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정말 당신의 추억입니까?
2012-04-12
글 : 송경원
<건축학개론>이 첫사랑의 신화를 소비하는 방식

첫사랑 그녀는 왜 ‘썅년’이 되어야만 했을까? 사실 <건축학개론>의 이야기는 승민(엄태웅)과 서연(한가인), 그리고 승민의 현재 애인 은채(고준희)가 와인 바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그날 밤 끝난 것과 다름없다. 서연이 승민에게 넥타이와 함께 넌지시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그날 밤, 승민에게 이미 임자가 있음을 알고 그냥 병원에 계신 아버지께 넥타이를 선물하는 장면은 어린 승민(이제훈)이 서연(수지)의 집 앞 쓰레기통에 건축물 모형을 버리고 오던 그날 밤과 겹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어른 승민과 서연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정지시킨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과거 첫사랑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어린 승민과 서연이다. 많은 평자들의 지적과 같이 <건축학개론>의 시점은 과거에 맺혀 있다. 현재의 남녀가 첫사랑을 추억하는 이야기란 말이 아니다. 차라리 과거를 불러오기 위해 현재의 남녀를 배치한 쪽에 가깝다. 때문에 이미 멈춰버린 현재의 승민과 서연의 관계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 긴장감도 없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서연은 어쩌다 ‘썅년’이 되었을까, 이다.

물론 그저 현재의 사랑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던 첫사랑의 사연이 한 꺼풀씩 비밀을 털어놓을 때마다 관객은 기억 속에 서연을 ‘썅년’이란 말로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승민의 찌질함과 마주하게 된다. 답답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그랬었기에 차마 비난할 수 없는 비겁함. 결국 착한 남자가 나쁜 여자를 만든다. 우리 기억 속의 수많은 ‘썅년’들은 숨기고 싶었던 우리의 비겁함과 변명 속에 탄생한 것이다. 영화는 상처받는 것조차 두려웠던 그 시절의 우리를 대신하여 열심히 변명한다. 다들 그런 거라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필요했던 세월이 무려 15년. “30년은 되어야 집”이라는 대사처럼 이젠 지난날을 돌아보며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나이가 되었고 영화는 그제야 다시 찾아온 첫사랑이라는 그야말로 판타지스러운 설정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승민의 태도는 그 시절과 하나 변한 것이 없고, 그때부터 영화는 과거를 추억으로 회상하는 대신 현재진행형의 목소리로 재현한다. 엄청난 미화를 덧붙여서. 추억의 미화,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기억의 온도 차, 공간과 장소

애초에 <건축학개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마음먹은 것은 영화의 잔상이 기이한 형태로 계속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처음엔 달달했지만 딱히 인상 깊은 장면이 없었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영화는 아니라 판단했건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오판임을 깨달았다. 분명 영화 속 특정 장면이 뇌리에 새겨지진 않았지만 영화가 남긴 첫사랑의 인상(정확히는 ‘수지’라는 배우가 전해준 환상)이 내 기억과 겹쳐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이유가 궁금해져 영화를 다시 뜯어보려 펜을 들었을 땐 당연히 공간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했다. 심지어 제목도 <건축학개론>이 아닌가. 하지만 ‘강남과 강북의 문화적 경계와 구분…’까지 쓰다가 우스워져 도로 종이를 구겼다. 뻔히 보이는 떡밥에 낚인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분명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건축을 소재로 썼지만 그것을 이야기의 뼈대로 삼지는 않는다. <건축학개론>의 건축과 사랑은 의외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건축에 관한 철학과 사랑에 관한 담론을 결합한 것도 아니고 ‘건축학개론’을 ‘사랑학개론’으로 치환하지도 않는다. 그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첫사랑을 만났을 뿐이다. 집 짓는 일은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주인공들을 이어주는 기능적 역할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영화가 도드라지게 활용하는 것은 사람들이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굳이 기억이란 표현을 썼지만 이는 현재가 과거를 기억하는 시간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내부의 시선과 외부의 시선, 비유하자면 바깥에서 집을 보는 것과 안에서 바라보는 것과의 차이 즉 시점의 문제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철저히 거시와 미시의 양가적 태도로 기억, 공간, 사랑을 논한다.

