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지승] 억지로 울리고 웃기고 싶지 않다
2012-02-03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파파>의 한지승 감독

‘원 숏 원 킬!’ <파파> 촬영현장의 슬로건은 ‘두번은 없다’였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90% 이상을 촬영한 <파파> 제작진은 5주 동안 25회의 촬영을 어떻게든 오차없이 끝마쳐야 했다. 시간이 곧 돈인 상황에서 오늘 못 찍으면 내일 찍자는 요량은 아예 품지도 못했다. 촉박한 일정 탓에 배우들은 모니터조차 확인하지 못했고, 제작진은 현장편집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한지승 감독이 지난해 여름을 악몽의 나날로 기억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승 감독은 무사히 돌아왔고, 그의 손엔 <파파>가 들려 있었다. 한지승 감독이 한여름밤의 악몽을 견딜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

-<싸움>(2007) 끝내고 어떻게 지냈나.
=일단 반성부터 했다. <싸움>은 관객과 호흡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대로만 끌고 간 영화였다. 진심을 담아서 고스란히 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내실이 아닌 외피에만 너무 신경을 썼다. <파파> 개봉까지는 햇수로 3년 정도 걸렸는데, 그 중간에 기회가 주어져서 연극도 하고, 광고도 찍고 그렇게 보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2008)를 연출했다고 알고 있다. 광고는 뭘 찍은 건가.
=골프채 광고 찍었다. (웃음) 지인 통해서 제안이 들어왔는데 내 맘대로 찍어도 된다고 해서. 드라마도 제안이 들어오긴 했는데 눈이 가는 건 좀 기다려야 하는 작품들이었다.

-<파파>는 지난해 말 개봉예정이었다. 개봉시기가 다소 미뤄졌는데.
=미국에서 돌아와 곧바로 한국 촬영을 시작했으면 맞출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후반작업해서 개봉할 순 없는 일이고.

-기획 단계에서부터 미국 로케이션을 염두에 뒀나.
=3년 전에 가깝게 지내는 작가랑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다. 이분이 갑작스럽게 말도 안되는 인간이 아빠가 되는 이야기가 어떻냐고 툭 던지셨다. 노멀한 아이템이라 흘려들었는데 합석한 후배가 그 이야기를 외국에서 찍으면 어떨까 하더라. 그때 느낌이 훅 왔다. 처음엔 극중 춘섭(박용우)과 준(고아라) 정도의 인물만 갖고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인물들을 펼치고 싶더라. 아이들이 피부색이 다 다르다면, 하는 상상은 거기서 나왔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염두에 둔 영화가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 잭 블랙 팬이다. 그중에서 <스쿨 오브 락>을 좋아한다. <파파>도 그런 담백한 영화였으면 했다. 억지로 울리고 웃기고 싶지 않았다. <스쿨 오브 락>처럼 사술없이 정석으로 재미와 감동을 주고 싶었다. <싸움> 때처럼 괜히 겉멋 부리지 말자고 여러 번 곱씹었다. (박)용우와 (고)아라에게도 내가 디렉션할 때 못 느끼거나 아닌 것 같으면 바로바로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고.

-'가족’ 스토리에 관심이 많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가족이다. 가족은 흔히 구속이라고 하지만 난 외려 자유로운 삶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하루>(2001) 때 입양을 소재로 삼았던 건 가족은 피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들어진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는데 이번엔 가족의 범위를 좀더 확장해보고 싶었다. 어디까지가 가족일 수 있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가족이라고 보일 수 있을까.

-최종고가 12고였다고 알고 있다. 초고와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나.
=별로. 그게 내 한계다. 한번 써놓으면 잘 안 변한다. 변해야 쓰는 나도 신날 텐데. (웃음)

-각색 작가들이 붙어도 그런가.
=안 그래도 <연애시대>를 함께했던 박연선 작가가 삐쳤다. (웃음) 말로는 맘대로 쓰라고 해놓고 받아들이질 않으니까. 내가 조금 더 열려 있거나 순발력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국 로케이션이라는 점 때문에 투자사에선 적지 않게 난색을 표했을 텐데.
=시나리오 쓰면서도 매번 그랬다. 이게 (영화화)되겠어? 제작자인 안상훈 대표도 매번 ‘왜 형은 이런 걸 써가지고’라고 구시렁댔고. (웃음) 투자자 중에선 굳이 미국엘 가서 찍어야 하나, 뭐 이런 반응도 있었다. 해외 로케이션이라고 하면 이전에는 못 보던 비주얼을 기대하는데, <파파>가 그런 장르의 영화는 아니잖나. 나 역시 촬영에 들어가니까 그림 하나를 잡더라도 이국적인 배경 위주로 펼치고 싶은 유혹에 빠질 뻔한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사람’ 이야기를 하자고 스스로 다잡았다.

