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현 감독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누구나 쓰는 스마트폰이지만 <접속> <썸> 등의 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신문물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온 그에게는 범상치 않은 대상일지 모른다. <황진이>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든 사극인 <가비>에 대한 그의 생각도 같은 선상에 놓여 있을 것이다. <접속>의 PC통신, <썸>의 핸드폰과 디지털카메라처럼 <황진이>의 황진이가 그 시대의 새로운 인물이었다면, <가비>가 묘사하는 조선 최초의 커피도 당대의 신문물이었을 것이다. 그가 구한말의 역사 속에서 찾아낸 동시대의 모습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황진이>를 끝내고 바로 <가비>를 준비했다. 준비기간이 꽤 길었다.
=나도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CJ와 개발을 시작한 게 2007년 겨울이었다. 1년에서 1년 반 정도 하면 되겠지 했는데, 3년이 지나도 시나리오를 쓰고 있더라.
-어떤 부분에서 막히던가.
=나와 투자사와의 생각의 차이였다. 당시 사극은 흥행 장르가 아니었다. 게다가 <가비>는 고종 이야기다. 실패한 군주, 패망의 역사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CJ는 고종 이야기를 최소화하고 멜로를 부각하자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가비>를 시작한 이유는 고종이었다. 결국 CJ가 손을 뗐고, 우리끼리 알아서 해보려 하다가 시간이 더 걸렸다.
-롯데가 투자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롯데가 배급 의사를 표시했다. 투자는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했고. 나에 대한 부담이 있었던 것 같다. <황진이> 당시 첫 사극이다보니 실수가 있었고 예산이 좀 오버됐었다. 이번에는 그런 실수가 어떻게 만회될 것인가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쉽지 않더라. 내가 가진 경험도 문제였다. 제작과 투자를 했던 감독이니 담당자로서는 껄끄러운 게 있는 거다. 결국 ‘저 감독은 우리가 뭘 이야기하든 우리보다 머리 위에 있다’는 선입견이 있었을 거다.
-원작인 <노서아 가비>의 출간 전에 계약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고종이 커피를 통해 암살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끌렸다고 하더라. 어떤 이유였나.
=처음에는 한국의 커피가 왕을 통해 전해졌다는 게 재밌었다. 외국 사신들을 대할 때 예의상 마신 것도 아니고 정말 좋아했다고 하니까. 그래서 고종을 좀더 들여다봤다. 알고 보니 놀랍더라. 내가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 흔히 고종은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왕으로 비쳐지지 않나. 투자사에서 염려했던 이유도 그런 부분이었다. 하지만 공부하면서 고종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영·정조의 개혁이 성공으로 이어졌다면 우리는 지금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고 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쓰고, 고종이 디자인한 태극기를 국기로 쓴다. 부정하려 해도 고종이 만들어낸 비전 안에 우리가 있는 거지. 고종의 역사가 패망이 아니라 비전의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가비>를 만들고자 했다.
-원작은 따냐와 일리치 캐릭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황진이에 괸심이 있었던 만큼 따냐를 더 강조하는 방향을 생각해보지는 않았나.
=그런 건 아니었다. <가비>는 ‘나라가 아프면 사랑도 아프고, 역사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컨셉의 이야기다. 개인과 나라의 비전이 점점 일치해가는 구성이니까. 그러다 보니 따냐에 대한 매력이나 흥미보다는 충분히 설득력있는 인물이었으면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고종이 커피를 마신 정관헌이 나온다. “우리가 고종의 비전 안에 있다”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 같다.
=정관헌을 가봤을 때, 고종이 왜 여기에 정관헌을 지었을까 생각했다. 덕수궁 동쪽은 옛날식 궁이고, 서쪽은 서양식 궁이다. 정관헌은 그 뒤에 있다. 정관헌이란 이름처럼 고종은 이곳에서 고요하게 조선을 바라보고 싶었을 거다. 서양 차를 마시면서, 서양의 시각으로 말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5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을 했다. 철도 설계도 하고 무역국으로서 자신의 위치도 만들려 했다. 다만 그 비전이 좀 늦게 도착했을 뿐이다.
-고종의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가비>는 이야기 순서상으로나 마케팅상으로 따냐와 일리치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종과 하나코를 포함한 남녀 네명이 엮이는 이야기다. 말한 대로 이들 사이에 오가는 감정의 변화가 ‘개인과 나라의 비전’을 일치시킨다. 하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인물들의 감정이 그런 변화를 설득시키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설명이 좀 부족하다. 조금씩 더 드러내는 게 맞다고 본다. 하나코가 일리치에게 감정을 더 드러내는 설정을 찍기는 했는 데, 편집과정에서 보니 설득력이 부족하더라. 그리고 스케줄상 촉박한 문제가 있었다. 캐스팅이 바뀌면서 계획한 일정보다 3개월이 밀렸다. 유선씨와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이 한달밖에 없었다. 거의 다 몰아서 찍었는데, 편집에서는 건조하게 줄여서 갈 수밖에 없겠더라. 고종의 따냐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더 넣으려 했는데, 사적인 감정으로 좁아질 우려가 있었다. 나는 왕의 눈물이 사랑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해 흘리는 것이었으면 했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보면 양 축이 빠지니까 빈약해 보이는 것 같다.
