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으려 하였으나 너를 잊지 못하였다.” 뭇 여성들의 마음을 홀린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이 대사는, 사실 배우 한가인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말죽거리 잔혹사> 속 사춘기 남학생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버스 속 친구를 외면하게 만드는 ‘박카스걸’ 그녀는 잊으려 하여도 절대 잊지 못할, 환상의 여인이었다. 그 환상을 증폭시켜 보여준 <해를 품은 달>의 허연우를 떠나보내고, 30대의 씁쓸함을 간직한 <건축학개론>의 첫사랑 그녀, 서연으로 한가인이 돌아왔다. 자신이 그리 여성스럽지도, 곱게만 자라오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한가인은 이제 배우로서 아름다움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고자, 입증해 보이고자 한다.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이 지난주 종영했다. 이제 수·목요일에 <해품달> 못 본다고 서운해하는 시청자가 많다.
=지난주에 막방이었나? (놀라며) 말도 안돼! 끝난 지 엄청 오래된 것 같다.
-작품 끝나면 빨리 잊는 편이라 그런가.
=보통 (그 여파가) 한달 정도는 간다. 그럴 때면 멍하게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번엔 <건축학개론> 촬영한 다음 여유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해품달>에 들어갔고, 또 끝나자마자 영화 홍보를 하게 돼서 빨리 작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아마도 배우로 지내며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건축학개론>은 <말죽거리 잔혹사> 이후 8년 만에 찍은 영화다. 왜 이렇게 영화 공백이 길었을까.
=<말죽거리 잔혹사>를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셨고, 감사하게도 그 이후 많은 작품 제의가 있었다. 그런데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됐던 것 같다. 소속사와 문제도 있었고, 나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라 일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영화현장에 가보니 어떻던가.
=이용주 감독님은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어서 낯설 수도 있을 거라고 하더라. 그런데 막상 가보니 크게 달라진 건 느끼기 어려웠다. 그때보단 나이를 한참 더 많이 먹었고, 경험도 더 많아지고 해서 여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건축학개론>의 서연, 꼭 해야 할 운명
-<건축학개론>에 대한 선택은 수월했나.
=처음엔 시나리오를 보고 의문이 드는 지점들이 좀 있었다. 감독님을 만나뵙고 얘기하면서 불분명했던 점들이 선명해졌다.
-어떤 점이 불분명했나.
=과거와 현재를 다른 인물이 연기한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15년이라는 세월이 외향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보일 만큼 변화가 있는 시기는 아니라서, 이 짧은 시기를 각기 다른 배우가 연기한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전체적인 영화의 색깔과 감정의 결을 어떻게 그려 낼지도 궁금했다.
-이용주 감독이 만나서 잘 설득했나보다.
=신기한 일이 있었다. 내가 배화여고를 나왔는데, <건축학개론> 제작한 명필름이 내가 배화여고 다닐 때 늘 다니던 떡볶이집 바로 옆에 있었다. ‘감독님을 드디어 뵈러가는구나, 궁금한 게 많네’, 이런 심정이었는데 명필름에 가까워지면서 “어, 여기 뭐야! 왜 여기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된 거지. 와플집도 그대로고, 떡볶이집도 그대로네! 소리지르며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갔기 때문에 그날 나눈 이야기들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 영화가 과거의 향수, 추억에 대한 이야기인데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재밌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가인씨가 해야 할 운명이네요” 하시더라. 그래서 면접 보고, 식사 같이하며 이 영화를 하겠다고 결정했다.
-<건축학개론>의 서연은 사연이 많은 인물이다. 이혼의 아픔도 겪고, 꿈을 접고 제주도에 내려가 살려고 한다. 한가인이라는 배우가 단번에 떠오르는 캐릭터는 아닌 듯하다.
=내가 많이 듣는 말 세 가지가 있다. 키 크시네요, 성격이 드라마에서 보는 것과 많이 다르시네요, 실물이 더 낫네요. (웃음) 어쨌든 의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듣는다. 여성스럽고 여린 이미지가 언제부터 각인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난 정말 그렇지 않거든. 오히려 성격이 남자에 가깝게 털털하다. 보는 분들은 약간 낯설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서연은 실제의 나와 가장 유사한 캐릭터다. 감독님도 나의 털털하고 한편으론 까칠한 모습에서 서연이와 공통점을 찾으셨던 것 같다. 촬영이 진행되면서 대사도 많이 열어주셨을 정도다. “가인씨, 대사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대략적인 내용 알죠?”라고 해서 애드리브로 진행한 장면들도 꽤 된다.
-여성 관객이 보기엔 다소 얄미울 수도 있는 캐릭터였다. 갑자기 나타난 ‘첫사랑 그녀’는 여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니까. (웃음)
=원래 찾아가면 안되는 거지. (웃음) 그런데 나라도 서연이 같은 상황에 처하면 승민이를 찾아갈 것 같다. 서연이는 어쩌면 위로가 필요했고,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했고, 뭔가 매달릴 수 있는 게 필요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영화를 준비하며 이혼하기 전 서연이의 상태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감독님에게 들었는데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고 위자료를 기다리는 상황이 정말 지옥 같다고 하더라.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잡으려 하기 때문에 그 시점엔 동창도 만나면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서연이는 집에서 하루 종일 뭘 하고 있었을까. 혼자 지낼 때의 우울함, 상실감이 컸을 것 같더라. 그래서 승민이를 찾아가는 서연이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그런 서연이의 과거가 영화에서 더 많이 설명됐으면 좋았을 테지만.