우리가 공간을 기억하는 방식은 체험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공간은 망원경처럼 거시적 시점에서 재현되고 장소는 현미경처럼 작은 것을 관찰하며 구축된다. 우리는 물론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 예를 들어 ‘서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도 위 개념으로의 공간일 뿐 세세한 분위기와 정서까진 알 수 없다. 그것을 알기 위해선 시간의 축적과 이에 따른 문화적 경험이 필요하다. 물리적인 경험과 체험의 시간이 수반된 다음에야 공간은 온전히 나의 기억, 장소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내부와 외부의 정서적 온도 차를 만든다. 서울에서 살아왔던 승민은 강북과 강남의 불편한 차이에 괴로워하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서연은 그런 거부감이 없이 강남의 삶을 동경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재밌는 사실은 <건축학개론>의 과거는 두 사람이 체험했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치 모르는 일인 양 거시적인 시선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왠지 아쉽고 공허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건축학개론>의 시계는 과거를 현재형으로 돌리고 현재를 오히려 가정법의 영역에 두고 있다. 영화 속 강남과 강북 사이 괴리감은 분명 그 시절의 기억이지만 마치 지금 우리네 이웃의 이야기인 듯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집 바깥에서 상상해본 창밖의 풍경. 그것은 꿈에 그린 듯 아름답지만 나의 풍경, 나의 장소는 될 수 없다. <건축학개론>의 카메라는 부지런히 서울 곳곳을 스케치하고 사랑했던 기억을 장소로 연결하려 하지만 서울 곳곳의 풍경들은 신기할 만큼 기억되지 않는다. 그들의 추억을 함께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순간에도 실제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두 사람 혹은 우리의 환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기억이 아니다. 이 영화는 과거 있었던 사실을 회상하는 대신 현재의 욕망, 모두가 한번쯤 꿈꿨던 첫사랑의 신화를 투사한다. 여기서 그것이 진짜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은 비단 두 사람만의 개인적 경험만이 아니라 첫사랑이란 이름의 보편적 욕망 위에 서 있다.

이렇듯 첫사랑의 환상을 추억으로 바꾸기 위해 선택한 첫 번째 전략은 두말할 것도 없이 더블캐스팅이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영화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극적으로 관객을 과거 속에 몰입시킨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자연스럽게 첫사랑의 기억을 타자화한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사실이되 사실이 아니며, 기억이되 기억과는 미묘하게 달랐던 ‘욕망’의 목격이다. 반드시 예쁘고 착한, 아니 예뻐서 착한 여자가 첫사랑이어야만 하는 불편한 진실. 여기에는 나를 저렇게 기억해주었으면, 여전히 나를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여성의 욕망도 충분히 녹아들어가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순간의 기억은 그렇게 기억을 왜곡시킨다.

이렇듯 마치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 전형적인 첫사랑의 순간들을 선보이는 두 사람의 추억, 이 말도 안되는 보편적 환상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90년대 풍경의 디테일이다. ‘게스’ 티셔츠, 삐삐, 무스 등 90년대를 지나온 이라면 누구나 체험했을 시대의 아이콘들은 환상의 뼈대 위에 얇은 막을 씌워 거짓된 부피감을 더한다. 우리가 접속하는 것은 바로 이 장면 장면이 던져주는 기시감이다. 건축학개론 수업 시간에 들어온 긴 생머리의 청순한 여학생, 버스에서의 수줍은 마주침, 이어폰을 하나씩 귀에 꽂고 나눠듣는 노래,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설렘의 시간 등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음직한 장면은 각각 관객과 개별적으로 접속하여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모자이크를 완성한다. 이 환상의 모자이크가 관객의 가슴속에 무사히 안착하는 과정은 사랑을 노래하는 대중가요의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이 영화의 정서적 통로는 다름 아닌 음악이다. 정서 그 자체에 호소하는 보편적인 사랑의 노래. 하지만 모두의 이야기는 결국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까닭에 <건축학개론>의 달달함은 솜사탕처럼 이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솜사탕을 안 먹을 건 아니지만 왠지 아쉽고 공허한 마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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