-<가비>를 준비하던 시기는 아니었겠지만 사실 지금 관객이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보는 사극은 개인적인 서사다. <해를 품은 달>은 말할 것도 없고, <뿌리 깊은 나무>도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왕의 사적인 고통을 보면서 흥미를 느낀 작품이었다. 연출의도와는 별개로 트렌드로 볼 때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나로서도 고민을 많이 한 부분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목표가 그게 아닌 이상에 이야기를 그렇게 몰고 갔을 때 어느 정도를 수습할 수 있을까 부담스럽더라. <가비>를 찍고 나서 <해를 품은 달>과 <뿌리 깊은 나무>를 보면서 지금 사극이 관객에게 던져주는 포인트가 다양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종의 경우는 지금처럼 보여주는 게 더 신선한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내 선택이었다.
-원작과 달라졌지만 <가비>는 원작 못지않게 규모와 확장 가능성이 큰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보여지는 건 그렇지 않은 느낌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트 중심으로 연결되는 영화랄까? 사극인 이상 밖으로 나가서 풍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 부분이 해소되지 않는 것 같다.
=일단 외국배우들이 외국어로 연기하는 장면이 있다 보니 자막을 위해서라도 인물 중심으로 컷을 자르는 게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 갖고자 했던 그림의 규모를 포기하게 되더라. 무엇보다 <가비>의 준비과정에서 흥행에 대한 부담 때문에 처음부터 정해진 위치와 규모가 있었다. 결국 그 위치와 규모에서 해결하는 걸 찾다 보니 그런 아쉬움이 남는 것 같다.
-<가비>는 두 번째 사극영화다. <접속> <텔미썸딩> <썸>을 통해 당대의 도시와 청년들에게 보였던 관심이 <황진이>부터 이동했다. 이유가 있을까.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는 동시대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달라진 건 아니다. 다만 소재가 달라진 것 같다. 그동안 세상이 사람들을 분류하는 방법이 정말 다양해지고 복잡해지지 않았나. 당장 세대 차이를 논하는 것도 스마트폰을 쓰는지, 트위터를 하는지 이런 걸로 나뉜다. 동시대의 문물과 현상은 똑같이 보지만 지금은 이게 어디서 온 걸까 하는 궁금증을 갖는 거다. <가비>의 커피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황진이>를 하면서 과거를 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덧붙여진 것 같다. 이제는 역사를 이야기하면서도 이 시대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즐길 수 있을지를 찾는 게 흥미롭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현재성이 중요하다면 그걸 보여주면서 같이 즐기는 방법을 찾을 테고, 현재의 결과가 과거의 원인에서 출발했다면 그 자체도 즐길 수 있는 거고.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자유로워진 것 같다.
-지금은 정말 신문물이 많은 시대다. 무엇에 관심이 있나.
=아무래도 스마트폰이 가장 큰 관심거리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궁금해서 들여다보기는 하는데, 하지는 않는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영화적인 이야기를 생각하는 건 아니고, 영화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고민해봤다. 이걸 통해 이제 누구나 영화, 드라마, 음악, 뮤직비디오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걸 쓰는 이상 누구나 여기에 뭔가 담기를 원한다. 이런 시대에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영화가 진정한 멀티유즈의 매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가비>를 찍는다고 했을 때, 미리 어플리케이션을 파는 거다. 이걸 사면 동시에 개봉 때의 좌석을 미리 사는 게 되는 거고, 이 영화를 어디서 찍는지, 현장은 어떤 모습인지도 알 수 있는 거다. 감독이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과 대화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개봉 뒤에는 어플을 통해 다운도 할 수 있고. 모든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통합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고, 그게 영화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접목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다음 작품은 구상 중인가.
=아무래도 현대극이 될 거 같다.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이제 내가 내 필모그래피를 가지고 밀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나이도 들었고, 시스템도 변했다. 나뿐만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영화를 만드는 게 만만한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은 영화 외에 드라마도 생각해보고 있다. 좀더 유연하게 크로스오버해야 하겠더라. 만약 다양한 영화들이 나오는 시스템이라면 내 무게를 덜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텐데, 지금은 다이어트가 아니라 메뉴를 바꾸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가비>의 결과는 내가 감당해야 할 결과다. 그걸 보고 다음 방향을 신중히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