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깡패를 만났다. 친절하게도 깡패는 선택의 기회를 준다. 돈 줄래, 죽을래?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가 아니라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 주어진 선택의 기회. 경험적으로 볼 때, 내가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의 기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당연하게 나는 더 나쁜 것을 피해 나쁜 것을 택해왔고 그래도 최악의 경우를 피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차>에서 가장 싸늘한 장면은 사채업자의 폭력에 시달리던 경선(김민희)이 자신의 신체포기각서에 지장을 찍는 순간이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버스터미널’이다. 그녀가 화차에 올라탄 건 벌건 대낮의 공공장소지만, 그녀를 향한 구원의 손길은 없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탐욕스런 자본의 욕망은 은밀할 필요도 없는 공공연한 삶의 태도일 뿐이다.
복합성을 지워버린 멜로드라마적 슬픔
이러한 경선의 선택을 두고 ‘더 나쁜 것’을 피해 ‘나쁜 것’을 택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어쩌면 경선의 삶에는 선택의 기회 자체가 봉쇄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은 듯 보인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선택의 기회는커녕 그저 덜 나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마저 빼앗긴 삶. 그것이 차경선의 삶에서 처연함이 느껴지는 이유지만, 또한 그로 인해 그녀는 가혹한 운명의 희생자라는 멜로드라마적인 틀 속에 갇히고 만다.
<화차>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영화 후반부의 ‘용산’역 시퀀스다. 경선이 종근(조성하)을 피해 달아나는 일련의 장면에서, 쇼핑몰을 경유하는 경선의 동선에는 변영주가 <화차>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일면이 응축돼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적 천국의 아케이드. 그리고 그 천국에서 노닐다 지옥으로 직행한 선영(의 환영).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의 욕망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오히려 소비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야말로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우리는 기꺼이 오늘의 행복(소비)을 위해 내일의 고통(카드 결제일)을 감내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에 사랑받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화차>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욕망을 불태우다 화차에 올라탄 인간군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변영주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향해 곁눈질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길에 들어서기를 주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화차>가 그러한 서사의 길을 갔다면 좀더 흥미로운 영화가 될 수 있었을 테지만, 정작 영화는 이러한 욕망의 탐색이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희생양을 무기력하게 응시하며 설명하는 영화에 머물고 만다.
선영과 경선 모두는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의 희생양이다. 자본은 자신의 분신을 끊임없이 생식하는 괴물 같은 존재이다. 경선과 선영은 원래의 가치에서 잉여가치를 덧붙이며 그 몸집을 불려나가는 (것을 자신으로 미덕으로 삼는) 자본의 생식 운동을 위한 먹이가 된다. 신용의 덫에 걸린 먹잇감.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이 화차를 올라타게 된 데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쇼핑을 위해) 35만원의 현금서비스에서 시작해 8천만원의 사채를 떠안게 된 선영의 사연이 인간의 자본주의적 욕망이 낳은 파국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여준다면, 감당할 수 없는 아버지의 빚을 떠안으며 가혹한 운명에 시달려야 하는 경선의 사연은 멜로드라마의 상투적 소재에 가깝다(물론 그것이 현실에서 비일비재한 사건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해, 전자는 개인의 과실에서 기인한 비극이라면, 후자는 개인의 선택을 벗어난 운명의 시련에 가깝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이러한 가정을 해보고 싶다. 경선과 선영의 사연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러니까 빚을 갚기 위해 빚을 끌어다 쓰다 파국을 맞는 인물이 선영이 아닌 경선이었다면, <화차>는 어떠한 영화로 완성되었을까, 하는 상상. 만약 그랬다면 경선은 좀더 개성적이고 욕망지향적인 팜므파탈로 그려질 수 있었을 테지만, <화차>는 멜로드라마적인 정서를 통해 그 욕망을 길들이려 한다.
