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의 무책임한 엄마는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집을 나갔다.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분노하거나 울지 않고 어느덧 자기들끼리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큰아들의 제사를 위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부모의 집에 모인다. 함께 밥을 먹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들의 마음은 엇갈리며, 실은 서로 다른 기억을 쳐다보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는 가족 구성원 사이의 억압된 감정이 폭발하는 극적인 계기를 마련해두지 않는다. 감정적인 해소 이후의 화해나 결속은 불가능하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 삶은 언제나 이별 혹은 죽음을 품고 있고, 그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보는 (가족의) 현실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살게 된 코이치, 류노스케 형제와 이들의 친구, 가족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후<기적>)의 세계도 위의 두 영화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텅 빈 부모의 자리
영화에서 코이치가 수업시간에 읽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산다>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산다는 것/ 지금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목이 마르다는 것/ 나뭇잎새의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문득 어떤 멜로디를 떠올려보는 것/ 재채기하는 것/ 당신의 손을 잡아보는 것.” 이 시는 말하자면 <기적>이 붙잡는 생의 감각, 즉, 익숙하고 일상적인 것이 새로운 감각으로 빛날 때의 충만함이 결국은 기적이라고 말하는 영화의 시선을 대변한다. 감독이 어딘가에서 “흔치 않게, 밝고 따뜻한 영화”라고 이 영화를 표현한 적이 있는데, 위의 두 작품이 전하던 가족과 삶과 죽음에 대한 고통스럽거나 쓸쓸한 진실을 떠올린다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기적>은 그런 진실이 어느 날 무심하게 아이들을 강타해버리거나 누군가의 죽음으로 현현하게 하는 대신, 아이들의 천진하고 싱그러운 기운으로 그 진실을 적극적인 성장담 속에서 경험하게 한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기존 작품들과 <기적> 사이에는 이보다 더 주목해야 할 차이가 있다.
내 생각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극영화 목록에서 <기적>만큼 지금 일본의 세대론을, 혹은 세대의 관계를 들여다본 영화는 없었던 것 같다. 한 가족 안에서 삼대의 풍경을 보여줄 때도 그 풍경의 미묘한 균열은 세대보다는 그 가족의 사적인 역사 안에서 설명되었다(<환상의 빛> <걸어도 걸어도>). 큰 틀에서 보면 <기적> 역시 가족의 이야기지만, 삼대에 걸친 인물들의 사연은 가족의 맥락으로 수렴되기보다는 주변의 또래 집단을 거쳐 세대론으로 확장되는 측면이 있고, 그때, 우리는 이들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며 그것이 고레에다가 바라보는 현재 일본사회의 모습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무엇보다 화산이 분화하고 있는 장소가 영화의 배경이 되었기에 <기적>을 2011년 일본 대지진 이후의 삶에 대한 어떤 코멘트로 읽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죽음을 지척에 두고, 폐허의 땅을 과거로 묻으며 아이들은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그 현재에 책임을 져야 할 어른들은 어떤 식으로 삶을 버티고, 어떤 미래를 준비하고 있을까. 물론 영화가 지진 이전에 기획되었고, 감독 자신이 그런 해석에 경계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질문들을 좀 다르게 바꿀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3?11 대지진을 굳이 지목하지 않더라도 고레에다가 <아무도 모른다>를 만들고 나서 인터뷰를 통해 밝힌 과거의 고백을 <기적>으로 끌어와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는 스스로를 “학생운동에 실패한 윗세대를 증오하면서 비정치적으로 살아온 세대”라고 정의하면서도, 자신이 90년대 중?후반에 일어난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 등 일본의 긴급한 현실과 사회적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알려졌듯, 초기 다큐멘터리 작업들 이후로, 그는 줄곧 삶과 죽음 앞에 선 인간 개별의 기억과 내적 풍경에 천착해왔다. 나는 그가 <기적>에 이르러 비로소 일본사회에서의 자신의 모순된 (세대적) 정체성과 그가 의식하는 ‘우리 시대의 초상’을, 자기 이전과 이후 세대간의 관계, 혹은 세대 각각의 이야기 안에서 어느 정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방식과 시선이 노골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다소 느슨한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기적>은 종종 생각보다 냉정한 영화가 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적인 진전이라고 말하기는 망설여지나, 그런 지점에 대해 한번쯤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흔히 성장영화의 도식 안에서 세계는 아이와 어른의 그것으로 양분된다. 대개의 경우, 어른의 세계는 억압적인 부(父)의 세계로 존재하거나 아예 부재하거나 간혹 성숙하고 너그러운 세계로 존재한다. 이 도식을 <기적>에 끌어올 때, 이상한 건 아이들의 부모의 자리다. 그들은 위의 세 가지 경우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기 있으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텅 빈 자리로 존재한다. 코이치와 류노스케의 아빠는 ‘아버지’의 자리를 거절한다. 그는 이 세상의 “쓸모없는” 사람으로서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한다. 엄마는 남편을 떠난 뒤, 술에 취해서 우는 일 말고는 이런 상황에 개입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친구들의 부모들 또한 마찬가지다. 배우의 길을 포기하고 지금은 남편 없이 술집을 꾸려가는 엄마는 배우를 꿈꾸는 딸에게 포기를 가르친다. 혹은 뒷모습으로만 등장하는 누군가의 아빠는 아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꾸없이 파친코장을 드나든다. 이들은 우리가 상투적으로 보아오던 자식에게 집착하거나 폭력적인 부모의 형상과도 다르다. 이들은 지극히 이기적이거나 무심하거나 무력하다. 그런 식으로 그저 자기 삶만을 산다. 사회적 자의식 따위는 없으며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삶의 가치를 물려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화에서 이 세대는 어른이 되지 못했거나 어른이 되기를 주저하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는 그 연유를 묻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가 그들을 로스트 제너레이션(전후 베이비붐 세대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자랐으나 1990년 시작된 일본의 장기적인 경제침체 한가운데로 던져진 세대)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짐작을 할 따름이다.