-애초에는 애틀랜타가 아니라 뉴올리언스에서 촬영할 계획이었다.
=뉴올리언스는 풍경은 예쁜데, 언제 홍수가 날지 모르는 곳이다. 만약 재해 때문에 촬영이 ‘셧 다운’되면 어떻게 하나. (웃음)

-김미혜 프로듀서는 현지에서 인력과 장비를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하더라. 심지어 캐나다에서 가지고 온 장비도 있었다고.
=두 가지 부담이 있었다. 외국배우가 나오는데 관객이 이질감을 갖진 않을까. 또 하나는 과연 한국영화 평균 수준의 예산으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찍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애틀랜타의 경우, 다른 지역에 비해 좋은 조건을 제시해 그곳에서 촬영하기로 했는데, <파파>까지 포함해서 애틀랜타에서 같은 시기 촬영한 영화가 무려 9편이나 됐다. 현지 스탭들 뽑는 게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스탭들의 수준도 그래서 들쑥날쑥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스탭들의 반응만 보고서도 ‘이 장면이 제대로 찍혔구나’ 알 수 있을 거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미국 스탭들은 어땠나. 웃기고 울리는 대목에서 웃고 울던가.
=준과 마야가 로지 방 앞에서 싸우는 장면을 잊지 못한다. 두 배우 모두 굉장히 잘해줬고, 나도 만족스러워서 감정에 젖어 담배를 한대 물었는데 B카메라 포커스 풀러인 조 할아버지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라.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사람은 다 똑같다. 나중엔 심지어 한국 스탭들은 영어 쓰고, 미국 스탭들은 한국말 하고 그랬으니까.

-춘섭은 아이 같은 어른이고, 준은 어른 같은 아이다. 박용우, 고아라 두 배우를 캐 스팅할 때도 그런 이미지를 감안한 것 같은데.
=시나리오를 쓰면서 계속 용우 생각이 났다. 주변에서 다른 배우를 이야기했지만 그림이 잘 안 떠오르더라. 영화에도 용우의 실제 말투나 웃음소리를 많이 넣었다. 준 역시 아라 외엔 대안이 없었다. 연기는 기본이고 노래, 춤, 게다가 영어까지 해야 하니까. 기성배우 중에 이를 모두 만족시킬 이가 있을까. 고민 중에 아라를 알게 됐다. 춤추는 동영상을 봤는데 괜찮다 싶어 일단 시나리오를 넣어보자 했는데 스케줄이 안 맞더라. 아라는 겉모습만 보면 무척 깍쟁이 같잖나. 뭐 안된다고 하는데 굳이 잡지 말자 이랬지. (웃음) 그런데 신인 중에서도 조건을 만족시키는 배우가 없더라. 그러던 중에 다시 아라쪽에서 연락이 왔다. 시간이 될 것 같으니 미팅하자고. 내 입장에선 한번 퇴짜를 맞은 상황이라 처음엔 안 볼 마음이었는데 주변에서 차선책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안 보냐고 하더라. 그래서 미팅 조건으로 노래를 들어본 적 없으니 노래를 들려달라고 전했다. 자존심 때문에 싫다고 하면 나도 안 할 생각이었다. (웃음) 근데 직접 부른 노래를 녹음해서 나왔더라. 휘트니 휴스턴 노래였는데, 들어보니 정말 잘하는 거지. 그렇게 시작됐는데 정말 맘에 든 건 성격이다. 자기 할 말 하고, 쿨할 때는 정말 쿨하고. 아라의 몇년 뒤가 기대되고 궁금하다.

-두 배우는 외국 스탭들과 잘 지냈나.
=처음 봤을 때는 다들 당황했다. 그곳에선 스탭들이랑 주연배우들이랑 말을 섞는 분위기가 아니니까. 주연배우들은 대개 자기 분량 찍고 바로 가게 마련인데, 우리는 한번 현장에 오면 딱 달라붙어서 아역배우랑 묵찌빠 하면서 놀고 있으니. 사실 영화에 출연한 미국 아역배우들은 대부분 연기 경험이 없는 친구들이다. 게다가 아역배우들은 대개 현장 분위기에 많이 좌우된다. 상대 배우가 자기를 얼마나 예뻐하느냐에 따라 연기가 달라진다.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러웠다면, 그건 두 배우가 보이지 않게 가이드를 해줘서다.

