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력과 김민희의 상관관계는 늘 결속력이 약했다. 스타일 아이콘으로 확립된 스타성이 항상 김민희를 규정하는 일차적 재료가 되었다. 그녀를 수식할 때 연기는 ‘잘 맞는 옷’이 아니라, 미처 생각지 않았던 특별한 차림이었다. 데뷔 13년차, 그 진입장벽 너머의 김민희의 연기는 매 순간 아름다웠다. <화차>의 강선영은 그간의 배우 김민희가 쌓아온 능력을 모두 입증해낸다. 평범한 인간이 괴물이 되기까지의 여정. 베일을 벗기는 과정에서 김민희는 그 다양한 범주의 얼굴을, 모습을 빠뜨리지 않고 표현해낸다. 단언컨대 <화차>는 배우 김민희가 폭발한 지점이다. 그러니 이제 우린 김민희란 배우로 인해 한국영화가 무엇을 얻었는지에 관해 생각해볼 차례다.
-시사 반응이 뜨겁다. 같이 출연한 조성하씨가 관객 300만명이 넘으면 셔플댄스 추겠다는 공약을 했던데.
=그러게, 난 뭘 해야 할까. 옆에서 박수라도 쳐야겠다. (웃음)
-강선영은 배우라면 정말 욕심나는, 놓쳐선 안될 캐릭터였다.
=보자마자 바로 하겠다고 했다.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이번만큼은 매니저와 상의도 없이, 이건 내가 할 거다라고 바로 결정했다. 악역 느낌이 있어서 그런 부분을 꺼려하는 배우들도 있었겠지만 난 강선영이란 여자가 동정이 가고 이해가 가더라. 원작보다 시나리오가 더 크게 와닿았는데, 보고서 막 울었다. 하나의 캐릭터지만 그 안에 풍부한 결들이 살아 있는 여자다. 연기 생활을 하면서 내가 앞으로 이런 캐릭터를 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한 인간의 초토화된 내면을 표출해야 한다. 욕심에 앞서, 실제로 정말 ‘잘’해야 했다.
=물론 걱정한 부분도 있었다. 분량이 적지만 임팩트가 강한 캐릭터이고, 내 캐릭터가 제대로 역할을 못하면 영화 전체가 흔들린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그럼에도 망설임없이 결정할 수 있었던 건 역할이 너무 좋아서였다. 그 흥분이 두려움을 누르더라. 물론 ‘어려운 작품을 골랐네’ 하고 걱정하는 눈빛, ‘왜 이 작품을 골랐을까’ 하며 의아해하는 시선도 있었다. 어떤 반응이건 난 상관없었지만.
-배포가 크고, 긍정적인가 보다. (웃음)
=그게 내 장점이기도 하다. 어떤 원칙도 없다는 게. 난 뭘 해야지! 하는 게 없다. 이번에도 부담감을 최대한 줄이고 편하게 연기했다. 한 4회차 지나고 나니 내가 이 작업을 즐기고 있더라. 내가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다는 즐거움, 내가 느낀 감정… 이런 것들이 1순위다. 이렇게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하니 좋은 영향이 갔을 거다.
-참고로 삼았던 배우나 이미지가 있었나.
=다른 감독님들은 뭘 보라고 숙제도 내주시고 하는데 변영주 감독님은 한번도 그런 걸 주문하지 않더라. 나중에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추천한 <차이나타운>을 같이 보고 이야기한 거 말고는 없었다. 그런 걸 미리 좀 말해주셨으면 참고했을 텐데. (웃음)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고 나서 시간이 점핑한 뒤 물리적으로 변화한 강선영이 등장한다. 멍든 얼굴, 번진 메이크업과 마스크의 힘으로 그녀의 파괴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됐다.
=배우가 표현하고 이해시키고 전달하는 과정이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전달해주면 된다. 제아무리 삶의 고통을 다 안다고 해도 그걸 전달하지 못하면 좋은 연기가 될 수 없다. 그 장면은 보기엔 의미가 크지만 의외로 촬영할 때는 크게 힘들이지 않고 찍었다. 상황이 주어져 있으니 오히려 쉬웠다고 해야 할까. 내 역할은 카메라가 만들어주는 조명, 연출자가 만들어준 상황에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것이었다.
