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나 영화를 보고 운 기억은 단 두번, 1986년 명화극장에서 방영한 <엘리펀트 맨>과 2006년작 <우리개 이야기>를 보며 정신없이 울었던 게 전부다. 메마른 감정을 염려하거나 냉정을 자랑할 생각은 없다. 소설이나 만화처럼 스스로 페이지를 멈추고 곱씹을 시간이 없는 영상매체에 한해서 울지 않는 거니까. 혹은 감정을 견줄 만한 생의 경험치가 낮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눈물이 박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트콤을 보다 울고 말았다. KBS <선녀가 필요해>는 목욕하러 내려왔다가 영화 촬영장에서 날개옷을 도둑맞은 선녀 모녀가 마포구에 사는 기획사 대표 차세주(차인표)의 집에 눌러앉아 서울살이하는 이야기다. 2005년 한남동에 자리잡은 뱀파이어들이 그랬듯이.
MBC에서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1, 2를 집필했던 신정구 작가는 <선녀가 필요해>의 기틀을 잡고 안타깝게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매정한 목소리로 신랄한 대사를 내뱉는 뱀파이어 프란체스카와 박복한 여인 안성댁. 심혜진과 박희진이 연기한 그립고 반가운 캐릭터는 <선녀가 필요해>의 엄마 선녀 왕모와 아래층 치킨집 여주인 금보화로 이어졌다. 보화의 가게에서 당일치기 알바를 하는 선녀 왕모의 전화 응대는 이런 식이다. “뼈까지 구워싼 바바라 치킨이야. 왜!” 연필의 냄새를 즐기고 곱게 깎아 수집하는 가장 차세주나 댄스곡에 맞춰 육중한 몸을 흔드는 자기 모습을 녹화하는 쌍둥이 동생 차세동(이두일)처럼 캐릭터마다 겉보기론 짐작할 수 없는 기묘한 취미나 기호를 심어주는 것도 신 작가가 즐겨하던 것들이다.
강한 설정과 캐릭터를 감당하려면 그에 맞는 그림을 능청스럽게 구현해내야 한다. 예를 들면 배달 주문은 많지만 댄스 가수를 꿈꾸는 여사장의 공연 때문에 내점 손님이 없다시피한 바바라 치킨 설정을 위해 화려한 무대와 요란한 공연을 그림으로 만들어내는 것. <안녕, 프란체스카>가 30분물 두개를 묶은 주말 시트콤이었던 것에 비해 30분씩 주 5회를 방영해야 하는 <선녀가 필요해> 입장에서는 포기하기 쉬운 부분인데 이런 장면들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것을 보면 의욕도 부담도 컸을 제작진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이전 시즌의 미덕을 지키지 못한 <안녕, 프란체스카> 마지막 시즌3는 시리즈로 인정할 수 없는 완고한 팬으로서 그 없이 만들어질 이야기가 어떨지 걱정하던 마음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런데 왜 울었냐고? 그게…. 맨 얼굴 때문이다. 남의 집 객식구가 된 형편이지만 여전히 자존심 강한 엄마 왕모와 넉살 좋은 딸 채화(황우슬혜)는 각자 고단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우연히 마주친다. 선녀의 상징인 머리를 자른 통에 서로를 몰라보고 스쳤던 두 사람. 그때 심혜진은 (마치 왕모의 대사 톤을 잊은 듯) 길가다 심상찮은 모습의 딸을 만난 여느 엄마처럼 말한다. “너 머리 왜 이래? 왜 머리가 왜 이래.” 길에서 남처럼 마주친 가족의 무방비한 맨 얼굴이 그렇지 않을까. 풀이 죽은 채로 돌아와 어두운 방문을 연 모녀는 옷가지며 속옷, 신발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발견한다. 단벌 선녀들을 위해 세주네 식구들이 각자 몰래 가져다둔 선물이다. 복받치는 감정을 누르고 애써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왕모. “이 인간들이 정말….”
따지고 보면 슬픈 장면도 아닌데. 모녀가 울고불고하며 자른 머리는 전문가가 손질한 멋진 스타일인데. 객식구를 위한 선의와 불편을 헤아린 선물 정도야 풍족한 세주네 식구들에겐 별것 아닐 텐데. 암만 대수롭지 않은 척해도 생각과는 다르게 눈물이 주룩 흐르더라. 그저 맨 얼굴을 엿본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