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희극의 주인공이 되어야하는 비극
2012-01-26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송곳니>의 ‘징벌적 웃음’에 대해 생각하다

<송곳니>에 대한 가장 적절한 비평은 김효선이 이미 쓴 바 있다(<씨네21> 836호). 너무 직접적이고 인위적인 구성이 영화 엔딩의 폭발력을 약화시켰다는 그녀의 지적에 나 역시 동의한다. 실제로 영화 엔딩에서 첫째딸이 보여준 선택의 극단성에 비하자면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파장은 그리 높지 않은 듯하다. 비평의 말미에서 김효선은 “우울하고도 기괴한 시대의 자화상을 다소 기계적인 퍼펫쇼로 연출”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한다. 나는 <송곳니>의 인물들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머릿속에서 연역된 인형처럼 보인다는 그녀의 지적에 동의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바로 이러한 사실, 그러니까 ‘기계적 인형’처럼 움직이는 인물들이 형성하는 ‘희(비)극’이라는 극적 형식을 매개로 이 영화를 사유한다면 어떨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았다. 실제로 내용의 층위만 본다면, <송곳니>는 억압적 권력을 비판해왔던 기존 영화에 비해 그리 특별할 게 없다. 아니, 그저 상투적이고 뻔한 우화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머문다면, 우리는 <송곳니>가 인물들의 ‘기계적 속성’을 바탕으로 한 희(비)극의 극적 형식을 취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말 것이다. 달리 말해, <송곳니>의 풍자성과 교훈성은 그 내용 이상으로, 기계와 유사한 경직성과 자동주의를 답습하는 인물과 그것이 유발하는 희극성에서 비롯된 결과다.

기계적 자동주의의 희극성

높게 둘러쳐진 울타리로 외부와 차단된 채 살아가는 세 자녀는 부모가 창조한 뒤틀린 세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세 자녀를 둘러싼 세계는 좀비가 노란 꽃으로 해석되고, 바다가 의자를 의미하는 왜곡된 세계지만, 이들은 송곳니가 빠질 때까지 울타리 바깥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운명이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세 자녀 중 막내딸은 새로운 게임을 제안한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그 게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물었을 때, 그들은 아무 답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주어진 상징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 새로운 상징을 창조할 능력이 없다. 창조와 변화는 유연한 인간(생명)만의 특권일 뿐, 자동화된 움직임을 반복하며 딱딱하게 경직된 기계의 몫이 아니다. 앙리 베르그송은 희극성의 특징을 서술한 <웃음>에서 사람의 이미지와 기계 장치(사물)의 이미지가 보다 완전하게 융화될수록, 달리 말해 사람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기계 장치가 되거나 생명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계적 성격이 덧붙여질 때 희극적 효과가 강화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베르그송의 이러한 지적이 희극의 전반적 특성 모두를 포괄하지는 못한다 해도, <송곳니>의 기계화된 인물의 희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세 자녀의 기계적 성격은 그들 각자에게서 자신만의 개별성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도 발견된다. <송곳니>의 세 자녀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들은 태어난 순서로 불릴 뿐, 인간으로서의 개별성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대체 불가능성(개별성)은 그 어떤 인간도 동일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하지만, 세 자녀는 그 역할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대체 가능한 기계일 뿐이다. 물론 그들의 기계적 성격이 더욱 노골화되는 것은 미시적이고 훈육적인 권력의 담지자인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다. 세 자녀는 부모가 창조한 무대의 기계적 인형들에 불과하다. <송곳니>의 희극성은 기계의 근원적인 경직성과 자동성을 인위적으로 과장한 결과로 얻어진다. <송곳니>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를 엉뚱하게 번역하는 아버지 앞에서 행복한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세 자녀의 모습이 펼쳐질 때다. 그들은 실재와 이를 매개하는 언어적 상징 사이에 필연적으로 간극이 있다는 사실에 무지하며, 이로 인해 매개된 진실에 대해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다. 그들의 무지하지만 행복한 미소는 세계에 대한 의문을 거세당한 대가다. 일상적 행동을 유발하는 미시적 권력에 대한 의문이 없다면,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기계에 가깝다. 달리 말해 자신의 자동성을 보장하는 전원장치에 대해 의문을 갖는 순간, 기계는 인간이 될 것이다. 의문 없는 삶은 자동화된 행동을 낳기 마련이고, 그때 사람은 자신이 희극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희극적 인물이 된다. 그 사실에 무지하고 방심할수록 희극적 효과는 더 커진다.

