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이 아니라 ‘뮤신’이라 불러보면 어떨까. 주목받는 개그맨으로 출발했던 정성화는 긴 세월을 지나 이제는 뮤지컬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2010년에는 <영웅>으로 국내 뮤지컬 시상식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뮤지컬 대상’과 ‘더 뮤지컬 어워즈’의 남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영화는 새로운 도전 무대다. <황산벌>(2003)로 ‘첫삽’을 뜬 이후 지난해에는 <히트>에서 불법 이종 격투기장을 찾은 까칠하고 변덕스런 고객, <위험한 상견례>에서 경상도 여자 다홍(이시영)의 오빠이자 순정만화 마니아로 출연해 뮤지컬로 바쁜 가운데 의미있는 ‘다작’을 했다.
최근 350만 관객을 돌파하며 그의 영화 출연작들 중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될 <댄싱퀸>은 그 흥행 결과뿐만 아니라, 영화배우로서의 정성화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젊고 유능하며 의미있는 개혁을 꿈꾸는 국회의원 ‘종찬’으로서 그가 보여준 강단있는 모습은 여러 뮤지컬에서 그가 보여준 카리스마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보며 늘 아쉬움을 느꼈던 팬들이라면 뭔가 꽉 막힌 체증이 해소되는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길 원하는 그를 만났다.
-<댄싱퀸>에서 원래 정민(황정민)의 동생 역할을 제의받았다고 들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국회의원 종찬 역에 더 끌렸다. 막연하게 젊은 국회의원 하면 딱딱한 엘리트 느낌을 떠올릴지 모르는데, 실제 그런 사람들일수록 생각과 달리 유쾌하고 잘 놀고 재밌다. 애초의 그 역할에 내가 가진 유쾌함을 대입하면 뭔가 다른 정치인 캐릭터가 나올 것 같아 바꿔 달라고 졸랐다. (웃음)
-그간 영화에서는 기존 코믹한 캐릭터의 연장이었다. <댄싱퀸>은 그걸 보기 좋게 깨트렸다.
=그래서 나도 기쁘다. 처음 출연한 영화가 <황산벌>(2003)이었는데 ‘언젠가 영화배우로도 잘될 거야’라는 생각은 늘 했다. 뭐 미래를 특별히 계획하고 사는 사람은 아니어서 오디션을 보러 다니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개그맨 시절 신동엽, 홍록기 선배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자는 생각 정도는 했었다. 연기자라면 모든 장르에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다. 그런 점에서 <황산벌>은 큰 비중은 아니라도 ‘첫삽’이라는 생각에 무척 들떴었다.
-혹시 어려서 좋아했던 영화들이 있다면.
=홍콩영화 마니아였다. <영웅본색>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대사나 노래를 다 외우고 다녔다. 그전에는 무술영화를 좋아해서 용돈을 모아 쌍절곤을 사기도 했다. 무술영화에 나오는 고수들처럼 중국식 옷에 단화를 신고 다녔다. 그렇게 빠져 지내니까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 대충 중국식 발음으로 ‘찡숑와’였다. (웃음) 심지어 주윤발을 몹시 좋아해서 매일 ‘밀키스’만 마셨다. 그러다 실제 처음으로 만난 홍콩 배우가 서기였는데, 당시 내가 출연하던 시트콤 <행진>에 특별출연했었다. 나와 뽀뽀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서기가 절대 못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대본에 있으니까 서기는 카메라 가까이에, 나는 저 멀리 떨어져서 원근법으로 대충 뽀뽀하는 것처럼 합의를 보고 찍었다. (웃음)
-시트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래전 얘기를 해보자. SBS 공채 3기 개그맨으로 화려하게 시작했다.
=‘틴틴 파이브’는 그때 거의 H.O.T와 동급의 인기를 누렸다. (웃음) 홍록기 선배가 빠진 자리에 내가 들어갔는데 그와 동시에 거의 절벽과 같은 침체기가 왔다. 그런데 내가 틴틴 파이브였는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거다. (웃음) 아무튼 ‘틴틴 스머프’라는 코너에 스머프 인형을 쓰고 나와 힘센 스머프를 연기했는데, 자신감이 없어서였는지 캐릭터를 잘 살리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대사도 줄어들고, 3개월여 만에 잘리고 다른 개그맨이 투입됐다.
-불과 스무살에 개그맨 데뷔를 하며 승승장구했던 사람으로서 슬럼프가 찾아왔을 것 같다.
=나보다 주변에서 괜찮냐며 걱정을 더 많이 하니까 힘들어하는 척은 했지만 사실 별 충격은 없었다. 잘 안 맞으니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었으니까. 게다가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서 서울예대 선배의 권유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연극을 하게 됐다. 굉장히 야한 연극이었다, 고 말하면 좀 거짓말이고 그런 것처럼 보이려고 무지 애쓴 연극이었다. 요즘처럼 대놓고 노출하고 야한 연극을 하던 때가 아니어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배우의 뒤태를 교묘하게 포스터에 실어 관객을 낚던 때였다. (웃음) 그래도 6개월 정도 극단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무척 즐겁게 연기를 했다.
-서울예대도 그렇고 개그맨 시험도 그렇고 다 한번에 붙었다는 얘기인데. 처음부터 개그맨이 꿈이었나.
