확신할 수 없는 배역에 과감히 도전한 이유는 존 웨인과 같은 서부 사나이들에 대한 동경 때문인 듯 보였다. “아버지가 틀어주는 웨스턴을 보고 자랐어요. 언젠가는 존 웨인처럼 굵직한 선을 갖는 인물을 제 방식대로 연기해봐야죠. 지금은 무휼도 너무 어려워요.” 하지만 그는 치기에 심오한 예술의 세계를 우러러보는 배우는 아니다. 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마니아”라고 고백했다. “SF나 판타지를 좋아해요. 히어로물요? 아, 죽죠. <아이언맨> <해리 포터> 같은 영화들 꼭 챙겨봐요. 재미없는 영화는 예술영화라도 재미없는 거죠.” 최근에 본 작품 중에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수작으로 꼽았다. “<혹성탈출> 시리즈는 거의 다 봤는데 이번에는 좀 경이로웠어요. 인간의 표현 능력의 한계를 경험한 느낌이었고.”

배우로서 그는 여전히 영화를 깨치고 있는 중이다. “연극을 종교처럼 생각했”던 그는 “연극은 매 공연이 고유한데 영화나 드라마는 편집이 들어가니까 조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23편, 드라마 9편을 거치면서 이제는 “편집의 예술성을 믿게 됐”다. “무식했던 거죠.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면서부터는 편집에 따른 차이를 느끼겠더라고요. 요즘은 감독님들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나 궁금해요.” 그는 감독의 예술로서의 영화를 동경한다. 연기에 있어서도 감독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래서 <퍼펙트 게임>에서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장연설을 감행했다. 그가 “오늘은 최동원의 1루수로 뛸란다!”라고 외치며 선수들의 사기에 불을 붙이는 마지막 장면을 두고 한 말이다. “처음에는 닭살 돋아서 못한다고 했죠. 그런데 감독님이 마지막에 직구로 한번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좋다, 세게 한번 던져보자’ 마음먹었죠. 먹히면 삼진 잡는 거고 아니면 홈런 맞는 거고. 어쨌든 이번 이닝은 끝내야 하니까.” 결국 그는 삼진을 잡았다. 그러고는 또 성격대로 카메라가 꺼지면 해태쪽으로 건너가 농을 놓고, 스탭들을 웃기며 여유를 부렸다. 호기로움이 매력인 그의 차기작은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용의자 X의 헌신>을 각색한 방은진 감독의 <완전한 사랑>이다.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심리가 요동치는 시나리오”가 흥미로워 선택했다고 한다. 로맨티스트 조진웅은 또 어떤 직구를 던질까. 앞으로도 그에게 삼진아웃을 당해줄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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