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학개론>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3월13일
“나는 이런 영화입니다.”
극장의 어둠 속에 숨을 죽이고 있으면 어슷비슷하게 흘러가던 영화들이 저마다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에서 그 지점은, 16년 전 건축학개론 수업 중 서울시 지도 위에 승민(이제훈)이 긋는 등굣길 경로가 서연(수지)이 앞서 그려놓은 선과 겹치는 몇초 동안이다. 승민의 선(線)이 희미한 뽀드득 소리를 내며 서연의 선과 포개지는 찰나는, 청각과 촉각까지 설레게 한다. 첫 울림이 시사하듯 <건축학개론>의 호소력은 줄곧 융합이나 해소가 아니라 ‘중첩’에서 나온다. 예컨대 이 영화의 감흥은 극중 인물의 흥얼거림이 그가 듣지 못하는 (그러나 관객에겐 들리는) 화면 밖 사운드트랙과 호응할 때, 첫눈 오는 날 약속 장소에 상대도 왔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될 때 솟는다. <건축학개론>은 말하자면 덧칠과 증축의 영화다. 스무살 서연과 승민은 이름 모를 가족이 살았던 흔적이 남은 빈집을 손질해 그들의 아지트로 전유한다. 성인이 된 서연은 유년기에 살았던 집의 골조를 살려 중년의 거처로 개축한다. 이용주 감독이 설계한 세계에서 현재는 과거에, 내 생활은 타인의 삶에 그저 ‘얹혀’ 있다. 양자는 서로의 궤도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 그리하여 16년에 걸친 멜로드라마 <건축학개론>이 희구하는 최종적 목표는 특이하게도 고작 확인의 행위에 그친다. 너도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는, 나 역시 너에게 한때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이 영화의 연인들은 사랑으로 팔자를 고치지 않는다. 확인된 진실은 표면적 스토리의 흐름을 틀어놓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한 노릇이다. 역설적으로 그 진실은 서연과 승민의 이후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는 인상을 남긴다. 폐허가 된 줄 알았던 과거의 등대에 다시 불이 들어와 현재를 넘어 미래까지 빛을 던지는 셈이다. 거꾸로 만약 영화가 승민과 서연을 맺어 첫사랑이 사랑 중의 호소력사랑이라는 신화를 실현해버렸다면?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주인공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권태, 오해와 화해의 심드렁한 영구순환을 예견하며 극장을 나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강고하고 무감동한 세계로 돌아갔을 것이다.
3월14일
16년을 사이에 두고 동일인물을 연기한 배우 수지와 한가인, 이제훈과 엄태웅은 (포스터에 부러 등식으로 명시할 만큼) 닮은 구석이 적다. 배우 외모의 간극은 영화 도입부에서는 몰입을 방해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의도된 연출로 납득된다. 아니, 나아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일 지경이다. 서연은 이 집 저 집 떠돌다 지쳤고 승민은 한자리에 눌러앉아 능란해졌다. 꿈 많고 의욕적이던 소녀의 에너지는 무너지려는 여인이 가까스로 자기를 방어하는 가시로 퇴화됐다. 한편, 전혀 모르던 남자애와 여자애가 금방 친해졌다는 사실을 우주의 기적처럼 영접했던 소년은, 첫사랑을 “X년”이라고 별스럽지 않게 지칭할 수 있는 남자가 됐다.
<건축학개론>이 전하는 씁쓸함은 시간이 초래한 두 남녀의 외적, 내적 변화에도 기인하지만 이제 더이상 서로에게 잘 보이려고 애틋하게 노력하지 않는 둘의 태도에서도 나온다. 승민과 서연은,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듯, 조난당한 애인을 설산 밑에서 평생 기다리다가 젊은 모습 그대로 떠내려온 청년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흐느끼는 노파가 아니다. 장르에 길든 관객의 자동적 기대와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사랑의 복원과 성취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미련(未練)이라는 물건을 다룰 것이냐의 문제다.
