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24일, 테오도르 앙겔로풀로스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참으로 허무하게 떠났다. 죽기 전 그는 그리스의 경제위기에 관한 영화 <디 아더 시>(The Other Sea)를 촬영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길을 건너다 휴가 중이던 경찰관의 오토바이에 치여 머리를 다쳤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내 숨지고 말았다. 향년 76살.
‘침묵의 3부작’(<시테라 섬으로의 여행> <양봉업자> <안개 속의 풍경>)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그는 인간의 삶을 롱테이크로 담아내는 데 평생을 바친 감독이었건만, 그의 죽음은 찰나의 인서트숏처럼 지나가버린 것이다. 만약 그가 그 순간 그 길을 건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헛된 상상을 해보지만 허구의 플래시백으로 그의 죽음을 애써 부인하려 해선 안될 것 같다. 다만 그가 걸어온 길을 길게, 오래 돌아보며 슬픔을 달래야 할 것이다.
영상 시인으로 불렸던 앙겔로풀로스의 “첫사랑”은 롱테이크였다. 그리스에서 나고 자란 그는 아테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다 그만두고 프랑스 영화학교 이덱(IDHEC)에 들어갔는데 그때 만든 첫 영화의 첫숏이 롱테이크였다. 그런 그의 영화적 뿌리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다니며 형성된 것이다. 이전에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다 퇴학당한 그가 배움을 구한 곳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였다. 거기서 그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미조구치 겐지를 영화적 스승으로 삼기 시작했고, 그들로부터 길게 찍기를 통해 시공간의 지속성을 보존하는 방법을 물려받았다. 천천히 카메라를 움직이며 프레임의 한계와 부딪히길 주저하지 않는 그에 대해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 근본적으로 같은 태도를 지닌 감독”이라고까지 상찬한 바 있다.
<범죄의 재구성>(1970)으로 데뷔한 이래 앙겔로풀로스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스타일을 지켜왔다. 하지만 그가 젠체하는 현학적 작가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주석달기를 꺼리지 않았으며, 관객에게 친절하고자 노력했고, 형식에 대한 자신의 강박을 인정할 줄도 알았다. 그 형식이라는 것도 가까이에서 사람의 얼굴을 찍는 것을 유난히 부끄러워했던 그의 수줍은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차라리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때로는 소심하게 때로는 거침없이 영화를 사랑하려 노력한 시네필에 가까웠다. 태어나면서부터 독재정권과 세계대전을 경험한 그에게 영화에 대한 사랑은 역사와 정치에 대한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완벽한 사랑에 비유할 수 있는 충만감을 갖게 된다.” 그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앙겔로풀로스는 지난 40년간 홀로 그리스영화를 대변해왔다. 파블로스 게룰라노스 그리스 문화관광부 장관이 서둘러 애도를 표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는 앙겔로풀로스야말로 “‘대체 불가능한’이란 수식어가 진실로 어울리는” 감독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앙겔로풀로스가 남긴 다음의 말을 읽고 나면 비탄은 더욱 깊어진다. “내가 정말이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영화를 촬영하는 순간이다.” 부디, 숏을 곧 숨으로 여겼던 그의 마지막 호흡이 미완의 유작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