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표현은 <퇴마록>에서 시작됐지만, 그것이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도록 한 동력을 제공한 것은 강제규였다. 이제 강제규는 <마이웨이>를 통해 자신이 가능하게 했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종식을 알리면서 ‘아시안 블록버스터’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선언하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일종의 소비의 판타지였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비해 많은 기술적 한계를 노출함에도 불구하고 ‘한국형’이라는 기표는 이러한 미비함을 은폐한 채 우리가 할리우드 못지않다는 착시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열악함이 자부심으로 변형되는 기이한 마술쇼의 정점을 보여준 것은 <디 워>였다. 이러한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형이라는 기표에 표면적으로 부합할 수 있는 소재가 필요했고, 그것이 많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한국의 역사에서 소재를 빌려온 이유였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몸집을 불려야 하는 블록버스터의 특성은 이제 한국형이라는 기표를 폐기하려 한다. 아시아라는 권역으로 동질적으로 묶일 수 있는 시장이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이를 한국영화산업의 미래를 위한 또 다른 돌파구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의 흥행 여부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마이웨이>의 상업적 성패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일본과 중국 관객이 어떠한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300억원에 가까운 제작비는 한국영화시장만으로 환수될 수 있는 규모의 금액이 아니니까 말이다. 캐스팅에서도 나타나듯, <마이웨이>는 먼저 일본과 중국시장에 안착하기를 원했던 듯싶다. 물론 이 역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영화의 인기가 꺾인 지 이미 오래고, 방대한 중국시장에서는 강력한 해외영화 쿼터제의 좁은 틈 속에서 여전히 한국영화가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중국은 일년에 20편 정도의 해외영화만 개봉을 허가하는데, 이 강력한 쿼터제에서 다소 비켜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제작 형태가 바로 합작이다). 실제로 근래 국내 제작사가 주도한 합작영화의 목적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물론 그러한 의도를 앞세운 합작영화가 성공한 사례는 드물고 실패한 사례는 흔하다.
아시안 블록버스터의 딜레마
<마이웨이>는 한국, 일본, 중국 모두가 공유하는 역사에서 시작한다(물론 중국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적지만, 중국 개봉 버전에서는 그와 관련한 사연을 좀더 부여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 이러한 선택은 이들 국가의 관객에게 소재의 이질감을 낮춘다는 점에서 효율적이지만 또한 그에 대한 해석과 입장이 다른 소재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특히 <마이웨이>가 식민지 조선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민감한 문제를 건드릴 수밖에 없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작품은 시장 확장에서 근본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시장으로만 본다면 한국보다 일본과 중국시장이 훨씬 큰 것이 사실이고, 이를 의식이라도 한 듯 <마이웨이>는 시장 논리를 서사적 구성 원칙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다. 물론 상업영화에서 시장의 논리가 서사의 기반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서사에 흡수되어 그 흔적이 감춰져야 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마이웨이>는 그것이 서사 곳곳에서 돌기처럼 불쑥 솟아올라 있다. 가령, 영화는 판빙빙이 작품 내부의 필요성에서가 아니라 중국 영화시장에 안착하기 위한 전략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감추지 않는데, 이는 <마이웨이>가 이들 지역을 시장 논리에 의해 기계공학적으로 결합했을 뿐, 화학적으로 용해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이들 지역을 일원화된 권역으로 묶어내려는 시도가 과연 옳은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가 좀더 첨예해지는 것은 중국보다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서다.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한국과 일본 양국의 시장에 모두 호소할 수 있는 서사를 구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아시안 블록버스터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단순한 확장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아시안 블록버스터가 민족(국가)적 경계를 넘어 아시아 권역 전반에 호소할 수 있는 서사를 지향하려 할 때, 이러한 지향점이 ‘한국형’이라는 기표로 유지되었던 환상을 훼손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것이 한국이 중심이 된 합작영화라 해도, 아시안 블록버스터와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마이웨이>의 인물 구성과 사건 전개는 아시안 블록버스터의 (해소되지 못한) 딜레마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국적을 이야기하지 않는 전략
시사회 직후 여러 기자들에게 가장 먼저 제기된 결함은 준식(장동건)의 캐릭터와 관련해서였다. 즉, 준식이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짐으로써 영화를 단조롭게 했다는 것이다. 일견 타당한 듯 보이지만 나는 그러한 설정이 충분히 선택 가능한 것이었을뿐더러 <마이웨이>의 기본적인 인물 구성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는 입장이다. 극을 굴러가게 하는 동력은 타츠오(오다기리 조)나 종대(김인권)에게서 충분히 잉태될 수 있고 보면, 준식이 변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야기를 단조롭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더글러스 서크의 지적처럼, 멜로드라마 장르에서 성격을 이리저리 변화하는 유동적인 인물들이 극의 동력을 제공할 때, 그와 대조되는 변하지 않는 캐릭터를 확보하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정작 준식의 문제는 그가 다른 인물들(그리고 관객)에게 호소할 수 있는 가치와 의지를 생략한 채, 오직 달리고 또 달리는 것으로 자신이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한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분열적이고 가변적인 인물들과 대조되는 인물로서 준식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삶의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준식에게 구체적인 삶의 목표를 제시하기를 주저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한국형 블록버스터였다면 그에게는 좀더 다양한 질감을 부여할 수도 있었겠지만, 민감한 문제를 회피해야 하는 아시안 블록버스터에서 그는 허공에 붕 뜬 추상적 가치 외에 그 무엇도 자신의 삶 안에 끌어들이지 못한다. 개봉 첫날의 실제 에피소드 하나. 소련의 벌목장에서 눈을 맞으며 달리는 준식의 모습이 화면에 등장했을 때 상영관 곳곳의 관객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보냈다. 그 웃음은 노르망디 해변에서 준식이 또 달리며 등장했을 때 조금 더 커졌다. 변하지 않은 준식을 보며 그들은 왜 웃었을까?
나는 어쩌면 <마이웨이>가 한국 관객보다는 일본 관객에게 좀더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이웨이>가 일본시장을 염두에 두며 취한 전략은 일종의 ‘전환 서사’(conver sion narrative)에 가까울 것이다. 요시모토 미쓰히로는 전후 일본 멜로드라마를 분석하면서 이들 영화가 희생자 의식에 의존한다고 지적하는데, 전환 서사란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희생자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전후 일본 멜로드라마의 등장인물은 대개 희생자로 그려졌고, 그 결과 관객은 그 희생자와 나르시시즘적으로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즉, <마이웨이>가 한국과 일본의 민감한 역사적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선택은 조선과 일본 모두를 희생자의 지위에 놓는 것이며, 이는 전쟁에 죄를 전가함으로써 개인은 그 책임을 벗어던지려는 시도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한국 관객이 일본에 부여한 희생자의 자리를 허용할지 여부는 의문스럽다).
글을 쓰면서 문득 엉뚱할 수도 있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의 시작과 엔딩의 마라톤 경기에서 준식이라는 이름으로 달리는 타츠오의 유니폼에서 국기를 봤었던가, 하는 의문. 캐스터 역시 준식/타츠오의 국적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던 듯싶다. 만약 내가 놓친 것이 아니라면, 그 유니폼은 강제규가 <마이웨이>를 통해 가려 했던 길일 것이다. 그 길은 민족(국가)간 경계를 (넘어서기보다는) 지워버리기. 달리 말해, 무국적의 길로 달려가기. 그것이 아시안 블록버스터가 가야 할 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