표면적으로는 스릴러의 형식을 취한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화차>가 원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욕망을 추구하다 무너져버린 한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가혹한 운명의 저주를 받은 한 여인의 비극적 삶에 대한 연민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경선이 영화에서 실제로 구현된 것보다 잠재적으로 훨씬 더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경선의 매력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순간은 용산역에서 문호(이선균)를 만나는 일련의 장면이다. 신분 세탁을 위한 여행을 떠나기 위해 그녀가 입은 옷은 문호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걸던 날 입었던 옷이고, 그로 인해 문호에게 접근한 그녀의 욕망은 좀더 복잡한 층위에 놓인다. 더구나 경선이 문호에게 뜬금없이 존댓말을 쓰는 장면은 경선의 정체(욕망의 실체)를 순간적으로 뒤흔들면서, 그녀의 욕망을 단일한 무엇으로 환원할 수 없도록 한다. 하지만 직후 용산역 옥상에서 떨어지는 장면에서 경선의 단 한번의 회상장면(문호와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다)이 펼쳐질 때, 영화는 그녀(의 욕망)를 멜로드라마적인 평이한 인물로 환원해버린다. 즉, 경선의 짧은 회상은 멜로드라마적 서사를 완성하지만, 경선이라는 캐릭터가 지녔던 (잠재적) 복합성의 상실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
멜로드라마적 파토스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절대적 힘에 대한 각성과 무관하지 않다. 즉 (그 시절로 돌아가기에는, 또는 무언가를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음’(too late)에 대한 각성. 멜로드라마적 서사에서 진실에 대한 지각(知覺)이 늘 지각(遲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때문에 문호의 때늦은 지각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는 무기력하게 응시하고 지각할 뿐이다. <화차>는 경선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스토리의 중심으로 삼지만, 정작 서사를 이끌어 관객과 경선의 삶을 매개하는 것은 문호이다. 우리는 문호(와 종근)가 조사하고 추리한 경선의 삶을 전해 듣는 입장에 위치하는데, 그가 파헤친 진실은 경선에게 부여된 가혹한 운명에 대한 ‘무기력한’ 설명 이상은 아니다(무기력한 응시). 물론 그녀의 삶을 뿌리째 뒤흔든 가혹한 운명이 오직 자신을 증식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자본의 생리에서 비롯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자본주의적 가혹함이 선영 외부에서 강제된 운명처럼 그려지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이러한 탐욕스러운 자본의 메커니즘이 바로 우리 자신의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동력을 얻는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경선보다는 선영의 사연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화차>는 경선을 탐욕스러운 자본의 메커니즘의 동력으로서가 아니라, 일방적인 운명의 희생자 자리에 머물도록 한다.
‘너무 늦음’에 대한 각성
그렇다면 <화차>가 외부의 운명에 의한 가혹한 시련으로 한 인물의 삶을 그려나갈 때, 이는 관객을 그릇된 환상의 길로 안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멜로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갈라놓는 사랑의 방해물을 그들 외부의 운명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오래된 장르적 관습이다. 달콤한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서사적 틀인 ‘If only’(‘그것’만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의 멜로드라마적 환상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화합을 가로막는 ‘그것’의 자리에서 자본주의라는 괴물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화차>가 멜로드라마적 관습 속에 사회적 메시지를 결합시킬 수 있었던 요인이지만, 바로 그로 인해서 자본의 탐욕이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환상, 우리는 그저 그 시스템의 희생자라는 환상, 그렇기 때문에 나쁜 자본주의와 무구한 우리라는 이분법적 환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면에서 <화차>의 주인공은 경선이 아닌 문호여야 한다. 비록 그가 무기력한 응시에 머무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오직 문호만이 자신과 무관한 듯 보이는 세계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또는 문화적) 위기란,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는데 새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사이의 공백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의 무기력함(또는 그로부터 비롯된 감정적 파토스)이 바로 이러한 공백에 대한 반응이라면, 그 깨달음이야말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가치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