=93학번인데 서울예대 개그 동아리 회장도 했었다. 처음에는 SBS FD로 들어가서 프로그램 녹화 전 바람잡이 역할을 했다. 그걸 재밌게 보셨는지 한 PD님이 공채를 한번 보라고 해서 개그맨이 됐다. 계속 내 자랑을 하게 되는데(웃음) 고등학생 때부터 소풍이나 학교 축제 때 사회를 도맡았었다. 오죽하면 학교 차원에서 ‘우리 성화를 위해 예능 장학금을 조성하자’고 해서 실제로 고3 때 동문들의 지원을 받아 학교에서 학원비를 대줬었다. 그리고 동문 중에 <청춘행진곡> 등 여러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던 개그맨 장용 선배가 있었는데 그분도 만나게 해줬다. 누가 볼 땐 당시 A급 개그맨이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나로서는 정말 가슴 설레는 경험이었고 내가 개그맨의 꿈을 밀고 나가는 데 큰 힘이 됐다. 지금도 그 느낌을 잊지 못해서 후배들이 그런 도움을 구한다면 미약하나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럼 첫 번째 슬럼프는 언제였나.
=시작을 멋지게 했을지는 몰라도 연예인으로서는 어딘가 어설프게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활하다가 신기하게 일이 뚝 끊겼다. 다음달에 뭐가 들어오겠지, 그러면서 1년여가 지나니까 전기도 끊기고 수중에 돈도 없었다. 방황이나 슬럼프라기보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은 나에 대한 근신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 다 거의 매일 도장 찍듯 가던, 아는 선배가 운영하는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뭔가 바다 한가운데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방향도 깊이도 모르는데 그냥 가라앉지는 않고 힘들게 겨우 떠 있는 느낌. 그런데도 막연히 ‘잘될 거야’라는, 아직 더 놀아야 해, 내 나이에 밤에는 잠자면 안돼, 그러면서 철없이 놀았다.
-그러다 뮤지컬 제작자 설도윤 대표와의 만남은 정성화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맞다. 2004년에 김경식 선배와 함께했던 2인극 <아일랜드>를 좋게 보셨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기량이 된다고 보신 것 같다. 그전까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길이었는데 <아이 러브 유>를 시작으로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걷게 됐다. 첫 공연 때 나를 향해 관객이 쳐주던 그 깊은 중저음의 박수를 잊을 수 없다.
-이후 <컨페션>에서는 멋진 정극 연기를 선보였다.
=<아이 러브 유>가 큰 인기를 끌면서 한 제작자 분이 명함을 건네며 주인공 역할을 제의하셨다.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렵고 힘들었다. 귀가 먹어가는 작곡가 이야기인데 관객이 사실 좀 많이 웃었다. 몇몇 중요한 포인트의 대사를 칠 때 우는 게 아니라 막 웃는 거다. 개그맨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나는 정말 진지하고 슬픈데 관객이 웃으니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3개월간 계속되는 공연을 망칠 수는 없으니 문제점이 뭔지 생각하고 톤도 바꾸고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니까 사람들이 웃지 않고 극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뮤지컬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그때였다.
-이후 <올슉업>을 비롯해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 <영웅>의 안중근을 연기하면서 뮤지컬계를 ‘접수’했다.
=<올슉업>의 데니스는 정말 짜릿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 다 됐고, 빨리 데니스 나와’라고 할 정도로 주인공을 잡아먹는 역할인데 마지막에는 객석으로부터 주인공보다 더한 ‘아이돌 박수’를 받았다. (웃음) <맨 오브 라만차>는 2007년, 2008년, 2010년 무려 세번에 걸쳐 무대에 올려지면서 언론에서도 나를 새롭게 조명해주는 계기가 됐다. 워낙에 사랑하는 뮤지컬일 뿐만 아니라 나를 뮤지컬 배우로서 확실하게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영웅>도 나를 관객으로 하여금 ‘잘하는구나’ 하고 인정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뮤지컬 배우로 데뷔 뒤 6년 동안 전혀 상을 못 타서 ‘상복이 없구나’ 하고 거의 포기하고 있던 시점에 <영웅>으로 우르르 상을 탔다.(웃음)
-뮤지컬 무대를 누비는 돈키호테와 안중근이 영화에서는 여자 잠옷을 입은 변태처럼 나올 때(<위험한 상견례>) 팬들이 비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나.
=튼튼한 집을 지으려면 팔을 걷고 첫삽을 떠야 한다. 아무리 멋진 옷을 입어도 일을 하다보면 흙이 묻는 건 당연하다. 지금은 그런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 옷이 망가지는 거 신경 쓸 겨를 없이 열심히 땅을 파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10년 정도 시간을 보낸 뒤에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지난 시간이 헛되었구나 아니구나 판단해도 늦는 건 아니다. 거대한 스크린은 배우를 섬세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거짓말은 금방 들통난다.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고 생각하기에 끝없이 도전할 거고 꼭 완성할 거다. 그리고 영화는 기록적인 의미가 있어서 나중에 자식들에게 내가 이런저런 작품에 출연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웃음) 그래서 <댄싱퀸> 이후에 어떤 영화를 하게 될까 나도 무척 궁금하다.
-3월경 영국으로 잠시 유학을 떠난다고 들었다.
=본격적으로 발성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난다. 지금껏 독학으로 발성 훈련을 했다면 뮤지컬 전문 발성 코치에게서 심화된 원 포인트 레슨을 받는 거다. 1주일에 3번 정도 레슨을 받는데 레슨이 없는 날은 스튜디오를 빌려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저녁에는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을 다 챙겨볼 생각이다. 돌아온 뒤에는 7월부터 공연들이 이어질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 박진영씨가 주연을 맡은 <5백만불의 사나이>에도 카메오 출연을 했다. 사람 좋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장기를 내다팔고 사람들을 위협하는 악한인데, 짧으나마 내가 해보고 싶은 영화 캐릭터의 요소들이 다 담겨 있었다. 아 욕심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