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시아에서는 영화와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하는 감독들이 늘고 있다. 타이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인도네시아의 가린 누그로호, 대만의 차이밍량이 바로 그들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2009년부터 세계의 여러 도시를 돌며 설치미술 전시회를 열고 있다. ‘프리미티브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이 전시회는 타이의 북동부 나콘파놈주의 조그만 마을 나부아를 새로운 이미지로 변화시키는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나부아는 60년대와 70년대 타이 군부의 공산반군 소탕작업으로 무고한 마을 사람들이 희생된 곳이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나부아 마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과부의 마을’에 관한 전설이 오늘날 현실화된 아이러니한 상황을 다양한 예술작업을 통해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저술, 사진, 비디오 설치작업, 뮤직비디오,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은 제약이 없다. 63회 칸영화제 수상작인 <엉클 분미> 역시 이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그 동안 ‘프리미티브 프로젝트’는 뮌헨, 런던, 파리, 뉴욕 등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2010년 서울에서 열린 미디어시티서울 2010에서 ‘나부아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의 일부가 소개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 말까지 자국에서는 처음으로 방콕의 짐 톰슨 아트센터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가린 누그로호는 인도네시아의 전통문화를 영화와 함께 소개하는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전통음악인 ‘가믈란’을 소재로 한 2006년작 <오페라 자와>는 영화로 만들어진 뒤 자바지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전시회로 이어졌다. 2008년 9월부터 2009년 1월까지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열린 동명의 전시회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에는 싱가포르에서 ‘Following Mariah-Post-Cinema’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열었다. 자신의 영화작업과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사의 의미를 담은 설치미술 전시회를 연 것이다.
현재 홍콩에서 진행되고 있는 홍콩영화제에서는 옴니버스영화 <Beautiful 2012>가 상영 중이다. 구창웨이, 허안화, 김태용 감독의 단편과 함께 차이밍량의 단편 <행자>(行者)가 소개되고 있다. <행자>는 복잡한 홍콩 시내를 행자가 초저속으로 걷는 것이 내용의 전부다. 빡빡 깎은 머리에 강렬한 빨간색 옷을 입은 행자(마치 스님을 연상시키는)는 무심한 듯, 또는 고통스러운 듯이 도심 한복판을 천천히 걷는다. 행자 역은 차이밍량의 페르소나 이강생이 맡았다. <행자>는 일종의 연작이다. 이미 타이베이에서 같은 주제의 작품을 만들었다. 앞으로 차이밍량은 만든 연작을 한데 모아 설치미술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이들 감독들의 일련의 작업들은 영화와 미술이라는 매체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영상작업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차이밍량의 그것은 좀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강생이 홍콩 도심을 느리게 걷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예술이다. 차이밍량은 타이베이와 홍콩에서 일반 시민들이 보인 반응에 매우 흥미로워했다. 타이베이에서는 시민들이 대체로 무심한 반면, 홍콩에서는 동전을 던져두고 가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차이밍량은 영화뿐 아니라 시각예술, 행위예술로까지 자신의 예술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이밍량은 이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하면서 외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최근 대만과 홍콩영화가 중국 자본에 예속되면서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우회적인 비판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 또한 중국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제안을 받았지만 자신의 예술정신이 침해당하지 않는 자본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행자>다. <행자>는 중국의 모바일사와 포털 업체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은 작품이다. 혹 누가 알겠는가? 부산의 도심을 느리게 걷는 이강생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