-클로즈업 장면에서 김민희가 가진 자연스러운 마스크가 효과를 발휘한다는 변영주 감독의 말을 입증하는 장면들이 여럿 있다. 특히 택시 장면도 그렇고. 노력 여부와는 별개로 타고난 강점이다.
=감독님이 말하신 건 결국 얼굴 자체만이 아닌 것 같다. 평소 내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과도 다르다. 표정이나 눈빛, 근육의 움직임, 내가 연기하는 얼굴에 관해서다. 카메라 안에서 내가 보여주는 메시지에 대한 평가다. 그걸 너무 좋았다고 말씀해주시니 나로선 성취감이 컸다.
-가장 임팩트가 컸던 장면은 펜션 장면이다. 인간 강선영이 차츰 괴물이 돼가는 분기점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면이었다.
=감정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전날부터 한숨도 못 잤다. 촬영날, 그 순간에 나를 믿고 싶었고 나한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리허설에서 연기에 들어가기 전까지 분장하는 동안 계속 혼자서 고민했다. 괴로운 과정이었다. 막상 슛 들어가고 나서부턴 기억이 안 난다.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는데, 내가 파닥파닥 떨고 있는 것들이 표현되더라. 정말로 그 장면을 어떻게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촬영 끝나자마자 기절했다.
-탈진했나 보다.
=안도감과 함께 힘들고 지쳤던 게 한꺼번에 밀려왔다. 발목이 다친 줄도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엄청 부어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는 쓰러져 있었다. 그러고 나서 모니터를 보는데 성취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고생스럽고 힘들었던 장면도 지나고 나면 그냥 재밌다. 그게 내 성격인 것 같다. 피가 흥건하게 보이는 장면을 찍고 나서 밥을 잘 먹으니 그걸 보고 누가 나한테 그러더라. 비위도 좋다고. (웃음)
-막상 노출도 있고 워낙 센 장면이라 부담도 컸을 텐데.
=감독님도 처음엔 노출을 걱정하셨는데 의외로 난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명백히 몸에 집중한 장면이 아니지 않나. 오히려 그 장면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아름답더라. 영화의 미학적인 부분으로 표현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인데 섬세하게 표현됐다. 소름 끼칠 정도로 끔찍한데 그 속에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나. 이렇게 이야기하면 변태인 건가? (웃음)
-변영주 감독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컸던 것 같다.
=이야기가 너무 잘 통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감독님과 잘 맞았다. 많은 부분에서 감독님을 믿을 수 있었다. 감독님은 배우한테 용기를 주고, 신뢰를 준다. 나뿐만 아니라 선균 오빠나 조연, 단역배우 모두에게 그런 믿음을 주셨다. 촬영을 하다보면 그런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화차>는 분명 배우 김민희의 필모그래피에 한획을 긋는 작품이다. 지난해 <모비딕> 이후 뜸했던 활동에 대한 욕심도 분명 보이는 것 같고.
=그러게 말이다. 난 항상 마음은 본격적으로 배우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생활에는 내 힘이 아닌 다른 것이 많이 작용한다. 그게 운인 것 같기도 하다. 만약 <화차>를 통해 그 리듬을 이어갈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모비딕>이 흥행에 실패한 건 그런 면에서 무척 아쉽다. 관객 동원력에 있어서의 스타성에 대한 고민도 생겼을 것 같다.
=이번엔 촬영 끝나고 친구한테 ‘영화가 흥행이 안되면 어떡하지’ 하고 고민을 말하기도 했다. <모비딕>도 <여배우들>도 <뜨거운 것이 좋아>도 난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줬는데, 흥행이 안되니 결과적으로는 그걸 모두에게 다 보여주지 못한 게 됐다. 흥행이 결국 그 배우의 능력과도 연결되는 거다. 그만큼 이번엔 흥행에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잘됐으면 좋겠고, 관객이 어떻게 볼지 너무 궁금하다. 이번 작품을 통해 내 전작을 찾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 같다.
-최근엔 옴니버스영화 <시네노트>에서의 코믹한 여배우도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장르와 연기를 시도해왔다.