공명인가, 성장인가, 체념인가
대신, 여기서 부모들로부터 분리된 아이들 세대와 공명하는 자들은 조부모 세대다. 코이치의 여행 비밀을 제대로 아는 자는 할아버지뿐이고, 할아버지가 그리워하는 가루칸 떡(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그 시절)을 함께 만들고 나눠먹는 자는 코이치뿐이다. 복구 불가능한 상실의 시대를 살며 과거를 향수하는 할아버지와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기적을 기다리는 손자, 손녀들은 유령 같은 부모 세대를 건너뛰어 생을 함께 감각한다. 여행길에 오른 아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준 노부부의 딱한 사연도 상기해보자. 아마도 이 아이들의 부모 또래일 그들의 딸은 오래전 집을 나가 소식이 끊겼고, 그 빈자리를 하룻밤 떠들썩하게 채워주는 건 손녀뻘 되는 아이들이다. 그날 그중 한 소녀의 젖은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겨주던 노인이 묻는다. “엄마가 이렇게 늘 빗어주겠구나.” 노인을 바라보던 소녀의 대답. “아니요, 제가 해요.” 중간 세대의 텅 빈 자리가 주는 결핍과 외로움을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위로한다. 오직 지금의 쾌락에만 몰두하거나, 그저 순환하는 세속의 시간에 머무르는 부모 세대가 삶이 껴안고 있는 죽음을 외면할 때, 이 두 세대는 그것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그러나 함께 바라보고 있다. 이를테면 화산이 폭발해버리기를 바라지만, 그 말에 담긴 죽음의 함의를 깨닫게 되는,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손자와 인간이 아닌 산의 입장에 서서 분화는 산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죽음이 더 가까운 할아버지 사이의 어긋나는 대화는, 기이하게 닿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수 없다. 아이들이 기적을 외치는 장면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건 바로 그다음에 아이들이 마주하는 장면이 무덤가라는 사실이다. 죽은 강아지는 살아날 수 없고, 이별한 부모는 재결합할 수 없고, 아마도 아버지는 파친코를 그만두지 못할 것이며 내뿜어진 화산재는 되돌릴 수 없다. 코이치가 그토록 바라던 가족의 결합을 개인적인 고민으로 밀쳐두고 이제 세계를 고민하겠다고 말할 때, 그 ‘세계’가 그의 히피 아빠가 권하던, 혹은 그 아빠가 머물러 있는 ‘세계’와 같은 것일까. 혹은 그가 집으로 돌아와 그토록 싫어하던 화산을 바라본 다음, 침 바른 손가락 하나를 허공에 잠시 펼쳤다가 “음, 오늘은 재가 안 쌓이겠어”라고 말할 때, 그 심경의 변화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우리는 영화 중반에 이와 똑같은 행동과 말을 할아버지가 하는 걸 본 기억이 있다. 수십년을 이곳에서 살아온 노인의 그 행동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하는 지혜로운 긍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던 소년이 수십년을 더 산 노인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성장인가, 체념인가. 아니면 성장은 결국 체념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소년의 행동을 떠올리면 영화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꾸 끔찍한 이미지가 여기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연의 활동인 화산의 분화가 아니라, 인재로 인한 원전 누출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같은 행동을 하는 아이의 모습.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면 이 상상을 더없는 오독이라고 할 것 같다. 그러나 공명하던 조부모 세대가 사라지고, 기댈 수 없는 부모 세대를 바라보며, 이 현실을 책임질 누구도 없는 상황에서, 이 아이들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감독은 지금 자신의 자리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영화 밖 현실로 돌아온 나는 마지막 장면이 자꾸 목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