역사는 사후적으로 구획된다. 반면 개인에게 자기 삶의 시간은 단절과 마디가 없는 연속체로 체감되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멀어졌다 해도 내게는 어제의 어제, 지난해의 지난해일 따름이었던 시간이 영화와 드 라마에서 명백한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재연’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날은 삶의 이정표(‘청춘-뒤돌아 20km, 죽음-앞으로 20km’)를 맞닥뜨린 날로 등재된다. “이제 당신의 그 시간은 공식적으로 ‘옛날’이 되었습니다”라는 전보가 떡하니 날아들어 서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청춘이 속한 90년대의 차례도 왔다. 이제 내 불균질하고 못생긴 기억의 울퉁불퉁한 요철은 마멸되고, 집단적 회상의 교집합에 속하는 원만한 이미지들이 ‘복고풍’의 이름 아래 나의 과거를 접수하게 되겠지. 어떤 추억도 과거완료 시제에 내주지 않으려는 반항은 느리게, 하지만 확실히 패배할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그래서 내게 무거운 빗장이다.
3월21일
벨라 타르가 마지막 작품이라 공언한 <토리노의 말>을 보다. 스크린으로 무엇을 보고 듣는 행위만으로도 몸이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극중 대사가 말하듯 “우리는 ‘스케줄대로’ 파멸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가 각인시켜서만은 아니다. 그칠 줄 모르는 강풍 가운데 고립된 영화 속 부녀, 그리고 그들이 기르는 쇠약한 말은 식량과 물이 바닥나기 전에 자진해서 먹고 마시기를 멈추어 숨질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딸에게 “먹어야 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도 감자를 까던 손을 멈춘다. 화면의 빛이, 서서히 스러져간다. 만약 그들 셋이 죽는다면 살해자의 이름은 굶주림과 기갈이 아니라 절망이다.
영화를 활동사진이라 칭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거꾸로 활동하지 않는 이미지가 ‘레어템’이 되고 골동품이 돼버린 시대에 영화는 혹시 그 반대말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토리노의 말>은 이른바 ‘활동’과 무관한 행위의 연쇄다. 영화가 담아낸 엿새 중 9할은 잠에서 깨어나 옷 입고 먹고 빨래하고 장작을 패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동물적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 몸놀림으로 채워져 있다. 이 영화에서 생명유지와 무관한 유일한 행위는, 응시다. 병든 아버지와 딸은 먹고 입고 자는 행위 중간 종종 옹색한 창 앞의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황야를 내다본다. 벨라 타르 감독은, 영화의 존재 이유는 응시라고 말없이 웅변한다. <토리노의 말>은 건초를 먹이려다 포기한 주인이 마구간 문을 닫고 멀어진 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말의 실루엣을 한참 지켜보고, 빗장 지른 마구간 문짝 앞에서 한참 동안 카메라를 거두지 않음으로써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100행의 대사보다 통렬히 서술한다. 벨라 타르의 카메라는 우물이 말라붙어 식수를 찾아 떠나는 부녀가 수레에 짐을 다 실을 때까지 일일이 주시하고,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던 그들이 탐색을 포기하고 돌아오기까지 한순간도 눈 돌리지 않으며 마침내 체념한 그들이 집으로 돌아와 마구를 풀고 그 모든 짐을 다시 부리는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영화는 문학과 회화와 음악과 TV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이는 영화적 시간은 무엇이냐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한달 전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클린>을 다시 보며 비슷한 문제를 생각했다. 내게 있어 <클린>에서 가장 마술적인 대목은 널리 운위된 대단원이 아니라, 오랜만에 아들을 만날 희망으로 약속 장소에 나왔던 에밀리(장만옥)가 아이를 데려오지 않은 시아버지(닉 놀테)를 보고 실망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거리로 나왔다가, 자신에게 다른 방법이 없다는 현실을 시인하고 다시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장면이다. 통상의 드라마/영화라면 편집돼도 이상할 게 없는, 대사 한줄 없는 1분이 채 안되는 이 연결 신은, 서사의 효율성 논리로는 생략돼 마땅한 시간의 주름을 펼쳐 보인다. 뒷모습, 망설임이 만들어내는 사이, 후퇴와 역행의 운동, 회한과 취소의 몸짓, 무용한 섬광. 지금 나에게 영화적 시간이란 그런 입자로 이루어진 비밀이다.
3월28일
2010년 8월30일 열었던 ‘영화의 일기’를 덮는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다음 내가 누르고 있는 키는 또다시 ‘엔터’(enter)다.