=본격적으로 코믹 연기를 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항상 난 0에서 100까지 보여줄 게 많다고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나한테 안 어울리는 옷은 없는 것 같다. 그게 내 능력인지 모르지만 뭘 입혔을 때 쫙쫙 들어맞는다. 평범하고 소박한 서민 역할, 불쌍한 여인, 자기주장이 강한 사회부 기자, 자아가 센 시나리오작가 등 모두가 다 나랑 잘 맞았던 거 같다. 변영주 감독님도 촌스러운 추리닝 입은 건 상상도 못했는데 막상 입혀보니 너무 잘 맞아서 기뻤다고 하시더라. 80% 정도는 내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다.
-작품마다 캐릭터에 대해서 빈틈없는 연기를 하는데도, 재발견이란 수식, 알고 보니 잘한다라는 평가는 좀 억울하지 않나.
=그걸 만회하고자 내가 특별히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어쨌든 영화계에서 일하시는 분들, 감독님들은 격려해주시고 나를 평가해주신다. 물론 캐스팅에는 연기력이나 이런 것과는 분명 다른 복잡한 것들이 있으니 그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것 때문에 좌절하기보단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화차>도 운명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나한테 처음 온 게 아니라 다른 배우들에게 돌았고 그들이 거절을 하면서 내가 하게 된 거다.
-김민희라는 패션 아이콘, 도회적 이미지가 주는 상징 때문에 오는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차라리 아예 그런 이미지를 백분 활용한 연기를 하는 것도 역발상일 것 같은데.
=<팩토리 걸>에서 시에나 밀러가 연기한 세즈윅 같은 역할이 들어오면 하지 왜 안 하겠나. 근데 뭘 하고 싶다 생각해둘 필요가 없다.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인연이 없으면 할 수 없지 않나. 기대만 커지고 실망도 그만큼 커진다. 오는 것 중에 하는 게 중요하다.
-활동이 뜸하다보면 조급증은 안 생기나.
=오히려 나이가 드니 더 여유로워지고 편안해진 것 같아서 좋다. 스스로 내가 원하는 걸 하며 살고 싶다. 내가 연기하면서 편하지 않고 쫓기면 잘될 게 없다. 확실히 난 내 인생이 더 소중한 사람이다. 그 안에 일이 있고 연기가 있는 거지 나를 조여가면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연예계 생활을 오래함으로써 으레 얽매일 것 같은 것들에선 자유로워 보인다.
=얽매이거나 안된다 하는 이런 것은 없다. 나는 이런 것들이 잘 맞는다 하고 규정하지 않는다. 물론 그걸 만드는 배우들도 있다. 어떤 방식이 좋고 나쁘고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틀이 없는 걸 선호한다는 거다. <여배우들>도 이재용 감독님이 잠깐 만나자고 해서 만나서 크게 따지지 않고 출연했고, <시네노트>도 프로젝트가 재밌네 싶어서 했다. 좋으면 많이 생각하지 않고 결정한다. 규정하고 따지지 않고 대부분 열어놓고 받아들인다. 그런 즉흥적 순간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거다.
-스타일 아이콘으로 모든 게 화제가 되지만 정작 본인의 생활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노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성격적인 부분인 것 같다. 내가 예능 나가는 걸 꺼려하는 것도 그게 닭살스러워서다. 난 어떤 사람이다, 이런 거 말하거나 나를 내세우고 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 일부러 감추려는 게 아니라 편하지 않은 걸 하지 않을 뿐이다. 남들이 느끼는 것처럼 내가 거리감을 두려고 하는 게 아니다.
-공개된 일부분만으로도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반대로 그런 김민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나 사람이 있다면.
=어릴 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나란 사람이 중요하다. 어릴 때 좋아했던 것들이 내 취향이 되어가는 거다. 내가 어떻게 살고 하는 이런 것들이 모여 나를 만드는 것 같다. 김민희스럽다 이런 것. 생각해보면 난 항상 뭘 따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지 않으면 하지 않았고, 이게 대세야 하는 것도 내가 아니면 하지 않았다. 원하는 게 확실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지금의 내 스타일이 나온 것 같다.
-지금 김민희에게 가장 자극을 주는 건 무언가.
=거창한 게 없다. 항상 내가 하고 싶은 것, 즐길 수 있는 걸 따라간다. 내 능력 안에서 즐기며 산다. 즐겁게 천천히. 다만 3월8일(<화차> 개봉일)에는, 확실히 바라는 게 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