-<파파>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캐스팅이다. LA에서 오디션을 진행했다던데.
=세번 진행했다. 할리우드 시스템 중 가장 부러운 것이 캐스팅이다. 인력 풀이 풍부하다. 쌍둥이 배우는 없을 것 같아 지미와 타미는 그냥 외모가 비슷한 애들을 뽑아야지 했는데 무려 세 커플을 보여주더라. 캐스팅 과정도 합리적이다. ‘믹스 앤드 매치’라는 오디션 방식이 큰 도움이 됐다. 배역 후보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모은 다음 짝짓기를 해보는 거다. 잘못하면 애들한테 상처를 주지 않을까 주저했지만 막상 오디션이 시작되니까 자기들끼리 팀을 이뤄서 연습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막내 로지 역할은 애초 다른 아역배우를 찜해뒀다고 들었다.
=조합 소속 배우라 그 친구는 하루 4시간 이상 촬영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했다. 로지 역할로 출연한 앤젤라는 오디션 때만 해도 맘에 안 찼다. 끼도 모자란 것 같고. 그런데 자신의 차례가 끝나자 나가지 않고 내 옆에 와서 옷을 당기더니 노래도 할 줄 안다고 그러더라. 다섯살짜리가 지금 이 자리에 왜 왔고, 뭘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현장에서도 파김치가 돼서 앉아 있으면, 와서는 나를 꼭 안아주고 갔다. 밤에 잘 때도 몇 시간 자고 나면 앤젤라 보는구나 그런 생각까지 했다니까. 용우가 시샘 많이 했다. 앤젤라가 나만 따라다녔거든.

-감독이 모든 사안을 결정하는 한국 시스템과 비교한다면.
=단적인 예로 스탭들은 내 말이 아니라 미국인 조감독 말을 듣는다. 나 역시 그곳에선 조감독에게 견제를 받았다. 조감독이 ‘셧 다운’이라고 결정하면 영화 자체가 ‘셧 다운’되니까 긴장을 안 할 수 없다. 초반엔 트러블도 많았다. 촬영 컷 수부터 의논을 해야 하는데 조감독은 이거 오늘 다 못 찍는다고 하고 난 찍을 수 있다고 하고. 난 그래도 사람 잘 만난 거다. 우리 조감독은 토비라는 친구였는데, 내가 찍는 속도를 계속 체크하면서 조언해줬으니까. 성질 더러운 사람이었으면 촬영 종료 2시간 전까지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남은 컷 중 ‘절반 줄여!’ 그런다더라. 내 주장을 고수하다가 사고가 난 적도 있다. 주차장에서 준이 차로 바리케이드를 들이받는 장면 있잖나. 그거 사실 연출이 아니라 사고였다. 차를 멈췄어야 했는데 그냥 아라가 받아버린 거다. 토비와 라인 프로듀서였던 제임스가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억지를 부린 건데. 만약 상주 의사가 촬영 진행에 문제있다고 보고했다면 <파파>는 중단됐을 거다. 조감독과 프로듀서는 감옥에 갔을 것이고.

-한국 제작 시스템이 참고할 만한 점도 있을 텐데.
=할리우드 시스템은 철저하게 저비용, 고효율을 창출하기 위한 방식이다. 크게 보면 난 한국의 상업영화 시스템 역시 이렇게 가야 한다고 본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 프리 프로덕션과 포스트 프로덕션에 시간과 자본을 좀더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촬영 단계에서 비용 누수를 막을 수 있다.

-쫑파티 때는 소맥이 등장했다고 들었다.
=맥주 한병 들고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겠나. 그래서 돌렸는데, 알고 보니 미국 친구들도 소맥을 좋아하더라. 두잔 마시니까 바로 인간적인 반응들이 나오고. 2차로 노래방을 갔는데 40명의 스탭들이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고 그랬다.

-차기작 계획은.
=드라마와 영화 둘 다 아이템 논의 중이다. 어떤 장르의 영화를 찍게 될지 모르겠지만, 언제까지나 사람이 담겨 있는 영화를 찍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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