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수 감독의 <하녀>는 무척 흥미로운 영화다. 원작과 어떻게 달라졌느냐를 떠나서, <하녀>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오래도록 문득문득 떠오르게 하는 장면과 의상, 대사들을 남겼다. 영화를 본 지 1만5120시간이 지난 오늘 오후, 속옷 매장에서 내가 느닷없이 전도연이 <하녀>에서 입었던 새하얀 속옷을 떠올린 게 그 증거.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한국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새하얀 속옷들이, 멋 부리지 않는 순수한 인물을 묘사하려고 입히는 그 속옷들이, 역설적으로 멋을 부린 선택이 되는 시대가 왔음을 간파하게 되었다!
<하녀>를 보는 동안 내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던 장면 중 하나는 윤여정이 블라우스를 벗어던지고 브래지어만 입은 상체를 드러내며 더럽고 치사하다고 포효하던 장면과 꽉 낀 보라색 속옷에 ‘갇혀서’ 좁은 침대에서 자고 있는 황정민(전도연의 고시원 단짝 친구로 나오는 여배우)의 전신이 비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들은 초반부에 나오는, 숯을 달구고, 지글지글 전을 부치는 시장 풍경보다 몇배는 리얼한 느낌을 주었다. 속옷 차림은 은밀하고 야한 느낌을 주는 차림으로 통용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을 보호하려고, 몸매를 보정하려고, ‘그냥’ 속옷을 입는다. 그러므로 속옷 차림은 나체보다는 더 인간의 몸을 아름답지 않게 보이게 하기 쉽고, 그 사람의 개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런 점에서 으레 들어갈 만한 문양과 레이스로 꾸며진 두 사람의 속옷은 리얼하게 다가온다.
이에 반해 전도연의 금방 포장지를 뜯어서 입은 듯한 민무늬 속옷 차림은 어떤가. 철저히 유린당하는 힘없는 육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 선택된 속옷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속옷은 영화의 가공적인 느낌과 멋에 힘을 더하고 있다. 그녀는 저택에서 입어야 하는 흰 블라우스와 검정 스커트를 받아들었을 때, 뭐, 예쁘긴 하지만, 어떻게 이런 걸 입고 일을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정장식의 하녀 복장보다 더욱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녀가 줄곧 입고 있는 무늬 하나 없는 새하얀 팬티와 러닝이다. 진짜 현실 속을 사는 우리 중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아무런 무늬도 없는 새하얀 속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몇명이나 될까?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현실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들은 대개 민무늬 흰색 속옷을 입었던 것 같은데(심지어 홍콩영화의 장국영이나 양조위조차!)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독들이 리얼함을 위해 선택한 장치가 따지고 보면 가장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은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 가장 ‘환상적인’ 속옷을 찾아 헤매고 있는 당신이 사들여야 할 것은 검은 레이스나 잠자리 날개를 닮은 속옷이 아니라 방금 막 삶아 빤 듯한 새하얀 민무늬 속옷일지도…. 그렇다고 내가 꼭 그걸 사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나저나 마음에 쏙 드는 민무늬 흰 속옷 고르기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데 감독님들은 어디서 그렇게 잘들 찾아냈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