-30대 기자들이 ‘술 땡기는 영화’라고 하더라.
=정말 다들 그러시더라. 시사회에 왔던 지인들, 친구들 모두. 첫사랑도 그립지만 옛날 시절이 그리운 얘기잖나. 영화가 끝날 때 나도 먹먹하니 눈물이 나더라. 아련하고,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였다.
암흑의 시기를 지나
-지금 20대를 돌이켜보면 어떤가.
=책을 몇권이라도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결혼도 했고, 작품도 했고, 소속사와 문제를 겪으면서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일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하고. 내가 ‘암흑의 시기’라고 부르는 속상하고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변한 게 있다면 이젠 보다 진지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연기를 하려 한다는 것, 상황이나 타의에 쫓겨서 작품을 선택하기보다는 내가 정말 하고 싶고 욕심나는 작품들을 하려 한다는 거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책임을 지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도 있다.
-‘암흑의 시기’는 언제였나.
=5년 전, <마녀유희>가 조기 종영되고, 타의에 의해 작품을 쉬어야 했을 때다. (당시 한가인의 소속사는 보도자료를 통해 <마녀유희> 제작진의 연출력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면서 한가인은 3년 동안 연기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편집자)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며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괴롭고, 내가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욕심나는 작품들이 많아 한동안 아예 TV를 보지 않은 적도 있다. 배우라는 직업이 굉장히 힘들고 슬프게 느껴지는 부분은, 누군가가 먼저 찾아줘야 한다는 것과 쉽게 입에 오르내리고 신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느끼는 공포가 있던 시기였다.
-그렇게 힘든 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아무래도 작품이나 CF 이외의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마 그런 것 같다. 숨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숨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었을 거다. 내가 토크쇼에 출연하는 것도 아니어서, 사적인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작품, CF 속 느낌을 보고 한가인이 편안하고 탄탄하게 안정적인 길만 걸어왔다는 선입견을 갖는 것 같다.
-작품 활동을 하지 않을 때의 한가인은 어떤 사람인가.
=장난기 많고, 늘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 영어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러 다닌다. 허송세월하는 성격이 못 돼 뭔가를 짬짬이 계속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하고 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서 돌아다니는 편이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3시쯤 만나, 가 아니라 2시45분에 거기서 만나, 라고 말하는 타입이다 내가. (웃음)
-어떻게 보면 <애정의 조건>의 은파, <신입사원>의 미옥 등 그동안 사연 많은 인물을 연기해온 것도 곱고 단정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양반집 규수 같은 <해품달>의 연우가 의외의 선택으로 보일 정도다.
=그래서 연우를 소화해내기가 오히려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연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가인에 가장 유사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점이 너무 많은 캐릭터였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 입장에서 고민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연우인데, 나는 그렇지 못한 부분이 많으니까.
-그런 연우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달’을 생각했다. 연우의 다른 이름이 ‘월’이잖나. 우울하거나 일에 지쳐 집에 들어갈 때 달을 보면 그냥 위안이 된다. 그런 달처럼, 사람들이 아프거나 힘들 때 따뜻하게 위로하고 품어줄 수 있는 친정엄마 같은, 달 같은 느낌으로 연우를 이해했다.
-김수현, 정일우 등 ‘월’로서 ‘품어야 하는’ 배우들과 나이차가 있었다. 그 점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나.
=쉽진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선배이고 나이도 많다보니 그분들이 불편한 지점도 분명히 있었을 거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든 노비에게든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 하지 않는 게 연우의 특성이기 때문에 그런 점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심지어 촬영이 끝날 때까지 수현씨에게 말을 놓지 않았을 정도다.
-첫 사극이었다. 아쉬운 점도 있을 것 같다.
=정말 많다. 사실 현장에서 모니터를 못했다는 게 가장 아쉬웠고, 한번 더 갔으면 할 때도 있었지만 바쁜 현장 분위기상 그 말을 하지 못했던 적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 모두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연일 뉴스의 주인공이 되며 최고의 한해를 보내고 있다. <건축학개론> 개봉 이후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내가 하나를 하면 다른 일을 생각 못하는 편이라 일단은 <건축학개론> 홍보에 전념하려 한다. 그다음에는 재밌게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어떤 게 있을지 보고, 빨리 작품에 들어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악역도 좋을 것 같고, 아니면 아주 엉뚱한 역할도 재미있을 것 같다. 보이시한 느낌의 캐릭터도 괜찮다.
-차기작은 드라마가 될까, 영화가 될까.
=음, 크게 가리진 않지만 마지막으로 드라마를 했으니 다음 작품은 영화를 해보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