<송곳니>에서 고양이를 맹수라 배운 세 자녀는 고양이의 출현에 경악하고, 고양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다. 이들에게는 주어진 정보와 행동 사이,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어떤 간격(의문)도 없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기계적 자동인형이 되고 그때마다 영화는 유치해질 만큼 우스꽝스러워진다. 부조리한 상황이 그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스꽝스러운 기계적 인형이 됨으로써 부조리한 상황이 영속화되는 것이다. 이처럼 <송곳니>의 희극성은 이러한 기계적 인물의 자동성에서 파생된다. 이러한 자동성을 가리켜 순종성이라 부른다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송곳니>에서 이러한 부조리한 세계가 자동성의 균열과 함께 파열음을 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모의 결혼기념일에 첫째딸은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던 춤에서 벗어나 무질서한 방식으로 몸을 놀리기 시작한다(이 장면 직후 그녀는 자신의 송곳니를 으깨버린다). 이 장면이 마치 온몸이 실에 매달렸던 인형이 그 끈을 끊고 자기 맘대로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 같은 묘한 텐션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균열의 효과이다.

기계화된 일상의 희극성

우리가 <송곳니>의 기계화된 인물의 희극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내재한 희극적 속성에 관해서이다. 즉, 우리가 미시적 권력하에서 자기도 모르게 일상적 차원에서 행하는 순종적 행동들, 그 기계적 자동성에 내재한 희극성 말이다. 이는 억압적 권력과 그에 순종하는 피지배자를 알레고리화하는 <송곳니>에서 왜 이러한 기계화된 인물을 필요로 했는지, 하는 의문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베르그송은 행위(les actes)와 제스처(les gestes)를 구분하는데, 그는 희극이 행위보다는 제스처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고 본다. 행위가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층위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제스처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에 가깝다. 그렇기에 비탈길에 놓인 공마냥 습관의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계적 일상은 행위보다는 제스처의 집합에 더 가깝다. 물론 제스처와 인물의 기계적 특성 역시 무관할 수 없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송곳니>는 일상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미시적, 훈육적 권력과 순종성(자동성)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일상적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행하는 제스처의 집합인 일상적 삶을 그 외부의 누군가가 바라본다면 이는 <송곳니>의 인물들이 상연하는 희극과 닮지 않았을까?

결국 <송곳니>가 우리의 미시적인 권력의 효과로서의 일상적 삶을 묘사한다면, 그것은 내용의 차원에서 실제의 삶을 유사하게 재현하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계화된 인물의 제스처에 기반한 희극의 형식을 통해서이다. <송곳니>의 세 자녀는 결코 희극 무대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희극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비극적 인물이다. 그러니까 <송곳니>는 희극적 상황이 비극의 원인이 되는 희비극이자 부조리극이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가 세 자녀를 보고 웃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징벌적 웃음’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의문을 거세당한 채, 심지어는 그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웃음이라는 징벌. 이러한 면에서 <송곳니>는 분명 풍자적이면서도 교훈주의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그 교훈은 단지 권력의 비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길들여진 일상의 순종성을 희극화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자신에게 흘리는 웃음이 될지, 타자에 대한 웃음이 될지는 자신만이 알 일이다. 의문 없는 삶과 의문으로 가득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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